반역에 대한 반역 (1)
성녀의 다급한 지시에, 단상 쪽으로 달려 나온 성기사들이 왕실의 기사들과 검을 겨누며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장내에 경악스러운 소란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뭐, 뭐야?”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일....”
“알베르트 국왕이 신의 이름을 팔았다는데?”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당황하고 있는 알베르트를 바라보며, 눈으로 말했다.
‘광신도 맛이 어떠냐! 오늘 네 잔칫상을 완전히 엎어주마!’
예상대로 세르시아 교단은, 그들이 모시는 신이 인간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판단되자 중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알베르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네, 네놈...! 네놈이 분명히 나더러 왕이 될 운명이라고 예언하지 않았더냐!”
“예? 제가 예언을...? 무슨 소리시지?”
세르시아 교단이 내게 가세한 이상, 예전처럼 굽실굽실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당당하게 잡아뗐다.
“잡아떼지 마라! 네놈이 꿈에서 세르시아의 계시를 받고 내가 왕이 되는 미래를 보았다고 분명히 말했거늘!”
“알베르트 님.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제가 세르시아 님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꺼낸 적이 있습니까? 예언이나 계시라는 단어는요?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네. 꿈은 알베르트 님이 꾸신 거 같은데요? 개꿈이요.”
나는 알베르트를 향해 정말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로써 대꾸했다.
“이익...! 다들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저놈을 잡아 내게 무릎 꿇리지 않고!”
알베르트가 분개하며 기사들을 닦달했지만, 성기사와의 대치 상황을 깨고 행동에 나서는 기사는 없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세르시아 교단을 향해 정말로 검을 휘두르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걸.
“이놈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으─”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이성을 잃고 날뛰는 알베르트에게, 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기사단장이 황급히 달려가 귓속말을 건넸다.
내게 남의 귓속말을 도청하는 재주는 없지만,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다. 뭐,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진정하라는 소리겠지.
이윽고 기사단장의 조언에 정신을 수습한 알베르트는 단상으로 올라와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이런 공식 석상에서 당장 내게 손대기는 어려운 일. 푸들대며 나를 노려보기만 하던 그는, 손가락으로는 성기사를 가리키고 눈은 성녀를 향하며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지금...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는 거요?”
“알고 있습니다. 본 교단은 신성 모독의 혐의가 있는 자로부터 성자를 보호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저 천출이 내게 정말 예언을 했다니까!!”
성녀의 단호한 대답에 알베르트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나는 더 억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니, 그런 적 없다니까요? 성녀님이 알아보시면 금방 들통날 텐데,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건 사실이에요. 제가 오늘 사실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성자는 예언을 부정하고 있으니,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는 본 교단에서 보호하겠어요.”
그렇지. 일 잘하네.
성녀가 아니라 법관을 해도 되겠어.
“성자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신병을 넘겨드리겠으나, 만약 성자의 말이 사실일 경우... 본 교단은 신성 모독을 통해 부당하게 이루어진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 뭐...?”
말하는 투로 미루어보건대, 그녀는 내 주장을 신뢰하는 듯 보였다.
하긴, 그녀도 성녀이니 신을 팔아먹는 행위가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겠지. 세르시아는 뒤끝이 상당한 신이니까.
어쨌거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즉위식을 거행했던 알베르트는 난데없는 날벼락에 눈이 뒤집혔다.
“감히... 나는 전대 국왕인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의 장남이다! 나의 아버지도 왕이었고, 조부도, 고조부도 왕이셨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자격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에요. 방법을─”
“닥쳐라! 네년이 교단의 권세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그 잘난 교단이 왕국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보아라! 지금 너희 말고는 아무도 나의 즉위에 반대하는 이가 없지 않으냐!”
“.......”
성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년 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뒤에 이어진 말 때문일 것이다.
알베르트의 말마따나 세르시아 교단의 권세가 막강하다고는 해도, 엘디니아 왕국 전체와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왕국의 모든 자들이 알베르트의 편인 것은 아니겠지만, 교단을 제외하고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알베르트의 즉위에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성녀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줘야지.
나는 좌중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무도 없으십니까? 신성 모독과 거짓으로 점철된 즉위를 반대하시는 분이?”
그러자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란색 로브를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여기 있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지만, 사실 약속된 게 맞았다.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 노인을 향해 쏠렸다.
알베르트 역시 어이없어하며 그를 바라봤다.
“......하, 뭐? 영감은 누군데 감히 나의 즉위를 반대하는가?”
“본인은 얼마 전에 청색 마탑의 주인이 된, 벤든 니콜스라고 하오만.”
“처, 청탑주?”
니콜스의 옆에는 클로이가 알베르트를 노려보며 앉아있었는데, 진짜 당장 고유 마법이라도 갈길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어서 쉴드를 써야 하나 싶어질 정도였다.
“우리 청색 마탑은 성자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는바, 찬탈자의 부정한 즉위를 찬성하지 않겠소.”
장내에 또다시 술렁임이 일었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술렁거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나도 좀 당황했다.
미리 편지를 통해 계획을 대강 공유하긴 했었는데, 솔직히 알베르트와는 별 은원 관계가 없는 니콜스가 ‘찬탈자’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돌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 클로이가 주장한 건가?
어쨌든 생각해보니 아주 적절한 단어였다.
“이익...! 청색 마탑이 무슨 자격으로 반대하겠다는 거지? 세르시아 교단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국정에 참여할 권한이 없지 않은가? 나의 즉위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은 오직 작위가 있는 귀족 가문뿐이다!”
이를 악문 알베르트가 악을 쓰듯 외쳤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르시아 교단은 원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고, 마탑은 말 그대로 그냥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탑이다. 둘 다 유력 집단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왕위 계승에 개입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작위가 있는 귀족 가문의 일원.’
내가 광장의 한 지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곳에 앉아있던 사내가 똥 씹은 표정으로 일어나며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채트먼 후작가의 장남인 나, 길버트 채트먼 역시 이 의심스러운 즉위에 반대 의견을 던지는 바요!”
나와의 내기에서 패배한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다.
그때 작성한 계약서 때문에, 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벙어리가 됨과 동시에 고자가 되는 고약한 저주에 걸린다.
“기, 길버트 교수! 자네가 왜...?”
알베르트는 충격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둘 다 수도에 기거해서 면식이 있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이윽고 그는 얼굴에서 충격을 지우고 분노를 새기며 물었다.
“그것은... 네 아비인 채트먼 후작의 뜻인가?”
“내 개인적인 의견이오.”
“그렇다면 더 들을 것도 없군. 나는 작위가 없는 귀족 따위의 개인적인 의견은 들어줄 생각이 없다.”
거 되게 까다롭게 구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위가 있는 귀족 가문이면 자격이 있다고 하더니, 스리슬쩍 조건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하지만 나도 준비한 카드가 남아 있었다.
잠시간 기다리자, 곧 붉은 머리의 사내가 좌석에서 일어났다.
“저도 반대를 표합니다.”
“하아... 네놈은 또 누구인가? 내가 얼굴을 모르는 걸 보면 작위가 없는 놈 같은데.”
알베르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사내를 잠깐 흘끔거리고는, 시선도 주지 않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제는 말투도 거칠어져서 거의 막말 수준이었다.
“병상에 누워계신 체스터 백작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에드윈 체스터라고 합니다.”
“체스터...? 하, 빌어먹을 동부 새끼들....”
평소 동부와 남부를 멸시하던 알베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중얼거렸는데, 이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뭐지? 바본가?’
단상에서 나오는 소리는 마법으로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래 머리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 듯했다.
그의 중얼거림이 증폭되어 광장으로 퍼져나가자, 에드윈 체스터 옆에서 중년의 남성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나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남성은, 굉장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알베르트를 향해 이죽거렸다.
“빌어먹을 동부라고?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는군.”
“시, 시즈모어 공작?!”
동부의 맹주이자 실질적인 지배자다.
알베르트가 포섭하지 못한 세 명의 공작 중 하나. 그리고 에드윈 체스터의 장인어른이다.
“새로운 국왕께서 동쪽 국경 너머의 적들로부터 왕국을 지켜온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유감이군.”
“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패륜과 신성 모독으로 왕위를 찬탈한 자가 우리를 무시한다라.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행동하는 게 공평한 처사겠지?”
그는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리에 있는 동부의 영주들은 들어라! 앞으로 우리 동부는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좋아좋아.
사실 알베르트의 말실수는 그저 꼬투리 잡는 용도일 뿐이었고, 이건 사전에 어느 정도 계획된 일이었다. 나와 편지를 주고받던 에드윈이 공작을 설득해보겠다고 했는데, 기어코 성공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공작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초강수를 던져주었다.
세르시아 교단, 청색 마탑, 그리고 동부까지.
동부지방 전체가 가담해줄 줄은 몰랐으나, 아무튼 내가 준비한 카드는 하나 같이 내로라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대놓고 반기를 들고일어나자, 그것은 곧 방아쇠가 되어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나 알프레드 밀러 백작은 성자와 정의로운 분들의 뜻에 동참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한 알프레드 폰 하츠펠트를 인정하지 않겠─”
“나는 남부의 로버트 백작이오. 나 역시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부정─”
“패륜을 저지른 자는 왕이 될 자격이 없─”
중립을 표방하거나 눈치 보고 있던 귀족들이 줄줄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물론 반대하는 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정에 문제가 조금 있었다고는 하나, 알베르트 전하는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였소!”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게 어째서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알베르트를 옹호하는 귀족들까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참관인들은 자연스럽게 반왕 세력과 친왕 세력으로 나누어졌고, 그들 간의 언쟁으로 인해 즉위식이 거행되고 있던 대광장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아직도 중립을 지키는 자들이 꽤 많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내 목표치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 그만!! 모두 닥쳐라!!”
이성을 잃은 알베르트는 날카로운 언사를 쏟아냈다.
“네까짓 것들이 무어라고 감히 나의 왕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냐! 누가 왕좌에 앉을지는 왕족이 결정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저 왕좌에 앉은 왕족을 떠받들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새 말이 또 바뀌었군. 작위가 있는 귀족이면 왕좌에 대해 논할 수 있다며?
억지가 가득한 발언이었지만, 그것에 응수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형님.”
“......!”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2왕자 프란츠였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도 왕족입니다. 왕좌에 대해 논할 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 염치라는 걸 모르는 놈이군. 쥐새끼처럼 덜덜 떨며 숨어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지? 부끄럽지도 않으냐?”
“......부끄럽지요. 저에게 용기가 부족해 의당 제가 나서야 했을 일을, 성자이신 엘 공이 대신해주셨다는 것에 대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대신해준 거 아닌데.
퀘스트 때문에 내가 더 절실한데.
“그래서 이제는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저는 이 시간부로, 형님이 부당하게 차지하신 왕좌에 도전하겠습니다.”
─웅성웅성
솔직히 보름간 설득했는데 이제야 행동하는 게 조금 괘씸하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굉장히 소심한 자인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뭐, 나름대로 큰 용기가 필요했겠지.
어쨌거나 프란츠의 이름이 있어야 수월한 건 사실이다.
“이런 미친놈이...!”
알베르트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건 반역이야! 너희들은 모두 반역자다! 프란츠도, 교단도, 네놈도!”
“예, 뭐. 반역에 대한 반역이죠.”
나는 그의 말을 살짝 수정하며 시인했다.
알베르트도 반역으로 왕위를 찬탈했으니, 이건 반역에 대한 반역이다.
“이익...!”
알베르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거렸다.
그도 눈이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호위를 위해 대동한 기사들만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반왕 세력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는 이윽고 결심한 듯 소리쳤다.
“반역자 무리는 들어라! 오늘 즉시 이 왕국을 떠나라. 내일부터 나의 영토에서 네놈들의 얼굴이 보인다면 자비 없이 목을 칠 것이야!”
최후의 통첩이자 선전포고였다.
이제부터는 정치가 아닌 전쟁의 영역이다.
그의 통첩과 동시에 즉위식이 종료되며, 단상 위의 소리를 증폭시켜주던 마법이 꺼졌다.
나는 단상을 내려가며 알베르트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찬탈자님.”
“......뭐?”
“저는 당신을 죽일 거거든요.”
느닷없는 나의 살인 예고에,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분노보다 의문이 더 앞서는 듯했다.
“도대체 왜...? 내가 약속한 교황의 자리를 마다하고, 반역자를 자처하면서까지 나를 죽이겠다는 이유가 대체...?”
“그야, 저와 눈을 마주치셨잖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단상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