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 (4)
─화아악!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긴?’
체스터 백작성의 1층 로비였다.
‘현실과 비슷하게 구현된 걸 보니... 티안브리스가 구금된 시점 이후의 배경인가?’
그녀가 백작성 내부 구조를 직접 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건 티안브리스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내부 구조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투옥된 이후의 시점이라면... 자신이 인페르노를 쓸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나는 바로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물론 땅바닥에 마법을 한번 써서 꿈인지 현실인지를 체크하면서.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회]
내려간 지하 3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티안브리스를 위해 특별히 개조된 호화 감방이 자리하고 있었고, 아까 현실에서 봤던 두 명의 기사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군. 감옥에 갇힌 이후의 꿈을 꾸고 있는 게.’
그렇다면 일단 저기서 꺼내주는 것부터 시작이다. 저 안에서는 금제 때문에 티안브리스가 마나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감방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보초를 서고 있던 수다스러운 중년의 기사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오.”
그는 내게 존댓말로 그리 물었다.
이건 현실에서 중년의 기사가 내게 반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티안브리스가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손사래 치며 뒤로 물러났다.
감방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그녀를 꺼내줄까 싶었으나, 낮에 짜릿한 전기 충격을 선사해주기까지 한 내가 갑자기 얼굴을 보이며 그녀를 구해주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 꿈이 깨질 염려가 있다.
‘그럼 내 정체를 숨기고 탈옥시키면 되지.’
뜬금없이 탈옥할 수 있을 만한 여건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좀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이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그렇게 결정한 나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기습적으로 마법을 연달아 쏘아 보냈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금일 사용 가능한 ‘플레임 오브’ - ∞회]
“......!”
“이, 이게 무슨... 크어억!”
지하 감옥의 복도는 불덩어리를 회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지 못했다. 두 명의 기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덩어리에 고스란히 직격당했다.
팀킬을 하려니 묘한 찝찝함이 느껴졌지만, 이건 현실이 아닌 꿈이니까 뭐.
그대로 새카맣게 타버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기사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 감방의 문을 구속하고 있는 자물쇠를 풀었다.
‘내가 풀어줬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려면....’
나는 스트렝스를 캐스팅해 육체를 강화한 뒤, 있는 힘껏 문을 후려쳤다.
─콰앙!!!
그리고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해맑은 어린아이처럼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자세를 낮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니, 곧 두꺼운 철문이 드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백작성 1층의 로비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서 호들갑 떨며 큰소리로 외쳤다.
“큰일이다!! 티안브리스가 탈출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굳이 초장부터 티안브리스와 일대일 맞다이를 떠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수배범처럼 약하다면 모르겠으나 그녀는 강하다. 만약 내가 패배하면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하고, 그녀가 언제 인페르노를 사용할지도 불확실한데 내가 왜 처음부터 무리를 하겠는가.
누가 됐든 간에, 티안브리스가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마법을 유도하는 사람이 꼭 나일 필요는 없으니까.
마침 이곳은 체스터 백작성.
나 말고도 그녀와 싸워줄 병사와 기사가 잔뜩 있다. 어차피 가상의 인물들이니, 그들을 먼저 내세워서 티안브리스의 힘을 좀 빼놓을 생각이다.
나는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병사들을 하나씩 붙잡고 재촉했다.
“용족이 탈출했습니다! 빨리 가서 기사를─”
“아으아으이에으?”
“용족이 탈출했습니다! 빨리 가서 기사를─”
“.......”
“용족이 탈출했습니다! 빨리 가서 기사를─”
“그, 그게 정말입니까?”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세심하게 창조된 병사는 별로 없었기에, 무려 세 번을 시도하고 나서야 말이 통하는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서 기사와 병사를 불러오세요! 이제 곧 그녀가 올라올 겁니다!”
“이, 이런. 알겠습니다.”
병사는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현재 이 꿈속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티안브리스에게 적대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티안브리스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어서다. 현실에서도 체스터 백작성과 카트카에 있는 인간들은 그녀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의 꿈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곧 백작성에 있는 모든 병력이 튀어나와서 그녀와 대적할 테니, 나는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가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서도 늦지 않는다.
─탓탓탓! 스릉! 절그럭절그럭
가까운 장소에 머물고 있었던 모양인지, 몇 명의 병사와 기사가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저마다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는데,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여전히 별로 없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기사가 계단을 노려보며 병사들을 향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나마 기사쯤 되면 비중 있는 인물이니, 나름대로 디테일하게 창조된 모양이었다.
“지원 병력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으어아우이에?”
“그건 안 된다! 이곳을 사수한다!”
뭔데? 저 웅얼거리는 소리를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건데?
아무튼 나는 가까운 모퉁이로 달려가서 몸을 숨긴 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곧 티안브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의 오만한 표정을 되찾은 그녀는, 맨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여유롭게 계단을 올라왔다.
그렇게 느긋하게 등장한 그녀는, 계단 앞을 막고 서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보며 깔깔거렸다.
“오호호홋! 내게 또다시 인간을 불태울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내 자유를 기념하는 축가는 너희들의 비명소리로 시작해야겠구나!”
저 거슬리는 웃음소리도 오랜만에 듣는군.
어쨌거나 티안브리스의 그 거만한 선언에, 기사를 위시한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아압!”
“여긴 못 지나간다!”
자신의 몸을 향해 검과 창이 날아들었으나, 티안브리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날붙이들이 그녀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그녀와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
화염은 모두를 공평하게 뒤덮었으나, 불기둥이 가라앉은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오직 티안브리스 뿐이었다.
‘야이, 한 방에 몰살당했냐!’
일반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기사는 피하거나 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한 방에 당해버리는 바람에 마나조차 별로 소모시키지 못했다.
하긴, 저 불기둥은 나도 티안브리스와 싸울 때 불사조 다음으로 까다로워했던 마법이다.
한 개 그룹이 순식간에 몰살당했지만, 그래도 이곳은 체스터 백작성 내부. 지원 병력은 빠르게 도착했다.
“저기다! 탈출한 용족이 저기 있다!”
“모두 공격해라! 생포하지 않아도 된다!”
기사, 마법사, 보병 등 속속들이 늘어나는 백작가의 병력을 보고 티안브리스는 오히려 기쁜 듯이 소리쳤다.
“내가 찾아갈 수고를 덜어주는구나, 어리석은 인간들아! 감히 위대한 용족을 지하에 처박아둔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렇게 일대 다수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먼저 백작가의 마법사들과 티안브리스의 마법 교전이 벌어졌다.
─화르르륵! 슈웅! 휘오오! 사사사삭!
서로를 향해 날아가는 마법의 숫자 차이는 극명했으나, 결과는 숫자와 반대로 극명했다. 티안브리스가 캐스팅한 마법은, 여러 개의 마법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며 백작가의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악...!!”
“사, 살려줘!”
마법에 맞아 불타오르는 마법사들이 절규했다.
‘......확실히 강하긴 하단 말이지.’
티안브리스는 끽해봐야 중위 마법사인 백작가의 마법사들이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우위가 판가름 나자, 이번에는 기사들이 나섰다.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기사가 푸른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치켜들고 티안브리스를 향해 쇄도했다.
─후웅!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다 같이 달려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곳이 실내이기 때문에 동시에 검을 휘두를 만한 공간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무모하구나! 인간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냐?”
티안브리스는 영악하게 지형을 활용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뒤편에 있는 지하 계단으로 몇 걸음 내려가니, 정면만 신경 써도 되는 훌륭한 포지션이 잡혔다. 그녀는 거기서 입구에 마법을 난사해대며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콰아아아! 화르르륵!
그녀가 반지하에서 쏴대는 화염 마법에 기사는 하나둘씩 쓰러졌고, 백작성 1층 곳곳에는 불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블록버스터급 재난 영화를 방불케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더 늦기 전에 나도 나서야겠어.’
나는 작전을 변경하기로 했다.
원래는 백작가의 병력들로 티안브리스의 힘을 빼놓은 뒤에 나서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들로는 무리 같았다. 힘을 빼놓기는커녕 이쪽만 전멸하게 생겼다.
차선책이지만, 유효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아직 남아있을 때, 내가 메인으로 티안브리스를 상대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가야 할 듯했다.
‘후우... 싸우는 도중 티안브리스가 인페르노보다 불사조를 먼저 소환해내면 골치 아픈데. 한 번은 어떻게든 막는다고 쳐도....’
그녀는 불사조를 두 번 소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불사조를 소멸시킬 만한 마법이 ‘라이트닝 블래스트’ 뿐이다. 나도 불사조를 소환할 수 있지만, 관련 속성이 없는 나의 불사조는 당연히 그녀의 그것을 이길 수 없다.
얼마 전에 배운 마법인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이건 발동까지 딜레이가 좀 있는 마법이다. 이걸로 날아다니는 불사조를 맞추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안전하게 티안브리스의 힘을 빼놓은 뒤에 상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마나를 많이 소모하면 불사조를 두 번 소환하지는 못할 테니까.
‘클로이나 에드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내가 검을 뽑아 들고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적절하게 에드윈이 등장했다.
“저 좁은 계단으로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다. 기사들만 입구 주변에서 대기하고 나머지는 멀찌감치 거리를 벌려라.”
그는 여타 기사들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고, 냉정하게 전황을 분석하며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적발의 기사! 뭐 하는 것이냐? 어서 덤비지 않고. 네놈도 내가 두려운가 보지?”
티안브리스는 여전히 계단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에드윈을 도발했다.
어쨌거나 에드윈까지 등장했으니, 나도 앞으로 걸어 나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두려움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야, 거기에 처박혀서 한 발짝도 나올 엄두를 못 내는 게 누군데? 겁먹은 건 너 아니야?”
티안브리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너... 너... 너...!”
아까 낮에 있었던 전기 교육 때문인지,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광분했다.
“죽여 버리겠어!!!”
화르륵! 그녀의 앞쪽에 불덩어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어어... 설마 벌써부터...?’
벌써부터 불사조를 소환하나 싶어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녀 앞에 생성된 불덩어리는 맹렬히 회전하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도 즉시 동급의 오브를 캐스팅해 대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릭 오브’ - ∞회]
실타래처럼 얽힌 전기의 구체가 커다란 불덩어리와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즈즈즈즈!
─화르르륵!
백작가 마법사들의 마법을 모두 찍어누른 그녀의 오브였지만, 나는 그들과 달랐다. 전격 펜투플인 내가 사용하는 전격 마법은 동급 대비 최강. 그녀의 오브는 곧 힘을 잃고 소멸해버렸다.
“이익...!”
자신의 마법이 깔끔하게 막히자, 티안브리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뭐야, 그 새삼스러운 반응은? 네 마법은 지난번에도 전부 막혔었잖아?”
“닥쳐라!!”
분개한 그녀는 나를 향해 마법을 마구 난사했다.
하지만 나는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막을 수 있는 건 막아내며, 틈틈이 그녀를 향해 반격을 날렸다.
그렇게 잠시간의 마법 공방이 벌어졌다.
“크읏...! 인간 주제에...!!”
의외로 우위를 점하는 건 내 쪽이었다.
1층 로비에 있는 나는 마법을 피할 공간이 충분한데, 좁다란 계단에 있는 그녀는 모든 마법을 손수 방어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피하는 것보다는 막는 게 소모 값이 훨씬 더 크다.
게다가 백작가의 마법사들까지 화력을 보태주고, 틈나는 대로 에드윈이 칼질을 해대니 제아무리 티안브리스라 할지라도 눈에 띄게 밀리고 있었다.
“흐흐흐, 거긴 좁아서 불편해 보이는데 밖으로 나오지 그래?”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빨리 실외로 끌어내야 하는데....’
실내에서는 벼락과 관련된 마법을 쓸 수가 없어서다. 여기서 티안브리스가 불사조를 소환하기라도 하면, 진짜로 라이트닝 블래스트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면 마나 탈진에 빠진다.
인페르노를 유도해내야 하는 나로서는 곤란한 일이다.
“간사한 인간답게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내가 지리적 이점을 포기할 것 같으냐?”
“거기서 처맞고만 있는데 이점은 뭔 이점? 계속 거기에 있을 거면 그딴 시시한 마법 말고 불사조라도 소환해보든가. 내가 바로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흐흐흐.”
‘아니야! 제발 소환하지 마!’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뻥카쳤다.
그녀는 내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두려워하고, 한 번밖에 못 쓴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 그녀도 불사조를 쉬이 소환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사사삭! 휘오오! 치지지직!
“큿...!”
티안브리스는 정신없이 날아드는 마법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뭐해? 계속 그렇게 맞고만 있을 거야? 밖으로 나오든지 불사조를 소환하라니까? 아니면 뭐 좀 강력한 마법을 써보든지.”
“......내가, 이 위대한 용족께서... 한낱 인간의 말을 순순히 따를 것 같으냐!!!”
버럭 소리친 티안브리스는, 돌발행동을 했다.
오히려 계단을 더 내려가 깊숙하게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 이런. 모두 추격하라! 지하에서 땅을 뚫고 탈출할 셈이다! 시간을 주지 마라!”
아연한 표정의 에드윈이 병사들에게 황급히 지시를 내렸다.
확실히 티안브리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하 1층 정도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길을 뚫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즉시 앞장서서 계단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래쪽에서 자신만만한 티안브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호호홋! 나를 추격하겠다고? 그래, 들어올 수 있다면 들어와 보아라!”
─화악!
순간, 어둑어둑한 지하 계단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
그 빛의 근원은 티안브리스가 있는 지하 1층의 입구.
그곳에는 전에 본 적 없는 녹색의 화염이 맹렬히 타오르며, 장벽처럼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그 장벽 앞에서 멈춰서자, 뒤따라오던 기사도 멈칫하며 물었다.
“불 색깔이 무슨...?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 되겠소?”
“이게 어떤 마법인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봤자 색깔만 특이한 불인 것 같소만....”
그는 장벽 가까이로 다가가서 빠르게 손을 휘두르며 불길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불붙은 그의 손이 빠른 속도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 뼈마저도 금세 재로 변했다.
“어어... 끄아아악!”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서둘러 수통을 꺼내 물을 뿌렸다.
그러나 불길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불은, 어느새 그의 어깨까지 번져서 팔 한쪽을 아예 삭제시켜버렸다. 보다 못한 마법사들이 물 속성 마법마저 캐스팅했으나, 마찬가지로 아무 효과가 없었다.
‘......물에 닿아도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내가 잿더미로 산화해가는 기사를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을 때, 녹색 화염의 장벽 뒤에서 티안브리스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소용없는 짓이다. 인페르노는 모든 것을 불태우기 전까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업화의 불길. 그 불을 없애는 방법은 내 마나가 바닥나거나 불붙은 부위를 절단하는 것뿐이다.”
“인페르노? 이게 인페르노란 말이지?”
나는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그렇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잿더미로 변하고 싶지 않다면 거길 넘어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변하고 싶어.”
“......뭐?”
“잿더미로 변하고 싶다고! 고마워!”
“그, 그게 무슨 소리─”
나는 한 마리의 불나방처럼 녹색의 화염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