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 아카데미 (6)
왕립 아카데미의 중앙에 자리한 본관.
그곳의 2층에 있는 대연회장에서는, 여러 학과의 교수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조교들이 모여 친목, 학술 교류를 위한 모임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타스모스 학파에서 중거리 통신 마법을 개발했다더군. 우선 시범적으로 수도와 베이커 후작령의 도시를 연결해서─”
“내가 새로운 마나 정제법을 연구 중이네만, 성공하면 마나석의 효율을 최대 2할까지 증대시킬 수 있다네. 내 연구에 투자한다면 원금의 두 배를 보장─”
“왕이 될 재목은 아무래도 프란츠 2왕자님 쪽이─”
사회, 학문, 정치 등 점잔빼는 교수들의 지루한 이야기가 가득한 모임이었지만, 나에겐 모든 게 새롭기만 했다.
“오, 이게 사회 상류층들의 사교 모임...? 뭐가 이렇게 으리으리... 엇, 감사합니다.”
연회장으로 들어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근처에 있던 종업원이 물이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와 내게 내밀었다.
웰컴 드링크인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그릇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가, 강사님...!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함께 입장한 조교 샐리가 경악하며 나를 제지했다. 물그릇을 들고 있었던 종업원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뭐가요?”
“그, 그건 손 씻는 물이에요!”
“.......”
그걸 왜 지금 말해주냐고.
“아, 입을 좀 헹구고 싶어서. 아, 입안이 텁텁하네? 아.”
“돼, 됐으니까 빠, 빨리 들어가죠, 강사님.”
그녀는 나보다 더 당황하며, 나를 이끌고 황급히 종업원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연회장 안쪽에서는 서로 마음이 맞는 교수와 조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샐리가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잔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든 종업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잔을 하나씩 건네줬다.
“흠흠, 샐리 씨.”
나는 잔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은 뒤, 헛기침하며 은근한 어조로 샐리를 불렀다.
“네, 강사님.”
“이건... 술 맞죠?”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이 술이 명확해 보였으나, 입구에서 한번 망신살을 뻗쳤으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뭐, 손 소독을 위한 액체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마, 맞아요. 드셔도 됩니다.”
나는 샐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첫 잔을 비울 때쯤이었다.
“오, 자네 왔군?”
“안녕하십니까, 오베르가 학장님.”
오베르가가 반색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잘 왔네. 내 안 그래도 자네를 다른 교수들에게 소개해줄 자리를 마련해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 됐군. 자네와 인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거든.”
“네? 제가 뭐라고....”
“뭐긴, 세르시아 교단의 성자가 아닌가. 게다가 자네의 강의가 조금 해괴... 아니, 독특하지 않은가? 입소문이 제법 퍼져서 자네를 궁금해하는 교수들이 많다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정정했다.
근데 내 강의가 독특한 건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나도 다른 교수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오베르가가 나서서 소개시켜 준다면야 고마울 따름이다.
“예, 저도 많은 교수님들과 알고 지내면 좋죠.”
“허허, 긍정적이라 좋구먼. 특히 실전 격투 강의를 맡고 있는 교수들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한다네. 아, 그리고 이거.”
그렇게 말한 오베르가는 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일전에 자네가 요청한 탈진 방지 물약일세. 급한 대로 일단 한 병부터 만들었으니, 내 나중에 몇 병 더 제조해줌세.”
“오오, 감사합니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건가? 뭐, 한 병이라도 어디냐. 나는 만족하며 물약을 챙겨 넣었다.
어차피 이 물약을 사용해야 할 정도라면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일 텐데, 그런 상황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럼 이제 나를 따라오지. 교수들을 소개시켜 주겠네. 샐리, 너도 따라오너라. 성자가 이런 자리는 어색해할 수도 있으니 네가 옆에서 보조하거라.”
“네, 학장님.”
내가 실수하지 않게끔 잘 설명해주라는 뜻인 것 같았는데, 나는 벌써 부끄러운 실수를 저질렀다. 손 씻는 물을 원샷 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샐리와 함께 오베르가 학장을 따라갔다. 그가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연회장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여자였다.
“이 친구가 바로 그 소문의 외부 강사, 엘이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성자이기도 하지. 서로 인사들 나누시게.”
“어머, 당신이 엘? 반가워요. 나는 마리아 러벳이에요. 회복학 교수죠.”
도도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 음... 저는 엘입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그렇게 소개했다. 오베르가 학장이 벌써 다 신상을 말해버린 탓에, 달리 소개할 게 없어서 그냥 이름이나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쑥스러움을 잘 타는 성격인가 봐요? 귀엽네. 마음에 들어. 혹시 어디 아프거나 다치면 나를 찾아와요. 내가 고쳐줄 테니까.”
“아하하, 개인적인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회복 마법이 있어서 어지간한 상처는 거뜬합니다.”
딱 봐도 예의상 한 말 같았는데, 그걸 넙죽 받아들이기도 뭐해서 에둘러 사양했다.
“그래요. 당신은 성자니까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꼴깍. 술을 넘기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내게로 고정된 채였다.
뭐지? 그녀의 분위기를 읽기가 힘들었다.
딱히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내 회복 마법보다 자신의 회복 마법이 더 뛰어나다는 우월감?
아니, 우월감이라기보다는 자신감에 가까웠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교수는, 회복 마법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이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술잔을 입에서 뗀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성자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더군다나 당신은 명예 성자니까.”
“해결할 수 없는 일?”
“회복시키기 힘든 상처. 이를테면 신체의 어느 부위가 완전히 절단됐다거나 하는 그런 거. 절단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다면 성녀도 치료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심각한 상황은 아무리 성녀라도 힘들죠.”
그 이상의 심각한 상황?
그게 뭐지? 그보다 심각하면 죽지 않나?
그리고 이 여자는, 마치 성녀가 못 하는 걸 자신은 할 수 있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의 이 만남을 기억해요. 그럼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
“......네? 갑자기 뭐를 도와주시겠다는...? 방금 말씀하신, 그 이상의 심각한 상황이란 거요?”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나는 고개를 꺾으며 되물었지만, 그녀는 방금 했던 말을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영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연회장의 허공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일 뿐.
이 여자.......
아스왈드랑 비벼볼 만한 괴짜잖아?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오베르가 학장이 멋쩍게 웃었다.
“허허, 마리아 교수가 원래 저렇게 가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면이 있으니 자네가 이해하게나. 그래도 실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여자야. 자, 이제 다른 교수도 만나보러 가지.”
“예, 뭐. 그러시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베르가를 따라갔다.
***
대연회장에 있는 어느 테이블.
이 테이블 앞에는 두 명의 교수가 서 있었다.
중년의 교수와 거구의 젊은 교수.
그들은 본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인가부터 대화가 중단된 상태였다. 젊은 교수가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것 좀 보십쇼. 오베르가 학장을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꼴 하고는....”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중년의 교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음? 누구를 보고... 아, 새로 왔다는 외부 강사? 저자가 왜? 저렇게 먼저 인사하러 다니면 좋지 뭘 그러나. 나도 어서 그와 인사를 나누고 싶군.”
“......혼자서는 인사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성자로 임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신분이었던 주제에, 자기가 뭐라고 학장을 달고 다니는 건지 원.”
연회장에 있는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조교조차도 대다수가 귀족 출신이다.
그런 장소에 왔으면 주제를 파악하고 겸손하게 인사드리러 다녀야지, 학장을 앞세워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건방진 모습이 그의 눈에 못내 거슬렸다.
“과거가 어쨌든 간에 그는 이제 성자야. 자네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신분이라는 말이지. 자네가 작위를 상속받는다면 모를까.”
“.......”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친하게 지내보는 게 어떤가?”
중년의 교수가 그리 말하자, 젊은 교수가 발끈했다.
“싫습니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명예도 모르는 놈과 가깝게 지내야 합니까? 저자가 어떻게 강의하는지 들으셨습니까? 기사학부생더러 고깔모자를 쓰고 다니라고 했다는군요.”
“어허, 놈이라니. 호칭에 주의하시게.”
“어차피 저기까지 들리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그딴 강의는 기사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애새끼들은 그런 저급한 강의가 뭐가 좋다고 난리인지... 하.”
거구의 젊은 교수는 짜증스럽게 말을 쏟아냈다.
이미 자신의 실전 격투 강의를 듣는 수강생 중에서도, 저 외부 강사의 강의로 변경을 요청하는 녀석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교수로서 명성을 쌓아야 하는 그로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하, 자네. 설마 질투하는 건가? 수강생을 뺏길까 봐? 내 강의를 듣는 몇 학생들도 변경을 요청했네만... 그거야 그들의 자유 아니겠나.”
“질투는 무슨. 무엇이 명강의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머저리들 따위, 저도 필요 없습니다.”
정곡을 찔렸지만, 그는 애써 부정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질투하는 거 맞구만 무얼. 외부 강사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네의 강의가 가장 인기 있었는... 아, 우리에게 인사하러 오는 것 같군. 자네도 표정 관리 좀 하게.”
오베르가 학장이 엘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중년의 교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젊은 교수의 옆구리를 찌르며 주의시켰다.
이윽고 다가온 오베르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마침 실전 격투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님들이 여기 모여계셨군? 자, 인사들 나누시게. 이쪽은 성자 엘, 이쪽은 기사학부의 교수인 사이먼과 길버트라네.”
먼저 중년의 교수가 나서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사이먼 허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엘입니다.”
“요즘 학생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으셨다던데, 언제 그 비결 좀 공유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 강의는 지루하다는 평이 많아서 말입니다. 하하.”
엘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는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그다음은 젊은 교수였다.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길버트 채트먼이오. 채트먼 후작가의 장남이지.”
“......? 반갑습니다. 엘입니다.”
지금껏 인사를 나눈 교수 중에서 자신의 가문까지 소개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엘은 잠시 당황했다.
표정은 또 왜 저렇게 뚱한 건데?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어쨌거나 길버트는 그 뚱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성은? 성은 뭐요?”
“아, 저는 평민이라 성이 없습니─”
“성이 없으셨군? 이거 실례했소.”
“.......”
미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자르며 사과하는 길버트. 이건 마치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엘은 미간을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이 새끼가 지금 나를 꼽주는 건가?
그간 평민이라고 수많은 귀족들에게 괄시당해본 이력이 있는 엘의 감각은, 이 거구의 젊은 교수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리게 했다.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원래 같았으면 그냥 조용히 참고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고, 이제는 성자라는 직함이 있으니 마냥 설설 길 필요도 없어서다.
길버트는 팔짱을 낀 채 시치미 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만. 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소? 하긴, 강의가 그 모양이니 제 발 저릴 만도 하겠군.”
“강의? 제 강의가 어때서요?”
“어떠냐고 물으시니 대답해드리지. 아무리 실전 지향적인 강의라지만 너무 경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물불 안 가리고 싸우는 건 평민들에게나 어울리지, 귀족의 체면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오.”
체면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이것은 상당히 황당한 소리였다. 전장의 칼날이 귀족과 평민을 가려서 날아드냐? 그리고 내 강의를 왜 네가 왈가왈부하는데?
엘은 어이없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강의 내용은 강사의 재량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제 강의가 별로라면 학생들이 진작 다른 강의로 변경했겠죠. 길버트 교수님이 참견하실 일이 아닙니다.”
“참견할 일이 아니라니? 학생들이 그릇된 강의를 들으며 망가지고 있는 꼴을, 참된 교수로서 어떻게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겠소?”
“아니, 그릇된 강의고 뭐고 학생들이 선택한 거라니까요? 저는 제 수업을 들으라고 강요한 적 없습니다.”
“그건 애들이 안목이 없어서 그런 거지!”
길버트는 버럭 소리쳤다.
그가 이렇게 억지 부리듯 트집 잡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강생을 뺏기고 있어서.
그는 후작가의 장남이지만, 특출난 재능이 없는 탓에 아직 후계자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은 평범한 기사 수준. 이 정도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도, 특출난 공헌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교수로서 명성을 쌓고 학생인 귀족 자제들에게 인기를 끌어서 인맥을 넓혀두면, 아버지의 작위를 상속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다.
그렇기에 짜증 나는 애새끼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인기 교수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굴러들어온 외부 강사가 자신의 인기를 훔쳐 가고 있으니 어떻게든 흠을 잡고 싶은 것이었다.
“평민 출신의 강사가 신기해서 몰려든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따위 강의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소?”
“어허! 길버트 교수! 말을 가려서 하시게. 그따위라니? 성자의 강의가 독특하긴 하네만, 아무 문제 없어. 내 직접 참관해봤지. 실제로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고 말이야.”
분위기가 과열되는 듯하자, 오베르가 학장이 타이르듯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한 번 높아진 길버트의 언성은 다시 낮아질 줄을 몰랐다.
“인기만 좋으면 뭐 합니까? 배우는 게 없는데! 저자한테 배운 학생들이 실전에서 제 몫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품위 있게 싸워야 승리도 품위 있는 법입니다!”
그러자 엘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아니,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저한테 배운 학생들이 품위 없이 싸울지는 몰라도, 실전에서 제 몫을 못 한다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전의 정수를 가르쳤다.
적어도 실전에서 체면 차리다가 당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이익...! 당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증명할 수 있냐고!”
“뭐, 자신은 있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엘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길버트를 향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신 있다 이거지? 좋소! 그럼 나와 내기를 합시다.”
“내기? 무슨 내기요?”
“수도 근처에 있는 미개방 던전을 하나 개방해달라고 요청할 테니, 누구의 학생이 먼저 최심층까지 도달하고 돌아오는지 겨뤄봅시다! 어차피 기말 평가가 던전 탐사이니, 그걸 미리 당겨서 해보자고.”
던전? 이 사람이 장난하나 지금.
“저기요, 제가 모험가 출신이라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그런데 던전 탐사를 내기로 하자고요? 에휴, 됐습니다. 뭐 그런 걸로 유치하게 내기까지 하겠습니까.”
엘이 시시하다는 듯 손사래 치자, 길버트가 악에 받쳐서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당신의 팀이 이긴다면, 내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지 하나 해주지.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하면 그렇게 하리다.”
“남자가 제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건 불쾌한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든지 한다니까! 대신 내가 이기면 당신은 강단에서 떠나시오. 당신의 수강생은 아스왈드 교수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맡을 테니.”
그가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말했지만, 엘은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작 조건이 그거라고요...? 제가 강단을 떠나는 거? 당신이 너무 불리한 것 같은데요. 혹시 내기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고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거 아닙니까?”
“하! 계약서를 쓰겠소. 각자의 피를 떨어트리고 서명하는 마법 계약서 말이오.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저주를 받게 될 테니, 이 정도면 믿을 만하겠지.”
“흐음....”
“왜, 겁나시오?”
“아니요,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엘은 흔쾌히 수락하며 생각했다.
길버트 채트먼.
채트먼 후작가의 장남이라고 했나?
추후 알베르트 1왕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반란의 선봉으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겠군.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