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48화 (148/200)

클로이의 꿈 (4)

메이필드가 저택의 안뜰.

“마리아, 언니가 움직이는 팔찌 만들어줄게 팔 내밀어봐.”

“응.”

“짜잔! 꿈틀꿈틀 지렁이 팔찌!”

“꺅!!”

안뜰에서는 클로이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가 뛰놀고 있었지만, 야외용 테이블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메이필드 후작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이 나라를 떠야 할 것 같소.”

후작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후작 부인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국왕 전하께서 작위를 반납하라는군.”

“그게 무슨...! 영지와 재산을 몰수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작위까지 내놓으라는 건가요?”

후작 부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아이들이 듣겠구려.”

“들으면 어때서요! 이미 클로이도 다 알고 있어요. 그 왕이라는 작자가 억지 누명을 씌워서 우리 메이필드 가문을 박살 내고 있다는 사실을요! 영지에서 새로 발견된 금광 때문에!”

“......마리아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소.”

그는 해맑은 얼굴로 뛰놀고 있는 두 딸을 흘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통첩 기한은 한 달이오만... 최대한 빨리 작위를 반납하고 다른 왕국으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구려.”

“당신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우리 꼴을 좀 보세요. 가신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재산은 다 뺏기고. 이제 남은 거라고는 이 저택과 작위뿐인데!”

“반납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릴 거요. 애당초 그걸 노리고 그런 요구를 하셨겠지.”

“이미 반역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잖아요!!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흑.”

울분을 토해내던 후작 부인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으나, 아이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내 눈물을 훔치고 흐트러진 모습을 정돈했다.

그러나 후작 부인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클로이는 전부 듣고 있었다. 그저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

비단 지금의 대화뿐만이 아니더라도, 클로이는 현재 가문이 처한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메이필드 후작이, 현 국왕인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의 어떠한 의견에 반대했었다는 것.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나, 사소한 의견 차이였고, 신하 된 자로서 그 정도의 충언은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쯤은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 사소한 의견 차이를 빌미로 온갖 억지와 트집을 잡으며 전방위적으로 메이필드 가문을 압박했다. 아버지의 영지에서 발견된 금광을 자기가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그 결과가 바로 작금의 상황이다.

“언니, 뭐해? 왜 가만히 서 있어?”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클로이는 마리아와 놀아주면서도, 계속해서 부모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정하시오, 부인.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합시다. 어차피 이 왕국에 있어봤자 목숨만 위태로울 뿐이요. 국왕 전하의 성격상 내가 완전히 파멸하기 전까진 멈추지 않으실 테니까. 이 기회에 새로운 나라로 가서 새롭게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시작...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메이필드 후작은 힘없이 중얼거리는 부인을 다독였다.

“가족이 남아있잖소. 클로이, 마리아. 그리고 당신과 나. 이 저택과 남은 자산을 처분하면 우리 가족이 새로이 자리 잡을 만한 밑천은 마련할 수 있을 거요.”

“어쩌면 좋니... 우리 클로이... 저 나이에 벌써 하급 마법을 다룰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아이인데... 여건만 받쳐주면 분명히 대성할 아이인데... 이 중요한 시기에....”

꽈악. 대화를 엿듣던 클로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법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 속성 쿼드러플.

그리고 후작가라는 집안 배경.

클로이는 타고난 재능과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성장해 언젠가는 왕국 최고인 왕립 아카데미를 들어가고, 그곳을 졸업해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 곧 메이필드는 후작가가 아니라 평민이 될 운명. 더이상 값비싼 개인 교사를 고용할 수도, 아카데미 입학을 위한 돈을 마련할 수도 없다.

그 사실이 클로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지금은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자신보다는 동생인 마리아가 더 걱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

그래도 자신은 어느 정도의 마법 교육을 받았지만, 마리아는 아직 어린 탓에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기회는커녕 여덟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언니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마법을 가르쳐줄게, 마리아.’

클로이가 해맑게 웃으며 흙장난을 하고 있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후작님! 후작님!!”

돌연, 가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그,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클로이는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그들이라면... 설마 국왕이 보낸 사람들? 기사와 대화를 나누는 부모님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얘들아, 어서 이리 오렴!”

후작 부인의 부름에, 클로이는 즉시 마리아를 이끌고 달려갔다.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어서!”

그들은 황급히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저택 내부에 있던 유모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마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헬렌! 국왕이 병사를 보냈어요! 그러니 헬렌이 클로이를 데리고 동쪽 창고로 가주세요. 나는 마리아와 함께 서쪽 다락방에 숨을 테니.”

후작 부인이 심각한 얼굴과 어조로 지시하자,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마리아가 불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엄마... 무서워요.... 저 언니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그건 안 된단다. 너희 둘은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해. 헬렌! 무슨 일이 있어도 클로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클로이, 엄마랑 약속해.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끄덕끄덕.

클로이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

그것은 누군가를 잃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후작 부인은 두 딸을 모두 잃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이런 결정을 내렸고, 클로이는 그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몹시 불안했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동생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불안감은 애써 감추고 웃으며 안심시킬 뿐.

“마리아, 이따 언니가 진짜 팔찌 만들어줄게. 꿈틀꿈틀 지렁이 말구 꽃으로, 헤헤. 그러니까 조용히 잘 숨어있어?”

“으응... 언니.”

─다그닥다그닥!

저택 밖에서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 어서!”

“가, 가시죠, 아가씨!”

클로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이며 유모와 함께 동쪽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창문을 통해 안뜰을 내다봤다. 그곳에는 두 개의 진영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 채 서 있었다.

한쪽은 펄럭이는 왕가의 깃발 아래에 도열해있는 국왕의 병사들. 기사와 마법사를 포함한 백 명가량의 왕국군이었다.

반대쪽은 단 한 명의 호위 기사와 함께 초라하게 서 있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메이필드 후작!!”

왕국군의 기사 하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리 외치더니,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서 고압적인 태도로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국왕전하의----왔다----작위----때문에----시간부로----반역----집행----다!”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즉각적으로 항변했다.

“전하께서----반납까지----한달----하셨거늘----어째서----벌써----말이시오!”

그렇게 한동안 둘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주로 뭔가를 설명하려는 듯 보였고, 국왕이 보낸 기사는 고개를 젓거나 삿대질하며 윽박지르는 듯했다.

“금광을----속셈----억지----모를것같소?”

“이 반역자 새끼가!!!”

국왕의 기사가 분개하여 크게 소리치며 명령했다.

“가족까지 다 잡아 와!!”

기사가 명령을 내리자, 왕국군이 신속히 저택으로 진입했다. 저택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는 우악스러운 발소리가 이곳 창고까지 들려왔다.

─쿵쿵쿵쿵....

클로이는 자리에 주저앉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이치고 속이 깊다고는 하나, 그래봤자 어린아이.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떨림도 더욱 거세졌다.

“아가씨....”

어릴 적부터 클로이를 돌봐준 유모가 그녀를 껴안으며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유모 역시 덜덜 떨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쿵쿵쿵쿵쿵쿵!!!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그만!! 다들 돌아와라!!”

돌연 국왕의 기사가 수색 중단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발소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아.......”

그녀의 아버지와 유일한 호위 기사가 무장을 해제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가족이 위험해질 것 같으니 투항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어떻게 되시는 걸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가주님께서는 왕성으로 압송되시겠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으시니 어쩌면 금방 풀려나실 수도 있어요.”

“.......”

유모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클로이는 그것이 단순히 위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께서는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시겠지.

클로이는 이번이 아버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하고, 슬픔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던 그녀의 눈빛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안 돼...!”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인 마리아가 왕국군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읍! 읍!”

“소, 소리 내시면 안 됩니다.”

유모가 다급히 그녀의 입을 막으며 제지했다.

끌려 나온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은 메이필드 후작의 뒤편에 무릎 꿇려졌다.

그러자 국왕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권위적인 자세로 후작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말했다.

그리고,

─서걱!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후작의 목을 쳤다.

데구르르... 주인을 잃은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여, 여보!!!”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얼어 붙어버린 클로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후작 부인이 병사들을 뿌리치고 일어나 남편의 시체로 달려갔다.

시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듯 보였던 후작 부인은, 머지않아 고개를 들고 흉수를 노려보았다.

“죽여버리겠어!!!”

분노로 절규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회전하는 얼음덩어리가 생성되며 기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른 캐스팅이 그녀의 실력을 대변해주는 듯 보였으나,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 쪽에도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가 잔뜩 한 상황. 그녀의 마법은 국왕의 마법사들에 의해 금세 소멸당했고, 다수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후작 부인을 난자했다.

털썩. 처참히 난도질당한 후작 부인이 바닥에 쓰러지자, 왕국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반역자 부부를 처단했다!”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 국왕 전하 만세!!”

그들에게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왕명을 충실히 수행해냈다는 만족감만이 가득해 보일 뿐.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메이필드 후작 부부에게로 다가가서 병장기를 찔러 넣으며 시체를 훼손했다.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광기어린 행동이었지만, 클로이는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직 그녀의 동생이 저곳에 있었기에.

마리아는 부모가 참시당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떠는지 이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기사 하나가 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마리아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쳤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클로이는 더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마, 마리아! 언니가 구해줄게...!”

클로이가 창고를 빠져나가려 하자, 유모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어, 어딜 가려고 하십니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아가씨도 죽습니다!”

“이거 놔요, 헬렌! 마리아를... 내 동생을 저대로 놔둘 수는 없어요!”

“안 됩니다! 아가씨가 도우러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대는 백 명이 넘는 숫자. 자신이 나서봤자 마리아를 구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구경만 한다는 말인가.

가족이, 하나뿐인 동생이 죽을 위기인데!

“놓으세요!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같이 죽겠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마리아 곁에 있어 줄 거예요!”

“아가씨...! 어머님과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어머님의 유언을... 지키셔야죠!”

“.......”

이제는 유언이 되어버린 약속.

클로이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와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밖에서 다시 한번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이는 도저히 창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저 함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기에.

“......아가씨.”

클로이 대신 밖을 살펴본 유모가 비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아가씨께서는... 마지막 메이필드이십니다.”

“아.......”

클로이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분명 칼에 찔린 것은 가족들인데, 클로이도 칼에 찔린 것처럼 심장이 너무 아팠다.

“복귀한다!!!”

─다그닥다그닥

왕국군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뚝뚝 떨어지는 클로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흐흑....”

온몸의 수분을 모두 쏟아낼 듯한 기세로 한없이 울고 있자, 유모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음껏 우세요, 아가씨. 속이 후련해지실 때까지. 저는... 물을 좀 떠 오겠습니다.”

유모가 자리를 비켜준 뒤에도 클로이는 창고에 홀로 앉아서 한참을 더 울었다.

너무 오래 울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눈물과 함께 쏟아낸 슬픔이라는 감정의 자리에는, 새로운 감정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고작 금광 때문에.”

전에는 느껴본 적 없던 이질적인 감정.

“......복수해줄게.”

그 새롭고 이질적인 감정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났다.

“......언니가 복수해줄게.”

이윽고 그 복수라는 감정은, 다른 감정과 욕망, 욕구를 모두 밀어내고 클로이의 머리를 지배했다.

“엄마, 아빠. 복수할 거예요.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 그자를 죽일 거야... 그의 가족까지도... 단 하나의 하츠펠트만 남겨서...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줄 거야....”

─저벅저벅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클로이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섰다.

“클로이 메이필드.”

어색할 정도로 굵은 목소리였다.

“......?!”

유모인 줄 알았던 클로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망토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사내였으나, 클로이는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망토는 조금 전까지 집안을 들쑤셨던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었기에.

“왕국군...!”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복수를 원하나? 클로이 메이필드.”

“.......”

클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내는 자신의 중얼거림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어서 도망치는 것이 옳겠지만, 복수심에 잠식된 클로이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래!! 복수할 거야!!”

“그럼, 해봐라.”

“......뭐라고?”

“할 수 있다면 해보라고. 당장.”

그는 양팔을 벌리며 여유롭게 말했다.

어딘가 이상한 사내였지만, 지금의 클로이는 그런 걸 따질 만큼 침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즉시 마법을 캐스팅했다.

─사삭!

그녀의 머리 위에서 생성된 얼음송곳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터엉! 그러나 야심 차게 발사한 그녀의 마법은, 사내 앞에 생성된 하늘색 장막에 가로막혀버렸다.

“다시!”

그가 호통치듯 소리쳤다.

조롱하는 건가. 클로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재차 마법을 생성해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쉴드에 가로막혔다.

“다시!”

“이익...!”

죽일 거야.

─사삭! 터엉!

“다시!!”

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살아남아서 반드시 왕에게 복수할 거야.

─사삭! 터엉!

그러나 몇 번이고 얼음송곳을 날려도 사내는 손쉽게 막아냈다. 그는 자신을 내리깔아보며 거만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이따위 마법이 너의 전부인가? 고작 나 하나도 죽이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떻게 복수하겠다는 거지? 다시!!”

“죽일 거야... 복수할 거야!! 으아아악!!!”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클로이는, 결국 자기도 모르게 이 시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파사사삭!!

눈 깜짝할 새에 바닥에서 무수한 얼음 가시들이 솟아나며 사내를 집어삼켰다.

“내가... 무슨... 마법을...?”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사용해버린 마법을 보고 당황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화아악!

“허억! 헉....”

꿈에서 깬 클로이는 발작하듯 숨을 헐떡였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술자리 도중에 잠드시더니... 악몽이라도 꾸셨나보죠?”

“......엘?”

고개를 들어보니, 엘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클로이는 이것이 현실임에 안도하며 그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 내가 깜빡 잠들었나 보네.”

“.......”

기분이 상한 걸까? 자신이 사과했음에도 엘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빤히 클로이를 응시하던 엘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클로이 씨.”

“응?”

“저는 왕을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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