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30화 (130/200)

왕립 아카데미 (1)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자님.”

“그래, 조심히 돌아가라고. 자네도 장차 교황이 될 몸인데 안전에 유의해야지. 그렇지 않은가? 크흣....”

나를 배웅하기 위해 무려 왕성의 출입문까지 따라 나온 1왕자 알베르트는 인사 도중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녀석은 내가 ‘당신은 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부터 거의 반쯤 실성한 상태였다.

예언이니 뭐니 해가며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면서 실실 쪼개더니, 본인이 왕이 되면 차기 교황으로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는 허황된 약속까지 늘어놓았다.

교황 선출은 세르시아 교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왕자의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한 듯 보였고, 나는 교황 자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일단 웃으며 장단을 맞춰줬다.

“이거, 왕좌에 앉으실 분께서 저를 밀어주겠다고 호언해주시니 정말 든든하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야말로 자네의 예언이 든든하지. 전지전능하신 세르시아 님께서 보신 미래를, 성자인 자네가 전달해주었는데 이보다 더 든든한 게 어디 있겠나?”

너무나도 당연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언? 그딴 건 없었다.

애당초 나는 1왕자에 관한 꿈을 꾸지도 않았다. 내가 뭐 좋을 게 있다고 수염 거뭇거뭇한 성격 파탄자의 꿈을 꾼단 말인가?

그냥 싹 다 꾸며낸 거짓말이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번도 세르시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괜히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말을 하기에는 찜찜하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왕이 될 거라고만 말했지, 세르시아는 1왕자 스스로 떠올려서 갖다 붙인 것이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알베르트 저하께서 왕좌에 앉으시는, 명백히 정해져 있는 미래를 말씀드렸을 뿐이죠.”

“저, 저하? 크흐흣! 이 사람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벌써부터 그렇게 부르는 건가? 나는 아직 왕세자로 책봉된 것이 아니니 호칭에 주의해라. 크흠.”

알베르트는 경박하게 웃으며 점잔 떨었다.

입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몸은 솔직하군.

“어차피 조만간 그리되실 게 자명한데, 조금 일찍 부른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저하.”

“허어... 자네가 그리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졌네, 졌어. 편할 대로 부르도록 해라.”

지긴 뭘 져?

딱 한 번 튕겼을 뿐이었지만, 그는 마치 내 고집을 도저히 못 당해내겠다는 듯 은근슬쩍 ‘저하’라는 호칭을 허락했다.

“예, 그럼 저는 이제 정말 가보겠습니다. 저하.”

“크흐흣, 그래. 나도 이만 올라가서 예언을 실현시킬 방법을 고민해봐야겠어.”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등을 돌려 떠났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나.’

1왕자 알베르트는 김치와 비슷하다.

이제 막 숙성을 시작한 김치.

맛있게 익을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다.

한껏 부채질해놨으니, 그는 앞으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이다.

왕을 죽이기 위한 명분?

그딴 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1왕자 알베르트가 알아서 만들어낼 테니까.

고위 귀족들을 포섭해서 반란을 일으켜 현 국왕을 유폐시키든, 음식에 독을 타서 국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앓아눕게 만들든,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를 시전하든, 자기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내겠지.

뭐가 됐든 깨끗한 방법은 아닐 테니, 나는 조용히 그가 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2왕자와 함께 반격에 나설 생각이다.

어쨌거나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일은 아니므로, 그때까지는 나도 가능한 한 힘을 키워놔야 한다. 내 본신의 힘은 물론이고, 나를 지지하고 거사를 함께 치러줄 우군도 필요할 것이다.

‘일단은... 라이트닝 블래스트 마법서부터 처리해야겠군.’

내가 당장 빠르게 스펙업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고대의 마법서를 팔아서 상급 마법서를 구하는 것과, 티안브리스에게서 인페르노를 훔치는 것.

하지만 티안브리스는 먼 곳에 있고 인페르노를 배우는 데에 성공했을지도 아직 불확실하니, 마법서부터 처분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다면 거기로 가봐야겠어.’

***

“와 씨,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나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왕립 아카데미의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감탄했다.

수도에 처음 온 날 인력거를 타고 멀리서 봤을 땐 높게 솟아있는 몇 개의 건물만 보였기에 넓이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막상 가까이 와보니 미친 듯이 넓었다. 정문까지 가는 데에만 한세월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케른헴과 비슷한 수준?

물론 담벼락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다.

“대단하네. 수도라서 땅값도 어마어마할 텐... 아, 왕립이라 그런 건 별 상관없으려나.”

아무튼 나는 고대의 마법서를 처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왕립 아카데미에 가는 중이었다. 수많은 마법 공방 체인점을 거느린 대부호 그라텔라가 써준 추천장을 들고서.

그라텔라의 말에 의하면, 라이트닝 블래스트는 전격 속성이 쿼드러플 이상이어야 배울 수 있다.

정말 무척 까다로운 조건이다.

마법서를 구매할 재력이나 의사가 있는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배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사람부터가 극도로 희귀하니까.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 중에 전격 속성 쿼드러플을 타고난 자가 있다.

마법사는 보통 자신의 상세한 속성을 비밀에 부치는 편이지만, 속성에 자신 있는 교수는 학생을 끌어모으기 위해 그냥 과감하게 공개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뭐, 이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아도 기왕 배우는 거 더블이나 트리플보다는, 쿼드러플의 빡고수에게 배우고 싶을 테니까.

‘......정령학 교수인 엘프라고 했었나. 교수면 돈은 좀 있겠지? 무려 왕립인데.’

그 엘프가 얼마나 속성을 타고났든, 또 고대의 마법을 얼마나 갖고 싶어 하든 간에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

그래도 명색이 왕국 최고 아카데미의 교수니까 그 정도 능력은 있지 않을까? 일단 학생 하나하나가 내로라하는 귀족 집안의 자제일 테니, 촌지를 조금씩만 받아먹었어도 금화로 목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걷고 나서야 아카데미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 옆에 있는 수위실에서 중년의 수위가 걸어 나왔다.

“학생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일로 오셨소?”

“정령학 교수인 아스왈드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스왈드...? 아, 그 괴짜 교수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그분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니. 그래, 약속은 잡고 오신 거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추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라텔라가 써준 추천장을 보여주자, 수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뉘시길래 우리 아카데미의 최대 후원자께서 직접 추천서를...?”

“아, 여기. 제 신분패입니다.”

나는 은빛 찬란한 광택을 자랑하는 신분패를 내밀었다.

이건 성자 임명식 이후 세르시아 교단에서 발급해준 건데, 사치스럽게도 순은으로 만들어졌다. 은은 정화를 뜻한다나 뭐라나. 실제로 은에 살균효과가 있긴 하다.

“서, 성자? 설마 당신이 어제 신전에서 임명됐다는 그 명예 성자시오?”

“예.”

“아이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자님. 저도 매주 착실하게 헌금하는 독실한 신자입죠.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에야 내 얼굴만 보고 성자인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내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포스터로 뿌려지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거나 수위가 반색하며 정문을 열어줬기에 바로 아카데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

입장한 아카데미는 낭만 그 자체였다.

닦여진 길을 따라 전봇대처럼 드높은 가로수들이 주욱 늘어 서 있었고, 잘 조경된 풀밭, 꽃밭 따위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어서 수업을 땡땡이치고 드러눕기 딱 좋아 보였다.

길에서 좀 떨어진 으슥한 곳에는 간혹 오두막 비슷한 자그마한 목조 건물들이 있었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혈기 왕성한 남녀가 득실대는 공간에 저런 음침한 건물을 세워두면 음탕한 건물로 변모할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라는 것은 그냥 배가 아파서 한번 해본 소리고, 사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성인이라 아무 문제 없다. 아카데미는 이 세계의 대학교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길을 따라 계속 걸어 들어가다 보니 학생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절그럭 절그럭

멋들어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차려입은 학생이 내 옆을 지나갔다. 기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모양인데, 복장 하나만큼은 이미 소드 마스터였다.

이건 비단 이 녀석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갑옷이든 로브든 드레스든 뭐든, 쓸데없이 호화롭게 차려입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부잣집 자제들끼리 모였으니 누가 더 비싼 걸 입나 하는 경쟁이 있는 듯했는데,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저들 부모의 등골이 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래서 부모들이 교복을 선호하나 보다.

어쨌거나 나는 지나가는 아카데미생 하나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몸통만 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여자였다.

“혹시 교수 회관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교수 회관이요? 동관과 서관이 있는데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음... 아스왈드라는 분을 찾고 있는데.”

“아스왈드 교수님의 사무실이라면 서관에 있어요. 그런데... 아마 지금 야외에서 실전 격투 강의를 하고 계실걸요?”

“예? 실전 격투요? 정령학 교수 아닙니까?”

“그분은 엘프시잖아요. 타고난 숲의 사냥꾼. 몬스터는 당연하고 대인 전투에도 능숙하세요. 동족을 잡아가려는 노예 밀매범과 자주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되셨다던데.”

정령사이자 마법사이며 싸움꾼이라고?

그라텔라가 특이한 엘프라고 말해줬었는데, 이래서 그런 건가? 확실히 설명만 들어봐도 평범하지 않은 것 같긴 했다.

“곧 강의가 끝날 시간이니, 교수님께 용건이 있으시다면 저쪽 길로 가보세요. 가다 보면 숲속처럼 꾸며진 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강의 중이실 거예요.”

“오, 고맙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길을 따라서 얼마쯤 걸었을까.

옆에 있는 작은 숲으로부터 어떤 희미한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부스럭. 퍼억! 크악!

안쪽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초록색의 얇은 천 쪼가리를 입은 남자가 귀티 나게 차려입은 생도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귀가 뾰족한 걸 보면 저 남자가 아스왈드겠군.’

사실 말이 좋아 전투였지, 실상은 구타에 가까웠다. 아카데미생보다도 어려 보이는 엘프가 날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기사 지망생, 마법사 지망생 할 것 없이 골고루 두들겨 패는 중이었다.

저게 강의라고? 저걸로 교육이 돼?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을 빙자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튼 내가 맞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적당한 곳에 주저앉아서 기꺼운 마음으로 폭행 현장을 관람했다.

‘교수 자리가 좋긴 좋구만? 합법적으로 귀족을 두들겨 팰 수도 있고.’

─후웅! 화르륵! 퍼억!

그는 생도들이 휘두르는 검과 마법을 가볍게 피해내며 맨손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생도의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쨌거나 재빠른 몸놀림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날뛰던 엘프는, 이윽고 자리에 멈춰서 입을 열었다.

“강의, 끝.”

그가 짤막하게 말을 내뱉자 생도들은 곧장 자리에 쓰러지듯 드러누웠고, 그는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즉시 쫓아가며 그를 불렀다.

“저기, 혹시 아스왈드 씨 되십니까?”

“?”

그가 뒤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하지 않는, 모르는 인간과.”

그리고는 볼일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봐요. 잠시만요.”

“나는, 싫어한다, 두 번 말하는 것.”

내가 재차 따라가며 불렀지만, 그는 특이한 말투로 냉정하게 거절하며 계속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라텔라 님의 추천으로 왔습니다. 여기 추천서도 있고요.”

“......그라텔라? 그라텔라의, 후원금, 달달한.”

뚝.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렇다면, 들어봐야 하는, 너의 용건을.”

아니, 이놈 말투가 왜 이래? 장난치는 건가?

문장이 뚝뚝 끊겨서 알아듣기 번거로웠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

“핫초코, 주세요, 초코 빼고.”

“???”

“이 말투를 좋아하시는 것 같길래 그냥 한번 따라 해봤습니다.”

“.......”

아스왈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똑같은 표정을 지어줬다.

그렇게 서로를 이상한 놈 취급하며 바라보길 잠시, 이윽고 그가 목에 걸린 팬던트를 움켜쥐고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의, 번역기가, 고장 난!”

“앗.”

그런 거였어? 나는 또 나를 엿먹이려고 장난치는 줄 알았지.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좀... 이쪽 말을 할 줄 모르셨구나, 아하하.”

“강아지! 용건이나, 말하는.”

역시 내가 말투를 따라 했던 게 언짢았던 모양인지,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흠흠, 그라텔라 님이 말씀하시길 아스왈드 씨는 전격 속성이 쿼드러플이라던데... 맞습니까?”

“사실인! 나의, 전격 속성, 굉장한!”

그가 콧대를 높이며 자못 자랑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뭐, 쿼드러플이면 어디 가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긴 하지.

“이야, 대단하시네요. 그 희귀한 속성을 네 개나 타고 나셨다니.”

그는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행동이나 얼굴은 영락없는 애 같았는데, 껍데기만 그런 거지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네 배라서 실상은 칠팔십 먹은 노인네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전격 계열의 고대의 마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저한테 마법서가 한 권 있는데, 쿼드러플 이상만이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선택받은 자만의 마법이라고나 할까요.”

“선택받은 자의 마법? 보여주는!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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