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의 꿈 (3)
“오랜만이네? 정신계 마법사.”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응?”
“클로이 씨는 여자인데요.”
“그게 왜?”
오히려 당당하게 되묻는 그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당신, 서큐버스 아니었습니까?”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이번에는 그녀가 당황스러워했다.
‘저 반응을 보니... 서큐버스가 맞나?’
예전에 케른헴의 고위 사제 엘미나의 꿈속에서 세르시아를 만났을 때, 욕망을 탐하는 존재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세르시아는 그 존재가 서큐버스일 거라는 뉘앙스로 말했었는데, 백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세르시아는 ‘그 불결한 것들은 이미 다 소멸했을 터인데?’라고 말하며 다소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검정 드레스녀가 당황하는 걸 보니, 서큐버스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맞습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건 내 아이들이거든.”
아이들? 서큐버스의 어머니 같은 건가?
“아무튼... 비슷한 거 아닙니까? 그럼 남자의 꿈속에서 욕망을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서 말이죠.”
일단 내가 알기로 서큐버스는 남성의 꿈속에 나타나, 그와 관계를 맺고 정기를 갈취하는 음란한 몽마다.
물론 이 여자는 정기가 아니라 욕망을 탐한다는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었지만.
“뭐어? 그건 능력이 부족한 내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여러 욕망 중에서도 그게 가장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이니까.”
“......그럼 당신은 클로이한테서 어떤 욕망을 가져가려고 온 겁니까? 그로 인해 그녀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나는 한껏 경계하며 물었다.
이 여자에게 욕망을 뺏기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일전에 욕망을 털린 수배범을 본 적이 있지만, 그자는 원래부터 정신이 이상했기에 욕망을 뺏기기 전후를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클로이가 어떤 욕망을 뺏김으로써 삶의 원동력을 잃는다거나 미쳐버리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꿈꾸는 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테니.”
그녀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합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 여자아이의 욕망을 가져가곤 했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지.”
오래전부터 가져갔다고? 클로이가 그렇게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는 거야?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그런데도 이 여자아이는 멀쩡하잖니? 아무런 피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렴. 오히려 내가 욕망을 꾸준히 가져가 주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진작 미치광이가 되어버렸을 거야.”
“그게 무슨... 도대체 어떤 욕망이길래...?”
괜히 긴장되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실 알고 보니 클로이는 수준급 사이코패스였다든가.
“욕망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욕망. 자세한 건 네가 직접 확인해보렴. 잠시 후면 이 꿈에서 그녀의 욕망을 지피는 사건이 일어날 테니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된 악몽이.”
악몽이라. 그럼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건가.
어쨌거나 이 여자는 클로이에게 적대적인 존재는 아닌 듯 보였다. 물론 그녀의 모든 말을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악어와 악어새 비슷한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조금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상대가 악마든 뭐든 간에, 나와 내 주변에 피해만 안 준다면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피해를 안 주는 악마와 피해를 주는 인간. 당연히 후자가 더 나쁜 놈이다.
물론 나보다 강할 거 같아서 그런 것도 좀 있다. 서큐버스를 아이 취급하는 악마라면 상당히 고위급이겠지. 그런 강자한테 꿈속이라고 마구 까불어댔다가는 현실에서 피케이 당하지 않을까.
“흐음,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보죠. 근데 혹시 클로이 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이 마을은 메이필드 후작가의 마을이라고 했잖아? 당연히 메이필드가의 저택에 있지.”
메이필드?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었지만 아무래도 클로이는 그 가문 출신인 모양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집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기에, 귀족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근데 왜 후작가씩이나 되면서 고작 마을에 사는 거지?
나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고개를 갸웃하며 마저 물었다.
“그래서 그 저택은 어디에 있는데요?”
“마을의 북쪽 끝자락. 그런데 너, 설마 꿈꾸는 자를 대면할 생각이니?”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라면서요?”
내가 따지듯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멀리서 지켜보라는 뜻이었지, 네 존재를 드러내라는 뜻은 아니었어. 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꿈꾸는 자가 네 모습을 보면 꿈이 깨질 텐데.”
“예? 왜요?”
“꿈꾸는 자는 지금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으니까. 그래도 굳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야겠다면 정체를 숨기렴. 목소리도 다르게 내고.”
“젠장!!!”
“......??”
“아, 그쪽한테 한 소리는 아닙니다.”
젠장. 또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다니.
예전에 클로이와 함께 청색 마탑으로 향하던 시기에, 그녀의 꿈속으로 한번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도 어린 시절의 꿈이었는데, 어린 클로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꿈이 깨져버렸다.
나는 그 시기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클로이가 시간 논리적 불일치를 느껴서다.
‘......귀찮게 됐군.’
정체를 감추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 여자 말대로, 망토를 뒤집어쓰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든지 하면 되니까.
하지만 정체를 감추면 그간 내 얼굴로 착실하게 밑밥을 깔아둔 걸 활용할 수 없다. 어린 클로이에게서 내가 원하는 마법을 유도해내기도 쉽지 않고.
“아, 몰라. 일단 만나보지 뭐.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저택으로 가기 위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악마에게 뒤통수를 보이며 걷는다는 게 왠지 꺼림칙해서 바싹 긴장하며 걸어갔다.
“멈춰.”
아씨, 깜짝이야.
돌연 그녀가 나를 멈춰 세웠다.
“......지금 보니 너한테서 불쾌한 냄새가 나.”
“네? 냄새요?”
“그래, 아주 끔찍하고 기분 나쁜 냄새야.”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왠지 익숙한 상황인데? 모험가 냄새가 난다고 시비 걸던 축농증 용병 킁킁이가 떠올랐다.
아니,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면 그냥 떠나게 놔두면 될 것이지, 왜 굳이 멈춰 세워서 면박주는 건데?
나보다 약한 녀석이 이랬다면 바로 급속 충전을 시켜줬을 테지만, 지금은 분노 조절을 해야 할 때. 나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건.......”
그녀는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얼굴을 한 층 더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곧 적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희망. 그래, 이건 희망의 냄새야.”
“예?”
“너, 세르시아의 종이었네?”
“아니,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
나는 한 번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겨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부정하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르시아 교단의 성자이며, 세르시아의 존재를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 신성력을 다룰 수 있으며, 세르시아에게 직접 신성 마법의 횟수까지 부여받았다.
이걸 어떻게 부정한다는 말인가?
“세르시아의 종이라면 이 꿈에서 나가줘야겠는데.”
미친. 네 꿈도 아니잖아.
여차하면 공격이라도 할 기세였다.
“아, 그... 종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안면 정도나 튼 사이랄까. 아하하.”
“......세르시아를 섬기지 않는다고?”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한 눈치였다.
“네, 안 섬깁니다. 진짜로.”
빨리 클로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기서 발목을 붙잡힐 순 없기에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 이건 딱히 거짓말도 아니다. 나는 세르시아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믿을 뿐, 섬기지는 않으니까.
“흐응....”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자세히 보니까 너한테서는 세르시아의 종들에게서만 느껴지는 그 특유의 허황된 냄새가 없어.”
“아, 예예. 그러셨군요. 그럼 저는 이만.”
“그래, 꿈꾸는 자의 욕망이 커지는 걸 방해하지만 마. 그럼 나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
“저게 메이필드가의 저택인가 보군.”
서큐버스의 어머니인가 뭔가 하는 악마의 말대로 마을 북쪽으로 올라오니, 웅장한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대저택이라고는 해도 성채와 비교할 수는 없었기에, 다시 한번 의문이 몰려들었다.
“......대체 왜 저기에 사는 거지?”
무려 후작 가문이다.
방대한 영지가 있을 테고, 영지 안에 있는 도시는 백작이 다스리는 카트카보다도 클 것이며, 도시 안에 있는 성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데 그 좋은 것들을 놔두고 왜 이런 시골 마을의 저택에서 사는 거냐는 말이다.
“흐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궁금할 뿐이지 중요한 건 아니다.
나는 일단 저택으로 가기 전에, 갑옷을 비롯해서 철이 포함된 방어구들을 모두 벗었다.
지금 입고 있는 망토로 전신을 가릴 수 있긴 했지만, 철제 방어구들은 움직일 때 소음이 발생한다. 저택으로는 은밀하게 접근할 생각이었으므로, 검을 제외하고는 그냥 놓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꿈속이라 진짜 물건도 아니다.
방어구를 벗은 뒤, 망토를 푹 눌러쓰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그 규모에 걸맞게 울타리도 넓게 둘러쳐져 있었으나, 보초나 경비병 따위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서 손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울타리를 넘어 정원에 있는 나무에 잠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폈다.
‘......저 꼬맹이가 클로이?’
안뜰에는 두 자매가 해맑은 얼굴로 뛰어놀고 있었다. 동생은 열 살도 안 될 듯한 꼬마아이였고, 언니는 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누가 봐도 클로이의 축소판이었다.
“클로이! 마리아! 조심하렴. 그러다 넘어진단다.”
그리고 부모로 추정되는 남녀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특히 후작한테서는 절망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토끼 같은 딸들을 앞에 두고 왜 죽상이지? 아무튼... 저택 안으로 진입해야겠어.’
지금 내가 당면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클로이가 어리다는 점.
이 시기의 클로이는 내가 원하는 마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현실의 클로이는 다룰 수 있으므로, 저 꼬맹이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뭔가 깨달음이나 자신감 같은 걸 심어줘야 한다.
다른 하나는 마법을 유도해내는 방식.
이게 까다로운 부분이다.
정체를 감추고 아무 이유 없이 다짜고짜 공격하는 것은 실패 확률이 높다. 클로이가 평소에도 복면인에게 자주 습격당해서 익숙하다면 모를까. 그래서 내가 마법을 얻을 땐 늘 얼굴을 까고 현실에서부터 반감을 빌드업하는 것이다.
‘악몽이랬으니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혹시 클로이를 적대하는 세력이라도 나타난다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들 중 하나를 잡아서 옷을 뺏어 입고 변장하면 되니까.
나는 저택으로 몰래 들어가기 위해 탐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릭 웹’ - ∞회]
내 발밑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미세한 전류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뻗어나간 전류는 이윽고 이 일대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펼쳐졌다.
‘......뭐야. 엄청 적잖아?’
저택과 안뜰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클로이의 가족을 포함해도 채 열 명이 안 됐다. 저택의 크기를 보면 하인만 스무 명은 필요할 것 같아 보였는데 말이다.
가족을 지켜 줄 사병도 없는 건가? 어쨌거나 덕분에 저택으로 진입하기는 수월했다. 나는 1층에 있는 어떤 방의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땅한 가구 하나 없는 휑한 방이었다.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일렉트릭 웹이 작동 중이니 별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렇게 방 안에서 창문으로 눈만 슬쩍 내비쳐서 밖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후작님! 후작님!!”
돌연 기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메이필드 후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뭣?! 아직 기한이 남았는데 왜 벌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이제 곧 들이닥칠 겁니다!”
기사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피하는 건 이미 늦었다. 클로이! 마리아! 저택 안으로 들어가라. 당장! 여보, 당신이 저 애들을 잘 숨겨주시오.”
“그, 그럼 당신은요? 당신도 함께....”
메이필드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내 신병이라오. 나까지 안 보이면 온 저택을 샅샅이 뒤지겠지. 내가 대화로 어떻게든 해결해볼 터이니, 당신은 어서 애들을 데리고 들어가시오.”
“......알겠어요. 얘들아, 어서 이리 오렴!”
후작 부인은 마지 못해 클로이 자매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뭔데? 누가 감히 후작의 신병을 원한다는 건데?’
나는 미간을 좁히고 저택의 정문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자 곧 정문이 열리며, 백 명도 넘을 듯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다그닥다그닥!
결코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병장기를 움켜쥐고 있는 그들은, 척 보아도 대단한 무력을 자랑했다.
말을 타고 있는 기사만 해도 열 명은 되었고, 마법사도 그와 비슷한 숫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수가 드높게 치켜든 깃발에는,
엘디니아의 왕실을 상징하는 태양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