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름으로 (3)
나는 왕성에서 알베르트와 대화를 마친 후 여관으로 향했다.
‘보름 뒤라....’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보름 뒤에 수도의 대광장에서 국왕 즉위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미 국왕인데 국왕 즉위식을 한다는 게 뭔가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혼인 신고부터 하고 나중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알베르트도 기습적으로 왕좌를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왕이 되었음을 공공연하게 선포할 자리가 한 번쯤은 필요하긴 했었다.
그래서인지 즉위식의 제안은 내가 했지만 오히려 그가 더 좋아했는데, 즉시 왕국 전역에 있는 모든 영주와 유력 집단에 초대장을 발송하겠다고 했다. 초대장을 보내는 시간과 그들이 수도까지 오는 시간을 감안해서, 즉위식은 보름 뒤로 정해진 것이다.
‘아, 이거 데드 라인이 잡히니 긴장되는구만.’
즉위식이 ‘국왕 시해자’ 퀘스트의 분수령이다. 그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퀘스트의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
일단 나름대로 계획은 얼추 세워놨는데, 모든 일이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법은 아니니까. 벌써부터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뭐,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해봐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둑어둑해진 밤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목표했던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에 머물던 객실의 문에 얼굴을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앨리스! 앨리스! 큰일이야!!”
나는 문을 열고 허겁지겁 달려 들어갔다.
“무, 뭐야? 무슨 일이니?”
행복한 야식 타임을 즐기고 있던 앨리스가 음식을 우물거리다 말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짜잔! 이 몸 도착.”
“.......”
으적으적.
그녀는 입에 머금고 있던 음식을 마저 씹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는데, 입안에 들어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벌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썩어있었다.
“아, 왜.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큰일은 맞잖아.”
“......으휴. 난 또 네가 이번에도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잖니.”
사고를 쳐?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준 앨리스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자식한테 철 좀 들으라는 소리를 들은 부모의 느낌이랄까.
“뭐냐,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너 주려고 선물도 가져왔는데.”
“서, 선물? 먹을 거니?”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는 품에서 마법서를 한 권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응...? 이건 책이잖니. 먹을 거라면서?”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라.”
“무, 뭐래.”
내가 꺼낸 마법서는 티안브리스에게서 회수해온 인페르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팔아서 다른 마법서를 구하고 싶지만, 메인 퀘스트를 앞둔 나로서는 당분간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판매할 때도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파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썩히느니, 나중에 시간이 날 때까지는 앨리스에게 맡겨서 공부나 해보라고 할 생각이다.
“이거 진짜 엄청난 고대의 마법이니까 한번 익혀봐. 지옥의 불길을 일으키는 건데, 대상을 완전히 불태워버리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 화끈한 불이지.”
“우, 우와... 지옥의 불길...?”
“그래, 나중에 팔 거니까 깨끗하게 봐라.”
“으, 으응!”
앨리스는 감전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조심스레 마법서를 챙겼다. 공부하기 싫다고 떼쓰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고대의 마법을 마다하는 마법사는 없는 모양이다.
근데 습득할 수 있긴 하려나? 앨리스의 상위 버전인 티안브리스조차 한 달이 훌쩍 넘게 소요됐으니, 앨리스는 그보다 오래 걸릴 것이다. 아예 습득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
뭐, 못 배워도 딱히 상관은 없다.
이건 필수 조건이 아니고 보너스 개념이니.
“아무튼, 잘 지냈어? 모험가 일은 열심히 했고?”
“그러엄. 내가 인기가 얼마나 좋은데. 다들 나랑 같이 의뢰를 나가고 싶어서 안달인 거 있지? 정말 피곤하다니깐~.”
콧대를 높게 세운 그녀는 도도하게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래? 여긴 수도인데도 너보다 강한 모험가가 별로 없나 보네?”
“응. 회전하는 덩어리를 쓰는 모험가도 있긴 한데, 나한테는 안 돼.”
“회전하는 덩어리라면... 오브? 이야, 그래도 중급 마법을 쓰는 모험가가 있구나. 확실히 수도는 다르네.”
“나한테 안 된다니까! 왜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는 거니?”
“아니, 너보다 약한 거야 당연한 거니까.”
앨리스는 탈 모험가급이다. 모험가는커녕 아카데미 학부생도 감히 못 비비는 실력자다. 아마 정식 마탑원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보아하니 그녀는 나 없는 동안 착실히 모험가 일을 하며 잘 지낸 모양이었다.
“아, 맞다. 너도 왕이 바뀐 건 알지?”
“응, 알지.”
“혹시 그거에 대해서 모험가들 사이에선 별말 없어?”
모험가나 용병 중에는 호사가가 많기 때문에, 평민들의 여론은 그들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왜 없겠니? 의뢰 수행 중에 틈만 나면 그 얘기밖에 안 하는데. 지루해 죽겠어, 정말.”
“뭐라고 하는데?”
“그런 얘기는 재미없어서 신경 써서 듣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왕은 나쁘다구 하던데? 패륜아라나 뭐라나. 그리고 모험가에게 열어주는 몬스터 서식지도 줄여버린 거 있지? 그래서 다들 싫어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구.”
“흐음, 그래? 그걸 왜 줄였지?”
관리 인력이 부족한가? 내가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하자, 앨리스도 오른쪽으로 갸웃하며 나를 따라 했다.
“......? 뭔데? 왜 따라 해? 아.”
아, 얘 도플갱어였지.
그녀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볼을 감쌌다.
“앗, 나도 모르게 그만... 요즘 자꾸 남을 흉내 내고 싶어지네. 아무튼,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궁금하면 너도 모험가 길드로 올래? 나랑 같이 의뢰 나가자! 내가 몬스터 서식지 소개해 줄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당분간 좀 바쁠 예정이라 안 되겠네.”
“뭐야! 또?! 너는 왜 이렇게 맨날 바쁘니?”
“아하하, 미안. 이번엔 진짜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
세르시아교 본단에 있는 한 귀빈실의 앞.
“......후우, 이젠 이 문짝만 봐도 신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두드려 노크했다. 똑똑똑.
─누구십니까?
“저 엘입니다.”
내가 신분을 밝히자,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한때는 왕자였던 프란츠 폰 하츠펠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엘 공.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시는군요? 하하. 벌써 이 주일은 된 것 같습니다. 자,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렇다. 나는 이자를 설득하기 위해 무려 2주 동안이나 매일매일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바꿔말하면, 프란츠는 2주 동안이나 설득이 안 되고 있다는 말이다.
‘아오, 이 정도 공을 들였으면 제갈량도 넘어왔겠다.’
어쨌거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오늘도 같은 말씀을 하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부당하게 왕좌를 차지한 알베르트 국왕에게 대항하려면 왕자님이, 아니 프란츠 님이 나서주셔야 합니다.”
사실 프란츠가 나서지 않아도, 알베르트를 죽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오베르가에게 의뢰한 마나 포션도 받았겠다, 다시 알현을 신청하고 면전에서 냅다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갈겨버리면 자기가 어쩔 텐가? 그대로 끽, 하고 죽어버리는 수밖에.
문제는 국왕을 시해하고 난 이후다.
내가 왕을 죽이는 건, 왕족이 왕족을 제낀 알베르트의 왕위 계승 문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일이다. 타당한 명분이 없다면 나는 그대로 비열한 암살자로 낙인찍혀 척살 당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퀘스트가 다 무슨 소용인가?
죽일 거라면 당당하게 죽여야 한다. 충분한 반대 세력을 끌어모아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제기하고 선전포고를 한다든가.
“이제 와서 제가 나선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형님은 이미 왕위에 오르셨는데....”
“아니, 왕위에 올랐으니까 프란츠 님이 필요한 거죠. 프란츠 님도 적법한 계승권을 가진 왕족이시잖습니까?”
“.......”
이 소심한 사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왕족인 프란츠도 가만히 있는데 네놈이 뭐라고 나서는 것이냐?’라는, 나의 오지랖에 대한 태클이 들어올 것이다.
뭐, 그런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프란츠가 있어야 반대 세력을 모아서 규합하기가 수월하다.
그리고 왕을 끌어내렸으면, 그 빈자리에 집어넣을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런 대안 없이 무턱대고 일만 벌이면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겠지. 여러모로 프란츠가 있어야 그림이 좋아진다.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두 분이서 정당하게 후계자 경쟁을 하던 중에, 저렇게 기습적으로 왕좌를 탈취당한 게? 저 같으면 열받아서 잠도 못 잤습니다.”
“......엘 공의 말씀에 틀린 것은 없습니다. 저도 형님이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정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저 혼자서는 뒤집을 수 없을 만큼....”
이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베르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의향도 있다. 하지만 확신이 없다. 자기가 나섰을 때, 자신을 도와 함께 싸워줄 세력이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솔직히 그런 세력은 프란츠 본인이 먼저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만들어야 하는 건데, 소심한 탓인지 주도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 바깥에는 프란츠 님이 나서기만 하시면 도와줄 사람들이 꽤 많다니까요? 어제만 해도 왕립 아카데미 교수진이 알베르트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학생들을 사실상 볼모로 잡았다고요.”
휴교했을 때 잽싸게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무사한데, 미적대며 아카데미에 남아 있던 소수의 학생들은 알베르트한테 사실상 볼모로 붙잡혔다.
“그런 악행들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
고개를 푹 숙인 그는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일이 즉위식입니다. 교단의 관계자는 물론이고 왕국 전역에서 온 귀족들도 참석하죠. 그런 공식적인 자리라면, 이미 패륜으로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는 알베르트가 대놓고 프란츠 님의 목숨을 위협하긴 어려울 겁니다.”
“.......”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
수도 엘디니아의 대광장.
국왕 즉위식이 거행되고 있는 이곳에는 즉위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광장 중앙에 있는 단상에서는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알베르트가 취임사를 하고 있었다.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의 아버지이자 전대 국왕인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는 폭정과 폭거를 일삼는 폭군이었으며 나라를 병들게 하는.......”
즉위식에는 알베르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귀족뿐만 아니라, 반대하거나 못마땅히 여기는 귀족들도 참석한 상태였다.
“온종일 자기 합리화만 해대는군.”
“스스로 떳떳하질 못하니 변명만 길어지지.”
“전대 왕께 폭군의 기질이 조금 있었다고는 해도 자기 아버지를 저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건가?”
가문의 사람들과 숙덕거리는 반대파 귀족.
자칫 위험할 수 있음에도 이들이 수도까지 온 것은 이 자리가 즉위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 나가는 알베르트일지라도, 모두가 모인 이런 공식 석상에서 함부로 귀족을 처형하기는 힘들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왕국 전체가 들고일어날 테니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알베르트를 못마땅히 여기는 귀족도, 이런 자리에서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먼저 나서서 총대를 메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다들 조용히 가족과 숙덕거릴 뿐.
화약은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그것을 한데 모아 터트려줄 불씨가 없었다.
“......해서 왕국의 국민이자 왕족의 일원으로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에, 가슴 아프지만 썩은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음을.......”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것은 비단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워낙 중대사이니만큼 왕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유력 집단도 다수 참석했다.
대표적인 예로 세르시아 교단.
광장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배정받은 그들은, 성녀와 교황을 비롯해 다수의 사제와 성기사까지 참석해 알베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취임사를 듣고 있던 성녀의 얼굴은 곧 당혹으로 물들었다. 알베르트가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토록 과격한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에는 중대한 사유가 하나 더 있다. 몇 달 전, 나는 왕이 된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것도 희망의 여신 세르시아 님으로부터.”
─웅성웅성
알베르트의 충격적인 선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그리고 그 선언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성녀였다.
‘......!’
그럴 리가.
그런 계시가 몇 달 전부터 있었다면 성녀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고, 신께서 인간의 대소사에 관여할 리도 없으며, 성자와 성녀가 있는데 굳이 비교인인 알베르트에게 계시를 내릴 리도 없다.
이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성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있는 알베르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게 사실인가요? 국왕 전하께서 세르시아 님의 계시를 받으셨다는 것이?”
성녀인 자신이 직접 신께 사실관계를 확인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당장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성녀는 직접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알베르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사실이오. 그러니 교단도 나를 지지해주시길 바라오.”
“......세르시아 님께서 그런 계시를 내리실 거였다면 성녀인 저를 통하셨을 텐데요.”
“허어, 성녀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 계시는 성녀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잖소?”
“그게 무슨....”
알베르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시를 받은 건 내가 아니라 성자라오. 자세한 얘기는 이제부터 직접 들으시면 되겠지. 성자님,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겠소?”
“......!”
성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자는 부당하게 왕좌를 차지한 알베르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왜...? 설마,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서? 아니면... 정말 계시를 받은 건가?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알베르트를 지지하지 않았지?
─저벅저벅
성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알베르트의 부름을 받은 엘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는 참관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세르시아 교단의 성자 엘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법으로 증폭되어 광장에 퍼져나갔다.
“제가 비록 세르시아 교단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서, 그리고 성자로서 알베르트 전하께서 언급하신 계시에 대해 설명해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성자까지 가세하자 장내의 웅성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본격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성녀님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제가 신탁이나 계시를 받았다면,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까?”
“......네. 제가 신께 직접 여쭈어볼 수 있습니다.”
지목당한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엘은 참관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 이렇듯 저는 계시에 관해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해봤자 금세 들통나겠죠. 거기에 더해 신의 뜻을 사칭하는 것은 신의 분노를 사는 일. 그러므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임을 밝힙니다.”
엘의 설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듯하자 장내의 술렁임이 멎었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선언했다.
“......성자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저는 결단코,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가 왕이 될 거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 이게 무슨!”
흡족한 얼굴로 엘을 바라보고 있던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세르시아 님의 뜻을 사칭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를, 교단이 나서서 그 죄를 물어주시기를 요청드리는 바입니─”
“저, 저놈을 체포해라!! 당장!!”
스릉- 알베르트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자, 단상 밑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성녀 역시 성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성자를 보호하세요!!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