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29화 (129/200)

문제는 죽이고 난 이후의 뒷감당이다.

‘국왕 시해자’는 내가 선택한 중간 퀘스트다.

‘최종’이 아닌 ‘중간’ 퀘스트.

즉,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왕을 암살하고 퀘스트를 클리어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자리에서 나도 죽을 게 뻔한데. 수백 명의 기사단과 왕국 마법사들이 나를 찢으려 들 텐데, 나는 그들 모두를 이길 만큼 강하지 않다.

‘정당한 명분이 필요한데....’

왕을 시해하고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국 전체가 덤벼도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거나, 그게 아니라면 정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기사나 귀족을 잡을 때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당한 진짜 명분이.

가장 좋은 명분은 타국과의 전쟁이다.

그렇게 되면 타국의 왕을 죽일 만한 완벽한 명분을 가지게 되니까. 어쨌거나 타국의 왕도 ‘국왕’이니, 퀘스트를 깨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전쟁은 개뿔.

이곳에 전쟁이라고는 자기들끼리 땅따먹기나 하는 소모적인 영지전 뿐이지, 타국과의 전쟁은 낌새조차 없었다. 이건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왕자와 관계를 맺어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내부적으로 왕을 죽일 만한 그럴싸한 명분과 기회는 왕족인 왕자한테서 나오니까.

왕자와 함께라면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를테면 폭군이 될 만한 왕자가 후계자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물밑에서 도운 뒤, 왕으로 즉위하면 폭정을 명분 삼아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그냥 아무 왕자나 하나 붙잡고 전폭적으로 도와서 그의 최측근이 된 다음, 왕이 되었을 때 독대해서 슥삭 죽여버리고 들키기 전에 다른 나라로 튄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양심상 폭군을 죽이는 게 마음이 편하긴 하다.

‘흐음. 폭군이 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1왕자 쪽이 높아 보이는데.’

폭군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놈은 딱 봐도 성격 파탄자였다.

어떻게 신탁을 거짓으로 발표하라고 할 수가 있지? 그냥 거짓말이면 몰라도, 신을 사칭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이곳은 신이 실존하는 세상이니까.

보상으로 약속한 상급 마법서고 나발이고, 세르시아의 분노부터 사게 될 것이다. 어쩌면 교단 차원에서 나를 죽이라고 성녀에게 ‘진짜 신탁’을 내릴지도 모르지.

1왕자도 그런 위험성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냥 나한테 덤터기 씌울 생각이었던 거다.

‘......평민이라고 날 띄엄띄엄 봤다 이거지?’

너 이 새끼 왕만 돼봐라.

내가 어떻게든 죽여주겠어.

물론 당장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무리다.

아직 나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상급 마법도 좀 더 필요했고, 티안브리스에게서 인페르노 정도는 훔쳐 와야 거사를 치를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는 적당히 간을 보면서, 누구의 편에서 어떻게 개입할지─

“성자님! 성자님!”

돌연 누군가가 애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교단 관계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성자님을 위해서 연회가 열린 건데 이런 곳에 혼자 계시면 곤란합니다. 어서 연회장으로 가시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내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연회는 나 없이도 알아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굳이 성자 임명식만을 보러 왔다기보다는 사교 모임을 위한 목적도 커 보였다.

어쨌든 그렇다고 내가 휙 떠나버리면 세르시아 교단의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 적당히 그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또다시 소소한 청탁 러쉬가 쏟아졌다.

“집안에 노쇠하신 어머니가 계시네만, 자네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기도를 해주면─”

“내 아들이 조만간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합격을 기원하는─”

아니, 이 사람들은 대체 성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짝퉁 성자인 나로서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도하는 기계는 아닐 것이다.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부족해서.......”

나는 일일이 정중하게 거절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렇게 전부 튕겨내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새로운 인물이 내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성자님.”

“아, 예. 안녕하세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는데,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귀족으로 보였다. 이 세계에서 안경은 굉장히 고가의 물건이라서 귀족이 아니면 쓰기 힘들다.

물론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귀족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새로이 탄생한 성자님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프란츠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

“네, 저는 엘이라고 합니.......”

나는 문득 기시감 같은 게 느껴져서 뒷말을 흐렸다.

프란츠?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혹시 프란츠 폰 하츠펠트님?”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이틀 전 시장에서 돈 복사를 시도하던 남자의 입에서 나왔던 2왕자의 이름이었다.

“그렇습니다.”

“아, 말씀을 낮춰주세요. 저는 평민입니다.”

“신의 뜻을 전언하는 분께 제가 어찌 하대를 하겠습니까.”

다른 귀족들은 잘만 하던데?

어쨌거나 정중한 건 좋은데, 너무 과도하게 정중한 것 같아 오히려 불편한 감도 있었다.

“그래도 말을 높이시면 제가 불편해서....”

“하하, 말을 낮추는 건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엘 공도 이제 귀족이나 다름없으니 존칭을 써드리는 게 옳겠죠.”

엘 공?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온몸이 간지러울 정도로 불편해서 실제로 몸을 벅벅 긁어댔다.

2왕자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슬쩍 밀어 올려서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떠나기 전에 인사나 드릴까 해서 와봤습니다. 기껏 성자 임명식에 와서 성자님과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 가는 건 이상하잖습니까? 하하.”

“아,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자, 그는 당황하며 황급히 양손을 들어 손사래 쳤다.

“왜, 왜 이러십니까. 고, 고개를 드십시오. 서로 만나는 게 중요하지, 누가 먼저 찾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사과했다고 말까지 더듬는다고?’

2왕자는 조금 특이한 사람인 듯했다.

좋게 말하자면 착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심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별말씀을.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엘 공.”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연회장을 떠났다.

“어우, 끝까지 존칭을 쓰시네. 부담스럽게.”

평민이라고 개무시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너무 정중한 것도 좀 그렇다. 나는 편한 사람을 선호한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프란츠 왕자님은 모든 귀족에게 존칭을 쓰시지.”

“아잇, 깜짝이야.”

조금 전에 아들의 왕립 아카데미 합격을 기원해달라고 부탁하던 귀족이었다.

“정말 겸손하시지 않나? 저러니 나 같은 귀족들과 평민들의 무한한 지지를 받으시는 게지.”

“아, 예.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지금도 빈민가로 구휼 활동을 하러 가신 거야. 조금만 더 강단 있는 성격이셨다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고도 남으셨을 분인데... 아쉽군, 아쉬워.”

그는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 주변을 한번 살핀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왜 아직 왕세자가 되지 못하신 거죠? 귀족과 평민의 지지를 받으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모든 귀족이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일세. 하위 귀족은 대부분 2왕자님을 지지하지만, 고위 귀족은 과반수가 1왕자님을 지지하지. 1왕자님이 고위 귀족만큼은 끔찍하게 잘 챙기시거든.”

파벌이 갈렸다는 소리군.

다수의 민중과 소수의 권력자로.

2왕자는 1왕자와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그게 꼭 긍정적인 신호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사람은 좋지만, 군주로서의 필수 요소인 카리스마가 없었고 유약한 타입이었다. 고위 귀족을 뺏긴 걸 보면 정치적인 수완도 1왕자에 비해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은 왕좌에 앉고 나서는 괜찮으나,

왕좌를 차지하기 전에 패배할 확률이 높다.

‘흐음. 그렇다면.......’

***

“왕자님. 명예 성자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뭐? 벌써?”

강철 기사단장이 들고 온 뜻밖의 소식에 1왕자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빨리도 찾아왔군. 벌써 결정을 내린 건가?”

“그자도 헤이든 대주교처럼 입으로는 신앙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물욕이 가득한 모양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물욕이 있는 법이지. 사실 탐욕 그득한 그 노인네가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신의 분노라는 게 과연 실재하는지도 의문이란 말이야.”

대주교가 뒷돈을 받아먹으며 자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준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 타락한 성직자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일 층의 귀빈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지. 경도 따라오도록. 날 찾아온 걸 보면 내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것 같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나를 잘 지키도록 하게.”

녀석은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을, 그것도 영주를 죽였다.

그런 무식하고 예측불허한 평민이 왕자라고 해하지 못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같은 편에 섰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신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1왕자는 기사단장을 대동하고 귀빈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귀빈실의 소파에 앉아있던 엘이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오, 자네 왔군. 나는 자네가 빠른 시일 내에 나를 찾아올 걸 알고 있었지. 물론 현명한 선택과 함께 말이야.”

1왕자 알베르트는 빙글빙글 웃으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는 엘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한 뒤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내 제안을 수락하러 왔나?”

“아닙니다. 송구하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찾아뵌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알베르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지?”

“......저는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 왕자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엘은 그런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왕자님.”

“......?”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 왕자님.”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말을 해라.”

알베르트가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자, 엘이 마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조만간 왕이 되실 것입니다.”

1왕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그러다가 문득 미치는 하나의 생각.

성자가 꿈을 꾸고 나서 자신을 찾아와 왕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신탁! 설마 신탁을 받은 것인가!”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눈앞의 성자는 꿈속에서 세르시아에게 어떤 말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신탁은 아닙니다. 신께서 무엇 하러 인간의 대소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겠습니까? 저는 단지 꿈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 그래. 그렇겠지.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겠지만... 크하, 크하하하핫!!”

1왕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신탁이 아니라 예언이다. 성자는 세르시아를 통해 미래를 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왕이 되는 미래를!

그는 환희에 젖어 엘에게 물었다.

“조만간이라고 했나? 그게 언제지?”

“정확한 시기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머지않았습니다.”

“그, 그렇군... 크하하하핫!”

머지않았다는 소리에 시원하게 웃어 젖히던 알베르트는 잠시 멈칫했다.

“아니, 잠깐. 아직 나의 아버님께서 건재하신데, 어찌 내가 조만간 왕이 된다는 말인가?”

아버지이자 국왕인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의 수명이 다하려면 최소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그렇다고 죽기 전에 순순히 왕좌를 물려줄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머지않아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일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꿈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알려드릴 뿐, 방법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내가 왕이 되는 것은 확실하나, 그 예언을 실현시킬 방법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소리군. 그래, 좋아. 그편이 더 재미있겠어... 크크.”

엘은 교활하게 웃는 1왕자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병신. 예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