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름으로 (1)
미친 엘프 아스왈드를 떼어내는 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서쪽 교수회관을 향했다.
발걸음이 몹시도 경쾌했다.
“흐흐흐, 이걸 속아? 멍청한 엘프 같으니라고.”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쓰면 꼼짝도 못 하는 것은 아스왈드도 마찬가지였다. 마나 탈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남이 내 필살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도 그 마법을 쓸 땐 저런 모습이었을까? 솔직히 멋있었다. 캐스팅 시작과 동시에 스파크가 튀는 것부터 새하얀 번개가 뻗어나가는 것까지. 3인칭으로 보니 사람을 압도당하게 만드는 그런 포스가 있었다.
아무튼 아스왈드의 라이트닝 블래스트는 나처럼 상급 땅의 정령을 소멸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위력은 상당히 훌륭했다.
뭐, 녀석도 쿼드러플이니까.
그 정도면 웬만한 상급 마법 뺨 때린다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아스왈드? 그거 이상으로 강한 마법 못 배운다. 적당히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어디서 환불 같은 소릴 하고 앉아있어.
‘......근데 내가 아카데미에 온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는 내가 아카데미에 입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내 일렉트릭 웹 같은 탐지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건가? 아니면 정령을 이용한 건가? 뭐가 됐든 간에 또 나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깨어나기 전에 빨리 볼일만 보고 아카데미를 떠나야겠군.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열심히 걷던 중, 묘한 점을 하나 알아챌 수 있었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아카데미를 떠나는 학부생들이 꽤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방학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겨울의 끝자락에 가까워져 가는 지금 시기에 방학을 준다는 것도 좀 이상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고 있을 때였다.
“강사님?”
맞은편에서 내 실전 격투 강의의 열혈 수강생이었던 오우 피들스턴이 긴가민가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우!”
나는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내 가르침을 아직까지 따르고 있는 모양인지, 기사 학부생임에도 챙이 큼지막한 마법사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 강사님이 맞으셨군요.”
“그래, 나도 네 이름을 부른 게 맞다.”
피들스턴 역시 짐을 한가득 짊어 메고 있는 상태였는데, 나는 그를 만난 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마침 잘됐네. 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짐 싸 들고 어디 가는 건데? 지금은 방학할 시기도 아니잖아.”
“옛, 다들 본가로 돌아가는 겁니다. 어제 휴교가 결정됐거든요.”
“휴교? 갑자기 왜?”
내가 의아한 듯 묻자, 피들스턴은 양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새로운 국왕이 탄생했잖습니까? 그것도 멀쩡히 살아있는 전대 왕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입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역이다, 아니다 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싸울 정도로요. 학생들마저 이럴 정도면 다른 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마찬가지로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해서 언쟁이 잦습니다.”
의견이 분분하다고? 왜지?
아버지를 강제로 끌어내려서 지하 감옥에 유폐시켰으면, 그건 두말할 것 없는 반역이 아닌가? 그런데 분분하다고 하는 걸 보면, 의외로 1왕자 알베르트를 지지하는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학생을 붙잡고 민감한 얘기를 깊게 파고들기는 뭐하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군. 그래서... 학생도 교수도 개판이라 휴교를 한다 이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아직 아카데미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닙니다만, 제 생각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휴교를 결정한 것 같더군요. 이를테면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의 싸움이라든가, 또는 왕실의 탄압─”
“오우!”
나는 그의 뒷말을 잘라냈다.
“예, 예?”
“뒷말은 끝까지 안 해도 알아들었으니 그만해. 너 말조심해 인마. 나한테는 해도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이야 그거.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조심하라고.”
피들스턴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부당하게 왕위를 계승한 알베르트가 반대 세력을 탄압, 숙청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정한 독재자나 당위성이 부족해 입지가 좁은 군주들은, 즉위하는 즉시 본보기로 반대 세력을 몇 놈 잡아 족치고 시작하는 게 국룰이다. 그래야 힘이 있어 보이니까.
아무튼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피들스턴도 알베르트를 지지하지 않는 모양인데, 이런 민감한 시기에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황천길로 가버릴 수 있다.
“아, 옛! 주의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처신 잘하라고. 그건 그렇고, 그럼 너도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예, 강사님. 아카데미에 남아있어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저 멀리 서부 지방에 있어서 가본 지 꽤 오래됐거든요.”
서부 출신이었나.
내가 왕국 내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지방이 두 군데 있는데, 서부와 북부다. 서부는 내 활동 지역인 동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못 가봤고, 북부는 추울 것 같아서 그냥 안 가봤다.
어쨌거나 떠나기로 한 건 현명한 선택이다. 국정이 불안정한 이런 시기에 괜히 수도에 남아있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되면 피곤해질 테니까.
“그래, 잘 다녀와라. 아, 혹시 교수들도 떠났나? 오베르가 학장님을 만나러 왔는데.”
“일부는 떠나셨지만 아직 대부분은 남아계십니다. 아마 학장님도 마찬가지이실 것 같군요.”
“다행이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 너도 얼른 가봐.”
내가 그리 말하자, 피들스턴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보따리를 집어 들으며 물었다.
“저... 그런데 강사님께서는 다시 강단에 설 계획은 없으십니까?”
“응?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내가 요즘 좀 바빠서.”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국왕 시해자’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므로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쉽군요. 강사님처럼 배울 점이 많은 분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나중에 여유가 되신다면 꼭 돌아와 주십시오. 제가 가장 먼저 수강 신청하겠습니다.”
그는 매우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스왈드의 강의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무튼 내 제자 중에서 가장 괜찮은 녀석이었다.
“아, 맞다. 너 가는 길에 저쪽에 있는 공터에 들러서, 거기에 잠들어 있는 아스왈드 좀 실내로 데려다줘라. 생각해보니 그대로 두기엔 날씨가 좀 춥네. 귀찮으면 대충 망토나 덮어주든가.”
“예? 왜 그런 곳에서 주무시는 겁니까?”
“왜긴 왜야? 미쳤으니까 그렇지.”
***
오베르가 학장이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호오, 세계수의 눈물이라. 이 귀한 걸... 오랜만에 보는군.”
그는 돋보기를 통해 유리병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육안으로 보나 돋보기로 보나 아무 차이가 없을 것 같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전에도 본 적이 있으신가 보죠?”
“그렇다네. 한... 십 년쯤 전인가? 아스왈드 교수한테 구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적이 있지.”
“오오, 그렇군요.”
잘됐군.
아무리 뛰어난 연금술사라 할지라도 처음 보는 재료로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오베르가는 이미 세계수의 눈물을 다뤄본 경험이 있다고 하니, 일이 수월할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물론 아첨도 섞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걸로 마나 포션 제조를 의뢰하고 싶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워낙 귀중한 재료이다 보니 솜씨 좋은 연금술사를 찾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베르가 학장님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허허, 역시 성자라서 그런가? 신에 필적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군?”
“아하하, 그거 신성 모독입니다.”
“......노, 농담일세.”
오베르가는 질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야말로 농담이었는데, 성자가 신에 관한 발언을 하니 다소 무겁게 느껴진 모양이다.
“흠흠, 아무튼 가능하시다면 부탁을 좀 드리고 싶은데....”
“당연히 가능하다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했다.
물론 오래 걸린다고 해서 의뢰를 안 할 수도 없지만.
이제는 왕이 되어버린 1왕자 알베르트와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암살이 될 수도, 소규모 교전이 될 수도, 거대한 세력끼리 맞붙는 피 튀기는 전쟁이 될 수도 있다.
개중에는 내가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무력을 동원하는 싸움은 마나 포션 제조가 끝난 뒤에나 할 생각이다.
“글쎄... 세계수의 눈물을 다뤄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장담할 수는 없네만, 일주일 정도는 소요되지 않을까 싶군.”
“오, 그 정도면 금방이네요. 역시 오베르가 학장님이십니다! 아, 그런데 학장님은 일주일 뒤에도 아카데미에 남아계시는 겁니까?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서 학생이고 교수고 할 것 없이 많이들 수도를 떠난다던데요.”
“나는 떠날 계획은 없네만... 하아, 도대체 왕국이 어찌 되려는 건지... 쯧쯧.”
오베르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혀를 찼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오베르가 역시 알베르트를 지지하지 않는 쪽인 모양이었다. 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패륜을 저지르고 왕좌를 차지한 자를 옹호하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두루뭉술하게 말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멀쩡히 잘 살아있던 왕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르다니... 왕자가 그랬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면 즉시 반역자로 치부됐을 텐데 말이죠.”
“자네는 세르시아 교인이라 중립적인 견해를 견지하는 모양이군? 아무리 왕자가 그랬다지만 이건 반역일세, 반역.”
그는 소신 있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좋은데?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내게는 호재다. 나 혼자서 이미 국왕이 되어버린 알베르트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는 일. 나도 같은 목소리를 내줄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솔직히 작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다네. 당연한 일이지.”
“......그런 것 치고는 조용하던데요? 다들 입 꾹 닫고 수도를 떠나기만 하고.”
“구심점이 없으니까.”
오베르가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구심점이 없으니, 다들 눈치만 보다가 그냥 자리를 피하는 걸 택하는 걸세. 혼자서 부당하다고 외쳐 봤자 그게 들리기나 하겠는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예? 2왕자가 있잖아요? 아, 이제는 왕자가 아닌가. 아무튼, 프란츠 님이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당한 왕 알베르트에게 맞서기 위한 최고의 구심점인 2왕자가 있지 않은가? 그 역시 전대 왕의 아들이며 계승권이 있으므로 나설 명분은 충분하다. 심지어 그는 평민과 하위 귀족에게 압도적인 지지까지 받는 자다.
“프란츠 님은... 딱히 대응할 의지가 없으신 것 같더군. 자네도 만나봤으면 알겠지만, 그분이 성격은 좋으셔도 좀... 소심한 면이 있거든.”
그게 무슨.
“아니, 소심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 거 아닙니까? 집안이 콩가루가 되어버렸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다고요?”
“답답하지만 어쩌겠나. 원래 마음이 약한 분이신 것을. 가만히만 있어도 형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인데, 거기서 나서기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으시겠지.”
“흐음.”
2왕자 프란츠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왕좌에 오른 알베르트가, 남아있는 형제를 숙청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가만히 있어도 목숨이 위험한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역으로 나서야 목숨을 부지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가지 않겠는가? 덜덜 떨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 봤자 어차피 죽는다.
아무래도 프란츠를 만나서 펌프질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정당한 명분을 가진 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나설 명분도 다소 힘을 잃을 테니까.
“혹시 지금 프란츠 님이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음? 자네는 세르시아교 본단에서 오는 길이 아니었나? 그분께서는 그곳에 몸을 의탁하고 계신다네. 수도에서 유일하게 왕이 쉬이 손댈 수 없는 장소니까.”
다행히 숨는 장소는 현명하게 선택했군.
세르시아 교단은 본질적으로 모든 정치 문제에 대해서 중립이다. 누구를 지지하지도, 누구를 적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알베르트도 교단과 완전히 척질 의도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함부로 손대기는 부담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일주일 뒤에 다시 나를 찾아와보게나. 그쯤이면 포션이 완성될 것 같으니.”
“예, 잘 좀 부탁드리겠.......”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떠나는 건 좀 몰염치하지 않나?
그래도 제조에 시간이 일주일이나 걸린다는데, 맨입으로 가기가 좀 그랬다.
‘대가로 뭘 줘야 하지? 오베르가 학장 정도면 금화 몇 푼이 아쉽지는 않을 테고... 아, 그거나 줘야겠군.’
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오베르가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으시죠. 약소하지만 포션 제조에 대한 제 성의입니다.”
“허허, 그러지 않아도 괜찮네만.”
그는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내가 내민 것을 냉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놀라지 마십쇼. 그것은 무려.......”
“무려...?”
“세계수의 파편입니다!!”
아스왈드가 귀를 후비는 데에나 사용하라고 추천해준,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냥 나뭇가지다.
“허, 헛! 처, 처음 보는 재료로군... 고맙네!”
받는 사람이 기뻐하면 된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