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의 꿈 (5)
“다시!!”
“죽일 거야... 복수할 거야!! 으아아악!!!”
─파사사삭!!
푹! 푹! 푹! 눈 깜짝할 새에 바닥에서 무수한 얼음 가시들이 솟아나며 내 몸을 관통했다.
[꿈속에서 마법 ‘아이스 스파이크’에 맞아 사망하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훔치시겠습니까?]
‘와 씨, 순식간에 죽어버렸네. 습득한다.’
과연. 역시 클로이는 좀 치는 여자였다.
내가 바닥에서 미세한 한기가 느껴지는데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쨌거나 순식간에 죽는 바람에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마법 ‘아이스 스파이크’를 습득했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아이스 스파이크’ - 2회]
[동일한 대상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2회? 뭐야, 이거 중급 마법이 아닌가?’
내가 전격 속성이 아닌 타 속성의 중급 마법을 얻으면 보통 3회의 횟수를 부여받고, 고급 마법은 1회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2회를 준 걸 보면 이 아이스 스파이크라는 마법은, 중급 마법보다는 강하고 고급 마법보다는 약한, 그 둘 사이의 어딘가쯤 되는 수준이 아닐까 싶었다.
‘개이득.’
만 원짜리인 줄 알고 산 물건이 알고 보니 만오천 원짜리였달까. 아무튼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클로이였다. 그녀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깰 듯했다. 내가 방금 어린 클로이는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을 유도해냈으니까.
아마 꿈인 걸 자각하고 곧 깨어날 것이다.
나는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마법을 성공적으로 얻어낸 것에 대한 자축과 클로이가 겪은 상실에 대한 위로의 의미를 담아서.
‘......왕실과 그런 악연이 있었을 줄이야.’
덕분에 왕국군으로 변장해서 마법은 비교적 쉽게 습득할 수 있었으나, 클로이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아니,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그런 사건은 나이 백 살 먹은 현자라도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꿈 막바지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
순간, 맞은편에 엎드려 있던 클로이가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헉....”
드디어 깨어난 건가.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술자리 도중에 잠드시더니... 악몽이라도 꾸셨나 보죠?”
“......엘?”
클로이는 고개를 들어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혼란스럽겠지. 원래 꿈에서 깨어난 직후는 천지 분간이 잘 안 된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이곳이 현실임을 직시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 내가 깜빡 잠들었나 보네.”
“.......”
이렇게 금세 평온을 되찾고 사과까지 한다고?
이건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광분하며 날뛰던 클로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큐버스의 어머니인가 뭔가 하는 그 악마가 개입했군.’
그 악마가 클로이에게서 가져갈 거라고 말했던, 욕망 중에 가장 강렬한 욕망. 그것은 역시 복수를 의미하는 듯했다.
복수에 눈이 먼 사람은 맹목적이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몇 날 며칠을 굶을 수도 있고, 평소 혐오했던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신의 목숨’마저 던져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복수를 막는다면 가족도 친구도 모두 적으로 간주할 뿐이다.
생리적인 욕구나 사회적인 욕구 등, 다른 욕망들을 모조리 억눌러버릴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욕망.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그 욕망을, 악마가 가져가 주었기 때문에 클로이가 아직까지 멀쩡할 수 있는 듯했다.
“클로이 씨.”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클로이는 자신의 그 위험한 욕망이 악마에게 먹잇감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응?”
근본적인 해결책은 딱 두 가지다.
복수를 포기하거나, 복수를 달성하거나.
“저는 왕을 죽일 겁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우리의 목표는 완전히 일치하는데.
나의 계획에 클로이를 동참시키면 될 일이다.
“뭐, 뭐라고?”
“왕을 죽일 거라고요.”
클로이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는 한 번도 나를 향해 지은 적 없었던 경계심 짙은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경계하는 게 당연하겠지.
“클로이 메이필드 씨.”
“네, 네가 내 성을 어떻게...?”
나는 이쯤에서 능력을 일부 공개하기로 했다.
“사실 저는 타인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당신의 꿈을 들여다보게 됐죠.”
“뭐? 아무리 너라지만 이건 불쾌하네.”
그녀는 팍 인상을 쓰며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겉으로 드러냈다.
뭐,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나 같아도 누군가가 허락 없이 내 꿈을 들여다보면 불쾌할 테니까.
“허락 없이 살펴본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
“클로이 씨는 아무래도 저와 같은 목표를 갖고 계신 것 같은데요.”
클로이를 내 계획에 동참시킬 이유야 차고 넘친다.
일단은 실력. 용족도 때려잡는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축에 속한다.
그리고 배경. 비록 집안인 메이필드 후작가는 멸망했지만, 그녀는 청색 마탑에서 꽤나 주요한 인물이다. 심지어 스승인 니콜스는 얼마 전에 마탑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클로이가 움직이면 마탑의 지지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목표. 이건 뭐 말할 것도 없다. 같은 목표를 가진, 끝까지 믿고 갈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당연히 좋다. 심지어 왕을 죽이고자 하는 동기는 나보다 클로이 쪽이 더 뚜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막타는 내가 쳐야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현 국왕이 아니라 1왕자 알베르트를 잡을 생각입니다. 녀석이 조만간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왕좌를 차지할 거거든요. 제가 밥상은 얼추 차려놨으니─”
“자, 잠깐! 잠깐만. 1왕자가 반역을 일으킨다고...? 그게 무슨... 그리고 엘, 너는 그걸 또 어떻게 아는 거고?”
내가 너무 간추려서 말했나? 클로이는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 반역을 사주한 사람이 바로 저니까요.”
“네, 네가?”
“제가 그동안 물밑으로 작업해둔 게 좀 있습니다. 말씀드렸죠? 밥상은 얼추 차려놨다고. 클로이 씨는 숟가락만 들고 오세요. 그 숟가락으로 감옥에 갇힌 국왕을 때려죽이든 뭐든 마음대로 하시고. 저는 새롭게 왕위에 오른 1왕자만 잡으면 됩니다.”
폐위된 국왕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원래는 1왕자 알베르트만 잡고 그의 아버지는 그냥 놔둘 생각이었으나, 클로이가 날 도와준다면 그녀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
금광 때문에 클로이의 가문에 누명을 씌워서 박살 냈다고 했었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업보가 있는 자니 클로이의 손에 맡기는 게 좋을 듯했다.
“수도에서 뭘 하며 지내나 궁금했었는데, 그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클로이의 경계심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클로이의 꿈을 보고 개수작 부리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증명했으니까. 나는 그녀의 꿈을 보기 전부터 이미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엘, 너는 왜 1왕자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흐음... 원한이죠, 뭐.”
퀘스트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 나는 꿈속에서 맞은 아이스 스파이크를 현실에서 또 맞게 될 수도 있으니,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들었다.
“원한? 1왕자가 엘한테 원한을 살 일이 있나?”
“뭐, 그런 게 좀 있습니다.”
“죽일 정도로?”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십니까? 은혜는 받은 만큼만 갚고, 원수는 열 배로 갚자 입니다. 저는 반드시 그자를 죽일 겁니다.”
질문이 길어지면 곤란했으므로, 그냥 아무 말이나 해대며 나의 동기에 관한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 지었다.
“제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고... 그래서, 클로이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당연히 좋다고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로이는 의외로 머뭇거렸다.
현자타임이 온 건가? 방금 악마에게 욕망을 빨렸으니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내 과거를 알고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뭔 소리야? 그 영감도 복수의 화신인데!
니콜스는 남부 야만인으로 분장한 내가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줄 알고, 그들의 복수를 하겠다며 내게 블리자드를 냅다 갈겨버렸었다. 이것이 내가 블리자드를 얻게 된 경위다.
그래놓고 제자한테는 간디 같은 발언을 하셨군.
“그럼... 포기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당연히 복수할 거야. 내가 지금 스승님의 말씀을 꺼낸 건,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너에게 말해주고 싶어서야. 그러니까... 좋아. 나는 엘, 너와 함께 하겠어.”
클로이는 무슨 사랑 고백을 받아주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 아, 네네. 잘 선택하셨습니다. 결정을 내리셨으니 말씀드리는 건데, 솔직히 당한 게 있으면 무조건 갚아줘야죠.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방식이지.”
“맞아... 똑같이 갚아줄 거야... 반드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어쨌거나 이제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사이가 됐으니, 내 계획을 공유하며 전략을 수립했다.
“자,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설 시기는 1왕자 알베르트가 왕좌를 차지했을 때입니다. 제가 채트먼 후작가의 장남을 섭외해놨으니, 먼저 그를 앞세워서 폭력적인 왕위 계승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
나는 몇 가지 볼일만 해결하고 다시 수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클로이는 동행하지 않았다. 나야 원래부터 마법을 얻자마자 수도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므로 즉시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갑작스러운 일. 뭔가 정리하고 준비할 게 있다고 해서 일단 나 먼저 출발한 것이다.
‘오, 슬슬 수도가 보이는군.’
마침내 수도 엘디니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장엄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앨리스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가 수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수도와 카트카를 왕복하는 데에 보름, 거기다 카트카에 머문 시간까지 더하면 거의 한 달에 가까운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앨리스는 혼자 수도에 남아서 모험가 일을 하고 있는데, 뭔 사고라도 치지는 않았을지 은근히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뭐,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아무튼 부지런히 달린 마차는 금세 수도의 동쪽 성문에 도착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성문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성벽을 따라 길게 늘어져서 마치 난민처럼 노숙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의아함에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마차로 다가왔다.
“신분패를 제시해 주십시오.”
“아, 네.”
나는 버릇처럼 모험가패를 꺼내서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경비병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평민은 귀족이나 수도 거주민의 보증 없이는 안으로 입장할 수 없습니다.”
“예? 갑자기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저렇게 노숙자처럼 성벽에 자리 잡고 있는 거였나. 아무튼 뜬금없는 소리였다.
“새롭게 즉위하신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 국왕 전하의 명입니다.”
“.......”
드디어 1왕자가 왕좌를 차지했군.
“보증인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보증인은 없는데... 아, 맞다.”
나는 성자로 임명된 후 세르시아 교단에서 발급해준 순은의 신분패를 제시했다. 광택이 번뜩거리는 신분패에 경비병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헛! 실례했습니다, 성자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통과!!”
역시 신분이 좋긴 좋군.
원래 평민은 수도에 마차를 끌고 들어갈 수 없지만, 경비병은 마차째로 통과시켜줬다.
수도 안으로 진입한 나는, 마부에게 왕립 아카데미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연금술사인 오베르가 학장에게 세계수의 눈물로 물약을 제조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진작 부탁해둘 걸 그랬군.’
그때는 인페르노에 눈이 멀어서 서두르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알베르트가 이렇게 빨리 왕위에 오를 줄도 몰랐고.
어쨌든 왜인지 경직된 듯한 수도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니, 곧 왕립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삯을 지불하고, 아카데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교수라 할지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걸어 다녀야 한다.
그렇게 서쪽에 있는 교수회관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파사삭!
옆쪽에 있는 숲에서, 무언가가 풀숲을 헤치며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
진짜로 무시무시한 속도였기에, 나는 긴장하며 여차하면 검을 뽑을 채비를 했다.
─파사사사삭!
이윽고 숲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고,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강아지!!!”
그는 아스왈드였기 때문이다.
“강아지! 너는 동냥해야 하는 강아지이다!”
“미, 미친. 뭡니까? 갑자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연신 삿대질하며 강아지를 외쳐댔다.
“안녕하십니까? 강아지의 고장 난 양심은!”
“아니, 왜 또 보자마자 시비인데요.”
“환불해주시오! 선택받은 자의 마법서! 강아지는 나에게 속임수를 사용한!”
뭐지? 마법서에 문제라도 있었나?
“속임수? 그게 무슨 소리죠? 정신 사나우니까 좀 진정하고 설명해보세요. 아니, 그리고 그 통역기는 여태 안 고치고 뭐 했습니까?”
“네, 당신의 양심처럼 없었습니다, 나의 시간, 선택받은 자의 마법 배우느라.”
나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진정하라고 했다고 해서 이 미치광이 엘프가 즉시 진정해서 놀란 것은 아니고, 말하는 뉘앙스로 보건대 아스왈드는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습득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벌써 배우셨다고요? 한 달이 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와, 의외로 능력 있으시네.”
“키힛, 네. 나는 희귀한 엘프입니다, 네 배의 속성 가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던 아스왈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강아지! 또 나를 속이는 것입니까? 화제를 돌리는 비열한 속임수를 중단하고 즉시 마법서를 환불하십시오!”
“아니, 미친. 그러니까 왜 그러시는 거냐고요. 환불해달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거 완전히 진상 고객이었다.
마법은 마법대로 배워놓고 환불까지 요구하다니? 내가 그걸 해주겠냐고. 어림도 없지.
“위력이 다릅니다, 당신이 보인 것과! 나의 번개는 소멸시킬 수 없었다, 상급 땅의 정령, 강아지처럼!”
“아.”
내가 사용했던 라이트닝 블래스트는 일격에 아스왈드가 소환한 상급 땅의 정령을 소멸시켰었다. 그런데 아스왈드는 그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도 네 배의 엘프인데 나는 왜 불가능합니까? 이것은 속임수이다. 나의 어머니 세계수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속임 당한 불쌍한 아들 위해.”
“그건 당신이 도끼로 쳐 찍어대니까 그런 거고... 아무튼 환불은 안 되겠습니다. 제품에는 문제가 없어요, 고객님. 문제는 고객님에게 있는 거죠.”
아스왈드와 나는 보유한 속성과 마나량이 다르니, 당연히 마법의 위력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판매한 마법서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꼬우면 너도 펜투플 하든가.
“자,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나는 아스왈드와 쓸데없이 힘 빼려고 아카데미에 온 게 아니었으므로, 본래 목적인 오베르가 학장을 찾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멈추시오! 위력이 왜 다릅니까? 환불해주는! 환불해주는!”
아스왈드는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진상을 피웠다.
“말씀드렸잖아요. 마법서에는 문제가 없─”
“환불해주는! 환불해주는!”
“아니, 그건 당신의 속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환불해주는! 환불해주는!”
“아잇, 미친! 그만해!”
아무래도 지옥 끝까지 따라올 것만 같은 기세였기에,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아오, 그럼 마법을 한 번 써보세요. 제가 직접 확인해 보고 판단할 테니.”
“그렇게 하면 해주는 것입니까, 환불?”
“아, 보고 판단한다니까. 빨리 정령부터 소환하세요. 저 바쁩니다.”
환불무새 아스왈드는 드디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멈추고 공터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서 그가 눈을 감고 뭐라 중얼거리자, 곧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아스왈드의 앞쪽 땅이 솟아오르며 흙이 한데에 뭉치더니, 거대한 바실리스크의 형상을 취했다.
“똑똑히 보시오! 강아지! 당신의 불량 마법!”
그렇게 외친 아스왈드는 뒤로 물러나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지직. 그의 손에 노란 스파크가 일며 전기가 모여들었다. 그는 이윽고 자신이 소환한 정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쩌저적!
─꽈릉!
번쩍! 시끄러운 천둥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새하얀 번개 줄기가 뿜어져 나가 바실리스크를 강타했다.
남이 나와 똑같은 마법을 쓰는 걸 보니 사뭇 새로운 기분이 들었으나, 위력은 나와 달랐다.
“크르르...!”
번개에 닿은 바실리스크의 옆구리가 점점 달아오르며 폭발했지만, 몸통에 커다란 구멍만 생겼을 뿐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아스왈드가 그것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보았습니까? 이것은 구멍만 뚫렸다, 당신의 양심처럼. 입도 뚫려있습니까? 그렇다면 말해보시오!”
“아아, 잠시만요. 가까이에서 좀 살펴보고요.”
나는 느릿느릿 바실리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서두르시오!”
“아하하, 성격 되게 급하시네.”
그리고 최대한 느릿느릿 바실리스크를 살펴봤다.
“으음, 어디보자... 진짜로 구멍만 뚫리긴 했네.”
“그렇습니다! 이것은 환불이 요구됩니─”
털썩. 줄기차게 환불을 요구하던 아스왈드가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응, 너 마나 탈진이야.”
나는 그대로 오베르가 학장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