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40화 (140/200)

인페르노 (1)

티안브리스가 드디어 인페르노를 습득했다.

그렇다면 바로 훔치러 가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아카데미를 떠나 카트카로 출발하기 위해, 사무실에 있는 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 강사님. 갑자기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마치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내가 허겁지겁 짐을 배낭에 쑤셔 넣자, 샐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그런 일이 좀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는데, 기왕이면 서두르는 게 좋겠죠.”

“그, 그래도 송별회라도 하고 가시지....”

샐리가 아쉬움을 내비쳤지만, 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저는 아스왈드 그 미친 엘프가 있는 이곳에서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샐리 씨도 이제 다시 그 엘프하고 일해야 할 텐데, 미리 명상이라도 좀 해두시죠.”

“아....”

그녀는 짧게 탄식을 내뱉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저도 할 수만 있었다면 강사님처럼 당장 도망쳤을 거예요. 휴....”

“혹시 훗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스왈드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지면 절 찾아오세요.”

“네? 왜요? 진정이라도 시켜주시려구요?”

“아뇨, 제가 신화시대의 검을 빌려드릴 테니 그놈 심장에 꽂으세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원해줄 것이다.

“그 외에도 그놈을 죽이는 데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

─벌컥!

짐을 챙기며 아스왈드 살해 모의를 하던 중,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 알베르트 왕자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엘디니아 왕국의 1왕자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였다. 그의 뒤에는 늘 그렇듯, 철의 기사단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와 샐리는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 그래. 우리 성자님께서 여기 계셨군.”

내 사무실로 찾아왔으니 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왕자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로...?”

“아카데미에 볼일이 있어서 방문했던 차에, 자네가 여기에서 강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잠시 들러봤다. 그런데 어딘가 나가려던 참이었나?”

그는 짐을 집어넣고 있던 내 배낭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로써 제 강의가 끝나서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잠시 시간 좀 내지. 내 자네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어이, 조교! 너는 밖으로 나가라.”

“네, 왕자님.”

샐리가 자리를 피하자, 1왕자 알베르트는 자연스럽게 내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의자가 불편하군.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나? 아무튼 자네도 앉지.”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기사단장은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려는 듯 사무실의 문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아하니 1왕자는 뭔가 구린내가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바로 입을 열었다.

“잠은 잘 자나?”

“......예?”

“자네 같은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해. 신탁과 예언은 전부 꿈을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비단 신탁을 받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잠은 잘 자야 한다.

“아, 예. 잘 자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혹시 나에 관한 예언은 또 없었나? 뭐, 미래에 누군가가 나를 배신한다든가.”

배신? 그건 아마 저일 겁니다.

“지난번 이후로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아쉽군. 만약 또 나에 관한 꿈을 꾼다면 즉시 내게 알리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 다신 알베트르는, 곧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머지않아 거사를 치를 걸세.”

“거사라 하심은...?”

“허어, 다 알면서 왜 이러나? 왕좌 말이다, 왕좌. 준비가 끝나는 대로 아버님을 폐위시키고 지하 감옥에 유폐할 생각이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알베르트는 그동안 착실하게 역모를 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그는 나를 상당히 신뢰하는 듯 보였다. 아무리 알베르트가 왕자라고는 해도 반역자로 몰리면 끝장이니, 이런 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발설할 수 있으니까.

일단 시작은 좋군.

“하지만 준비가 순조롭지만은 않아. 아버님을 폐위시키려면 공작들의 지지가 필요한데, 아직 한 명밖에 포섭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아... 그렇군요.”

엘디니아 왕국에 공작은 다섯이 존재한다.

동서남북부와 중부에 한 명씩.

그리고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중부를 제외한 각 지방의 영주들은, 멀리에 있는 왕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공작에게 충성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은 왕을 섬기기에 결국은 그 밑의 영주들도 왕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지만, 어쨌거나 각 지방의 맹주는 공작이다. 맹주인 공작을 붙잡아야 그 지방도 붙잡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명의 공작 중 고작 한 명밖에 포섭하지 못했다니? 감히 국왕을 폐위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려면 적어도 두 명에게는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군.”

“......두 명이요? 과반수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알베르트 왕자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동부와 남부는 제외해도 된다. 그 게걸스러운 놈들은 제 밥그릇에만 신경 쓸 뿐, 왕실에는 별 관심이 없어.”

동부는 나의 고향 케른헴이 속한 곳이고,

남부는 청색 마탑이 있는 곳이자 내가 용병 자격을 딴 곳이다. 심지어 남부에서는 자이언트 데스웜을 잡고 보상을 받으러 해리스 공작성까지 갔었다.

“아버님이 그놈들을 왜 그냥 놔두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왕이라면 무력 시위를 해서라도 더 깊은 충성을 받아낼 터인데. 흐음... 지금 생각해보니 역시 진정한 왕의 재목은 아버님이 아니라 나였던 것 같군. 하긴, 그러니까 자네도 내가 왕이 된다는 계시를 받은 거겠지.”

뭐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지?

어쨌거나 알베르트는 그렇게 한동안 자신의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나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세르시아 교단이 나를 지지한다면, 눈치만 보고 있는 공작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가 수월해질 테니까.”

이것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였나.

가만 보면 이 녀석도 은근히 무능한 스타일이다. 툭하면 뭐 도와달라, 뭐 도와달라. 깔끔하게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일이 없었다.

빨리 인페르노를 훔치러 가야 하는데 사람 귀찮게 말이야.

“교단의 지지를 원하시는데 왜 저를...? 저는 그저 명예 성자일 뿐, 특별히 가지고 있는 권한 같은 건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교황이나 성녀를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리 대답하자, 알베르트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이 사람아. 누가 그걸 모르나? 그쪽에서 답이 없으니까 자네를 찾아온 거지. 늙은 교황이 말하길, 교단은 그 어떤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더군. 성녀는 나를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고.”

일국의 왕자를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그 물망초녀는 보기와는 달리 배짱이 두둑한 모양이다.

“그러니 나를 좀 도와주게.”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도 거짓 신탁을 부탁하러 오신 거라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신을 사칭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아니야, 아니야. 신의 힘을 빌리는 건 예언으로도 이미 충분해. 나는 자네의 도움을 원하는 거야.”

“제 도움이요? 어떤 도움 말씀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자, 알베르트는 비열하게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개인적으로 나를 지지한다고 대중들 앞에서 발표해주게. 성자가 그렇게 공표하면 굳이 신이나 교단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세르시아 신자들 중 상당수가 나를 따를 테니 말이야.”

성자라는 내 직함을 팔아서 신도들의 마음을 사겠다는 거군.

나쁜 전략은 아니다. 수많은 신도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건 곧 교단의 지지를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물론 도와줄 생각은 없다.

만천하에 내가 1왕자와 함께한다고 발표해버리면, 훗날 그를 향해 칼을 겨누기가 쉽지 않아진다. 한번 내뱉은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버리는데, 누가 나를 믿고 함께 행동해주겠는가?

“송구합니다만, 저도 교단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혹시 제가 파면이라도 당하면 훗날 왕자님께 힘을 보태드릴 수 없게 되잖습니까?”

“......그래서 거절하겠다는 건가?”

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시기를 조금 미루고 싶다는 뜻일 뿐이지요.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난 뒤에 지지를 공표해드리겠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도와달라는 것인데, 그때 가서 공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묻는 알베르트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왕자님께서 왕좌를 차지하시는 것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미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그 어떤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은 이겨내고 차지하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왕이 되신 이후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 없지요. 저는 모든 것이 불투명한 그때 도움을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흐음....”

알베르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고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님을 폐위시키면 민심이 좋지 않을 테니, 그것을 수습하기 위한 일도 필요하겠지.”

“예. 그때가 되면 제가 위험을 감수하고 신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민심 수습을 도와드릴 테니, 왕자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왕좌를 향해서만 달려가 주십시오.”

내가 짐짓 결연한 척하며 말하자,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좋아! 생각해보니 역시 왕이 되려면 공작 정도는 나 혼자서도 회유할 수 있어야겠지. 과연 성자는 성자군? 자네랑 대화하다 보면 깨닫는 게 많단 말이야.”

“제가 무슨... 다 왕자님께서 총명하신 덕분입니다.”

“크흠, 자네도 그리 느꼈나? 내 어릴 때 조부이신 선왕께 총명하다는 소릴 자주 듣긴 했지. 아무튼 그럼 나는 자네만 믿고 달릴 테니, 약속을 반드시 지키도록.”

“예, 알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알베르트가 왕좌에 올라도 그를 지지한다고 공표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내 도움을 필요로하는 그때야말로, 칼을 반대로 겨누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왕자님께서도 제게 약조하신 것을 꼭 좀 지켜주십사....”

“약조? 무슨 약... 아, 교황의 자리 말인가? 크흐흣! 이 친구 이거 감투에는 관심 없는 척하더니 내심 원하고 있었군? 물론 그래야지. 내 왕좌에 오르기만 하면 자네를 전폭적으로 밀어줄 것이야.”

교황? 그딴 거 전혀 관심 없다.

그저 내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1왕자를 도우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나도 뭔가 원하는 게 있는 척하는 것뿐이다.

알베르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어딘가로 가려던 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이제 그만 일어나지.”

“예, 알베르트 저하. 아, 다음에 뵐 때는 저하가 아니라 전하겠군요? 흐흐흐.”

“그, 그렇겠지? 크흐흣!”

하여간, 진짜 단순한 녀석이라니까.

***

카트카로 향하는 마차 안.

─달그락달그락

나는 이 무료한 여정에 하품을 참지 못했다.

“흐아암. 심심해 죽겠네. 앨리스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이번 여정에 앨리스는 동행시키지 않았다.

카트카는 티안브리스가 난동을 부렸던 장소다. 앨리스는 염색해서 머리 색만 다를 뿐 외모는 티안브리스와 완전히 똑같기 때문에, 카트카로 데려가는 것은 위험해서다.

어차피 나도 ‘국왕 시해자’ 퀘스트를 위해 금방 다시 수도로 돌아갈 계획이므로, 앨리스한테는 모험가 일이나 하면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을 혼자서 마차에 덩그러니 앉아있으려니, 그냥 그녀도 데려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뭐 읽을거리라도 가져올걸.”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는 미친 엘프 아스왈드에게서 받은 ‘아케인 텔레포트’ 마법서 뿐이었다.

이건 당연히 마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읽어버렸다.

습득한 후 아직 써보지는 못했는데, 사용횟수는 3회를 받았다. 블리자드는 1회,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은 2회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후한 횟수였는데, 아마 공격이 아닌 유틸리티 계열이라 그런 듯했다.

“아무튼...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체스터 백작령의 경계를 나타내는 팻말을 지나쳤으니, 반나절 정도면 카트카에 도착할 듯 보였다.

나는 견디기 힘든 무료함에, 마차의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빨리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저건?”

─채앵! 캉!

저편에 보이는 숲 지대에서, 모험가 파티 하나가 열 마리가량의 오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수적 열세에 몰려서 그런지, 그들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저건 도와줘야 한다. 탕탕탕! 나는 황급히 마차의 벽면을 두드리며 쪽창을 통해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부님! 여기서 잠깐 세워주세요!”

“예이, 알겠습니다요.”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나는 즉시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오크의 뒤쪽을 향해 마법을 캐스팅했다.

─번쩍!

‘어어...?’

순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가 쑤욱 빠져나감과 동시에, 청명한 하늘에서 한줄기 번개가 소리 없이 내리꽂혔다.

[금일 사용 가능한 ‘아케인 텔레포트’ - 2회]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잠시 암전했다.

─슈우욱

그리고 곧, 내 코앞에 서 있는 오크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좋은데? 엄청 빨리 이동되잖아?’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엄청난 양의 마나가 소모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주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취, 취익?!”

갑작스럽게 자신의 뒤편에 번개가 내리치고, 또 그 자리에 뜬금없이 사람 하나가 나타나자 오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건 피투성이의 모험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화륵! 나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험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고작 오크 따위한테 고전하면 어쩌자는 거야? 본 모험가는 너희에게 실망했다.”

“어, 어, 어...!”

“억울한!!”

“마법사!!”

도린 형제는 헐레벌떡 달려와 내 등 뒤로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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