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36화 (136/200)

왕립 아카데미 (7)

쭈글쭈글한 노인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낄낄... 피의 계약을 원하신다고...?”

그러자 나와 내기를 하기로 한 후작가의 장남 길버트 채트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렇소. 당장 계약을 진행하고 싶소.”

“피의 계약은 그렇게 가벼이 대답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네, 젊은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시 피할 수 없는 저주가 자네를 덮칠 테니 말이야... 낄낄낄.”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솥에 삶아 먹는 취미가 있을 것만 같은, 극도로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었지만 저래 봬도 교수라고 한다.

길버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당신을 찾아왔겠소? 다 알고 왔으니 잔말 말고 해주시오.”

“원한다면 그리해주지... 저주를 내리는 건 언제나 짜릿한 일이니까....... 낄낄낄낄낄낄낄낄!”

마귀할멈 같은 웃음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잇! 깜짝이야.’

나는 몸을 움찔하며, 눈앞에서 불길하게 웃는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남성이었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조금만 더 높으면 유리창이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고음이었다.

젊었던 시절에는 악명높은 저주술사였다고 하는데, 노년이 다 되어서 지난날을 후회하며 개과천선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해주 마법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저주에 관해서는 상당한 권위자이므로, 내일 벌어질 학생 던전 탐사 내기에 관한 계약서에 저주를 넣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래... 어떤 저주를 원하나? 심장이 터져버리는 저주? 온몸의 피부가 녹아내리는 저주? 피가 부글부글 끓게 되는 저주? 뭐든지 말만 하시게... 낄낄.”

“미, 미친.”

그딴 저주가 있다고?

듣기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 끔찍한 소리였다. 그딴 소리를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내뱉다니.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기는 좀 그렇지만, 진짜 얼굴값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닭살 돋은 팔뚝을 비벼대며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 저주가 정말로 있긴 한 겁니까?”

내가 저주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저런 저주는 듣도 보도 못했다.

“실제로 타인에게 걸기는 힘든 저주지만... 당사자가 피로 맹세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아, 그렇군요.”

어쩐지 너무 위험해 보인다 싶었는데, 당사자가 받아들여야만 성립 가능한 저주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생명에 지장은 없으면서도, 계약을 어길 마음이 들지 않게끔 치명적인 걸로요.”

“따분한 저주를 찾는군... 젊은이가 패기가 없어... 쯧쯧.”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지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침묵의 저주가 어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는 저주지....”

벙어리가 된다는 건가.

“그리고 그것 하나만으로는 재미가 없으니 다른 것도 하나 추가하지... 신체 특정 부위에 피가 잘 안 통하게 되는 저주로... 피로 맺는 계약인데 피와 관련된 저주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신체 특정 부위? 그게 어딥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노인의 얼굴에 다시 사악한 웃음이 떠올랐다.

“거기 말이야, 거기... 남성의 거기. 낄낄낄.”

“.......”

“헛!”

길버트가 식겁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저주가 그에게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이딴 저주는 사실 나를 포함한 모든 남성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저주 중의 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이것도 넣죠, 길버트 씨?”

메두사의 마안이 저주를 막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계약을 어길 마음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콜이었다.

만약 내기에서 져도 강단을 떠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길버트 채트먼 이 호구가 왜 나랑 그딴 걸로 내기를 하는 건지도, 왜 자기만 불리한 조건을 걸었는지도 모르겠으나,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 그냥 침묵의 저주만 넣는 게 어떻겠소? 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소만....”

길버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어딘가를 확인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따졌다.

“왜요, 설마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싫다는 거죠? 그리고 그냥 내기에서 이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설마, 쫄았습니까?”

“무, 무슨! 좋소! 그것도 넣읍시다!”

발끈한 길버트가 동의하면서 계약이 시작됐다. 계약서는 미리 작성해왔기 때문에, 노인이 저주를 넣는 작업만 하면 됐다.

“낄낄... 그럼 두 젊은이들 모두 여기에 피를 떨어트리시고.......”

자꾸 저렇게 웃어대니 무슨 악마와 계약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노인이 지시하는 대로 착실히 따라 하니 계약은 금세 마무리됐다.

“다 끝났네... 혹여라도 약속을 어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사자가 동의하고 피로 맺은 저주는 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낄낄.”

“낄낄, 알겠습니다.”

나는 노인과 똑같이 한번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내가 내기에서 이기면 길버트는 선택해야 한다. 반란의 선봉에 서서 포문을 열 것인지, 아니면 고자가 될 것인지를.

***

“고자가 될 것이다.”

길버트 채트먼의 중얼거림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학생이 귀를 쫑긋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교수님?”

“그 외부 강사 놈 말이다. 강단을 떠나지 않으면 고자가 될 운명이라고.”

자신이 내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길버트는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신뢰가 듬뿍 묻어나는 눈빛으로 앞에 있는 학생을 바라봤다.

“일대일로 트롤마저 처치할 수 있는 네가 있으니, 나의 승리는 불 보듯 뻔하겠지. 설마 날 실망시키는 건 아니겠지, 빅터?”

기사학부의 촉망받는 인재이자, 학년 수석 빅터.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학부생 중에서도 트롤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은 더러 있었으나, 고학년이 아닌 저학년 중에서는 빅터가 유일했다.

그리고 외부 강사가 맡은 강의의 수강생 중에 고학년은 없다. 즉, 내기에 참여하는 학생 중에서는 단연코 빅터가 최고 실력자라는 뜻이다.

이것이 길버트가 엘에게 공수표를 남발한 이유였다. 절대 질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맡겨만 주십쇼. 제가 반드시 승리해서 외부 강사를 쫓아내겠습니다.”

“좋아, 아주 든든해. 역시 나의 제자답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빅터는 길버트가 가르치기 전부터 이미 수석이었다. 길버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은근한 어조로 빅터를 떠봤다.

“그런데... 너는 외부 강사의 강의가 궁금하지 않나? 학부생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하던데.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교수님. 제가 그런 족보도 없는 자 밑에서 무엇을 배우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쇼. 제 성격 아시면서.”

꽤나 건방진 말투였지만, 길버트는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말투가 어쨌든 간에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신분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인데 그놈에겐 그게 없어. 지금이야 성자라고는 하지만, 근본이 없지 않은가? 미천한 상인이 졸부가 됐다 한들 고귀해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빅터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의 수치입니다. 그런 자가 강의를 하는 것도, 그런 자의 강의를 듣는 덜떨어진 녀석들도 말입니다.”

“그래서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다. 네가 던전 탐사에서 승리해야 외부 강사는 쫓겨나고, 그의 수강생들은 진정한 교수인 나의 밑으로 오게 될 테니까.”

“그 한심한 놈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 건 불쾌하지만... 알겠습니다. 혹시 던전 탐사에 대해 조언해주실 건 없습니까? 제가 던전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음....”

빅터가 조언을 요청했지만, 길버트는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도 던전을 직접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아는 체하며 입을 열었다.

“뭐, 별로 걱정할 것은 없다. 던전에 트롤보다 강력한 몬스터는 거의 출몰하지 않으니까. 네 실력이면 아무 문제 없을 테니, 일행들을 인솔해서 최대한 빨리 최하층으로 내려가라.”

“최하층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곳에 과거 선발대였던 기사단이 꽂아놓은 왕가의 깃발이 있을 것이다. 그걸 먼저 가져오는 쪽이 승리한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몬스터는 모조리 썰어버리고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

“......뭐?”

잠시 후 시작될 던전 탐사에 대한 핵심 요약 강의를 하려던 나는, 수강생들의 말을 듣고 당황하며 되물었다.

“길버트 교수님의 수강생 중에 기사학부 수석이자 학년 전체 수석이 있다구요!”

“수석? 그럼 얼마나 강한 건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으나, 어쨌거나 수석이라고 하니 뭔가 뛰어난 구석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들보다는 강할 것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혼자서 트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이에요.”

“트롤과 대등하게? 검을 사용하는데 그 정도라면... 오러를 다룰 수 있다는 소린가?”

트롤의 피부는 매우 질겨서 일반적인 검으로는 옅은 상처밖에 낼 수 없다. 티안브리스가 몬스터 대군을 이끌고 카트카로 쳐들어왔을 때, 트롤이 나타나는 곳마다 밸런스가 붕괴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네? 당연하죠! 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웬만한 기사학부생은 거의 다 오러를 다룰 수 있어요.”

“뭐? 진짜?”

몰랐다. 내 강의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법사 계열이었으니까. 나는 수강생 중 유일한 기사학부생을 가리켜 물었다.

“오우! 이건 감탄사가 아니라 너를 부르는 거다, 오우 피들스턴! 그럼 너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나?”

“옛, 강사님. 저도 다룰 수 있습니다.”

“오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보여봐라.”

내가 반색하며 그리 말하자, 오우 피들스턴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흐읍...!”

그가 무언가가 마려운 사람처럼 끙끙거리자, 곧 검에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혀, 형편없어...!’

저건 오러가 아니라 그냥 형광 막대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검에 가까스로 맺힌 희미한 푸른 빛은, 무언가를 썰어버리기보다는 야밤에 주차 유도를 하는 용도로 더 적합해 보였다.

“제 오러가 어떻습니까, 강사님?”

형편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뿌듯해하는 저 얼굴을 보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래... 아주 개성 있는 오러군? 잘 봤으니 이제 그만 거두도록.”

이건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기사학부생인 오우 피들스턴은, 마법사만 가득한 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전위에 설 수 있는 녀석이다. 마법사를 앞장세우면 효율이 매우 떨어지니까.

우리 팀의 유일한 전위는 야광봉을 들고 다니는데, 적 팀의 전위는 트롤도 벨 수 있는 무지막지한 오러를 사용한다니.

내가 던전 탐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면야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겠지만, 이번 탐사는 학생들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학생들만 참여해야 한다.

‘......내 검을 빌려줄까? 아니, 그건 안 되겠어.’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도 없는 물건이므로 잃어버렸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도 하고, 오러를 생성할 마나조차 부족한 사람이 이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뭐, 꼭 강해야만 탐사를 빨리 끝낼 수 있는 건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나와 길버트가 한 내기는 누가 몬스터를 많이 잡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빨리 최하층에 도달했다가 돌아오느냐를 겨루는 것.

속도 싸움은 개개인의 무력이 뒤처지더라도 요령만 좋다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자자, 다들 집중! 잠시 후면 탐사가 시작된다. 최대한 간추려서 말할 테니 잘 새겨듣도록.”

“옛!”

이번 내기에서 져도 큰 손해는 없지만, 이기면 반란에서 앞세울 고기방패를 획득할 수 있다.

당연히 이기는 것이 좋았으므로, 나는 나의 모든 노하우가 담긴 전략을 전수했다.

“던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면.......”

***

수도 인근에 있는 미개방 던전.

이 던전은 과거에 발견되었을 당시 왕실 기사단이 빠르게 최하층까지 진입해 왕가의 깃발을 꽂아놓기만 했을 뿐, 본격적인 탐사는 이루어진 적이 없기에 내부의 상세한 지형도, 어떤 몬스터가 출몰하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러한 던전의 입구 앞에는, 조교가 학생들을 세워놓고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는 알 수 없으므로 다들 안전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나흘 내로 귀환하지 않을 경우 교수진이 직접 여러분을 찾으러 갈 것이니, 유사시에는 무리하지 말고 몸을 숨겨서 기다리시면.......”

꿀꺽.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이 긴장으로 인해 침을 꿀꺽 삼키며 조교의 입을 주시했다.

그들은 크게 두 개의 팀, 엘과 길버트의 수강생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던전에서 열 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행동하는 것은 효율이 좋지 못했으므로 팀 내에서도 여러 파티로 나뉘어 있었다.

“......입니다. 그럼, 던전 개방하겠습니다!”

이윽고 조교가 개방을 알리자, 모든 학생들은 파티별로 즉시 던전을 향해 뛰쳐 들어갔다.

엘 쪽은 두 개의 파티, 길버트 쪽은 세 개.

도합 다섯 개의 파티였다.

─우다다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자들이 있었는데, 각 팀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우 피들스턴의 파티와 빅터의 파티였다.

그렇게 나란히 선두에 서서 던전을 달려 나가던 중, 빅터가 코웃음 치며 소리쳤다.

“흥, 기가 차는군! 네놈 따위가 수석인 나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피들스턴?”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나는 강사님의 가르침을 믿는다!”

“외부 강사? 큭큭, 그래. 잘해봐라. 너도 졸업 후에 그놈처럼 모험가나 하면 되겠군. 하압!”

─뽀각!

사제를 싸잡아 조롱하던 빅터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스켈레톤에게 보란 듯이 쇄도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피들스턴은 그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며, 던전 입장 전에 엘이 해줬던 조언을 되새겼다.

[던전에는 트롤보다 강하거나 실체가 없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잡몹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탐사에 집중해라!]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마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 못지않게 되돌아오는 길도 중요하니 천천히 이동해라. 단, 초반에는 무조건 치고 나가라!]

그 외에도 여러 조언들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그가 실행할 수 있는 건 초반에 치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빅터의 파티보다 앞서나가는 데에 성공한 피들스턴의 파티는, 얼마 후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길에 도달했다.

그들은 가운데 길로 진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피들스턴을 제외한 세 명의 파티원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제자리...? 이거 완전히 미로잖아...!”

“어, 어느 길로 가야 하지? 왼쪽? 오른쪽?”

“다들 당황하지 마라. 벌써 강사님의 가르침을 잊었나!”

피들스턴은 당황하는 동기들을 진정시키며, 갈림길 가까이로 접근했다.

“어차피 헤매게 되어 있으니, 어떤 길로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었다. 표식을 새겨서 같은 길을 두 번 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었지.”

그렇게 말한 피들스턴은 이미 한번 지나갔던 길의 석벽으로 다가간 뒤, 품에서 단검을 꺼내 벽을 긁어내며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새겼다.

그리고 나머지 길에는 엑스자를 새겼다.

“너 뭐해? 왜 틀린 길에는 동그라미를 새기고 여기에는 엑스자를 새기는 건데? 심지어 이건 아직 가보지도 않은 길이잖아.”

동기가 의아해하며 묻자, 피들스턴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는 대체 강사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뭘 했나? 이건 눈속임이다.”

객관적으로 빅터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신들을 위해 엘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초반에 치고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거다! 갈림길마다 큼지막한 엉터리 표식을 새겨서 뒤따라오는 경쟁자들을 교란해라! 진짜 표식은 너희만 알아볼 수 있게끔 작게 따로 새겨라!]

피들스턴은 그렇게 엘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며 던전을 나아갔다.

***

던전의 최심부, 지하 3층.

어둡고 고요한 지하 3층의 한쪽 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한 여자는, 위층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

아름다운, 그러나 사이한 여자였다.

피보다 붉은 입술은 그녀를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으나, 동시에 핏기가 전혀 없는 창백한 안색은 죽어있는 사람처럼 보이게도 만들었다.

그녀는 차디찬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떨쳐낼 수 없는 어떠한 본능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인사.”

인사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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