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28화 (128/200)

엘디니아 (5)

대주교의 노기 어린 질타에 사제는 곤혹스러워하며 대꾸했다.

“저,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그따위로 행동한다는 말인가? 당장 자리를 비켜라! 아이고, 왕자님. 죄송합니다. 이놈이 사리 분별을 할 줄 몰라서....”

백발의 대주교는 사제에게 고압적으로 말하면서도, 뒤에 있는 왕자를 향해 간신배처럼 굽신거렸다.

“하, 하지만 대주교님. 교단의 규정상....”

“이익...! 규정은 무슨 놈의 규정! 얼마나 더 내 얼굴에 먹칠을 할─”

“하하, 진정하시오. 대주교.”

돌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1왕자가 끼어들며 노발대발하는 대주교를 진정시켰다.

“저 젊은 사제가 무얼 잘못했겠소? 성자가 출현했다기에 마음만 앞서서 불쑥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웃는 얼굴로 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젊은 친구가 일처리가 아주 칼 같군그래. 이름이 알렉스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성은? 성은 무엇이지?”

“루카스입니다.”

“흐음....”

왕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기괴할 정도로 짙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남부에 있는 루카스 남작의 자식이었군? 남작이 자식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야. 아주 감명 깊어. 내 나중에 따로 남작을 불러서 비결을 좀 들어봐야겠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자, 우린 이만 가지. 성자는 임명식 후에나 볼 수 있겠군.”

1왕자 알베르트는 얼굴에 머물던 웃음기를 싹 지우며 몸을 돌려 떠났다.

함께 있던 기사도 즉시 그를 따라 떠났고, 대주교는 사제를 죽일 듯이 한번 노려보고는 허겁지겁 그들을 뒤따라갔다.

‘......저건 부모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 같은데? 왕족이란 놈이 속이 좁군.’

왕자도 왕자지만, 딱 보아하니 교단의 대주교란 작자도 왕자랑 붙어먹는 듯했다. 이 정도로 규모 있는 집단이라면 부정부패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고는 하나, 좀 실망스러웠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나는 그냥 성자라는 직위를 준다고 해서 받는 것뿐이지, 교단을 위해 열심히 봉사할 생각은 없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왕자 쪽이다.

나는 왕을 죽여야 하니까.

‘왕이 될 왕자라고 했나? 그럼 왕세자인가?’

대주교가 분명 1왕자를 두고 왕이 될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나, 왕세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좀 들었다.

시장에서 금화 한 개를 두 개로 복사하려고 했던 남자나 성녀의 말로 미루어보면, 2왕자의 인기가 굉장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보통은 장남이 왕위 계승에 우선권을 가지지만,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차남도 충분히 뒤집을 수 있지 않나?

아직 둘이서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인 것 같기도 한데, 나도 잘은 모르겠다. 이따 임명식 후에 다시 나를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때 대화를 해보면 알게 되겠지.

“옷을... 마, 마저 갈아입으시지요....”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내 환복을 도왔다. 그 역시 왕자의 말이 협박이었다는 걸 느꼈는지, 굉장히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헛기침하며 슬쩍 물었다.

“흠흠, 교단의 성직자들은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는 거 아니었습니까?”

왕자가 당신을 그리 쉽게 해할 수 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자나 깨나 입조심을 해야 하므로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다.

괜히 왕족을 들먹이며 함부로 말했다가는 나까지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저 같은 일개 사제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보호는 받지만, 상대가 왕족이라면 얘기가 다르지요. 그리고... 교단 입장에서 저의 가족은 외부인입니다.”

가족까지 신경 써주지는 않는다는 거군.

아무튼, 1왕자.

그다지 좋은 첫인상은 아니다.

***

세르시아교 본단의 중앙에 자리한 신전.

그 장엄한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에는, 교단의 관계자들과 수많은 귀족들이 임명식을 참관하기 위해 빼곡하게 서 있었다.

내 생각 이상으로 귀족들의 숫자가 매우 많았는데, 작위가 없는 귀족도 참관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임명식은 이틀 전에 급하게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수도와 중부지방의 귀족만 올 수 있었는데, 혹시나 레이첼이 식칼을 들고 찾아왔을까 싶어 몹시 조마조마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확실한 건 아니다.

나는 지금 계속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그 거룩하신 뜻을 이 미천한 종에게─”

미천한 종? 나를 지칭하는 건가?

내 앞에서 교황이 근엄한 목소리로 몇 분째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미천한 종은 그 뜻을 세상에 알리며─”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한다.

“......희망을 품고 있는 한 영원히 섬길 것을─”

아, 치킨 먹고 싶다.

“......하여 새로운 성자가 탄생했음을 공표하노라.”

오? 드디어 끝난 건가?

“성자는 고개를 들라.”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자, 성수를 들고 있는 교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에 성수를 묻힌 뒤, 손바닥을 펼치며 내 얼굴에 그것을 뿌렸다.

촤악! 차가운 성수가 얼굴에 닿자 잠이 확 달아나면서, 임명식 내내 잡생각이나 했던 나의 죄악이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신전을 가득 메웠다.

─짝짝짝짝짝짝!!

“이로써 성자 임명식을 마치겠습니다! 신전 앞쪽 마당에 조촐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참석을 희망하시는 귀빈께서는 그쪽으로 이동해주십시오!”

교단 관계자가 박수 소리를 뚫고 큰소리로 외쳤다.

곧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동하기 시작했고, 나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악, 다, 다리 저려....”

앉은 자세가 잘못됐었나? 그리 오래 꿇어앉아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리가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내 스태틱 쇼크에 맞은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아무튼 움직일 때마다 더욱 저렸기에, 나는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서 있었다.

“......뭐 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성녀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오늘도 역시 머리에 물망초를 꽂고 있었다.

“아, 성녀님. 안녕하세요.”

“네, 성자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뭐 하시는 거예요?”

“다리에 쥐가 나서 풀리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녀는 무슨 그런 한심한 소릴 하냐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성자님.”

“예?”

“회복 마법을 쓰시면 되잖아요.”

“.......”

그러네?

쓸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 내가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심지어 세르시아표 정품 마법인데.

─위이잉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3회]

손끝에서 하이얀 광휘가 뿜어져 나오며, 다리에서 느껴지던 찌릿찌릿한 감각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진작 쓸걸.

“......!”

셀프 치료를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당신... 누구보다도 굳건하게 세르시아 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자신했던 말, 빈말은 아니었네요.”

“예?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직접 봤는데 어떻게 안 믿겠어?

아무튼 나처럼 야매 성자가 아닌 진짜 성녀의 눈에는, 뭔가 신성력의 차이 같은 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가 경솔한 발언을 했네요. 당신도 성자인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손가락은 물망초를 하염없이 만져대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때마다 하는 습관인 모양이다.

“아,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슬슬 연회장으로 가봐야겠네요. 성녀님도 가실 거죠?”

“아니요. 저는 가지 않습니다.”

“안 가신다고요? 왜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제가 이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성녀님뿐인데.”

사실 성녀와도 대화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는 외부인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불편하거든요.”

“불편?”

“당신도 연회에 가보면 알게 될 테지만,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들의 유혹을 조심하세요. 저는 이 말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성녀는 그녀 특유의 차갑고 염세적인 표정으로 담담하게 조언했다.

희망의 여신을 섬기는 성녀가 염세적이라니.

확실히 일반적이지는 않단 말이지.

“부디 당신은 타락한 성직자가 되지 마세요.”

그녀는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신전을 떠났다.

뭐지? 뉘앙스가 묘한데.

부패한 성직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나?

뭐, 내가 혼자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으므로, 바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이라고 해봐야 그냥 신전 앞마당이었다. 야외 테이블에 간단한 다과와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회라기보다는 귀족의 사교 모임 같았다.

어쨌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조용히 가까운 테이블로 가서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성자님. 저는 카딘 챈들러라고 합니다. 새로운 성자가 출현하다니, 이건 왕국의 크나큰 축복이라─”

“파블로 파머입니다. 성자 임명식을 참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

귀족이 내게 존댓말 하며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작위가 없는 반쪽짜리 귀족들이나 그랬고, 작위가 있는 영주는 예의는 갖출지언정 말을 높이지는 않았다.

“반갑군. 나는 피트먼 남작일세. 수도 서쪽에 자그마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특히, 사소한 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만간 내 딸아이가 결혼식을 올리네만, 자네가 자리해서 축사를 몇 마디 해준다면 교단에 헌금을 잔뜩─”

“새로 개간한 경작지에 풍작을 위한 기도를─”

“아내가 수태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

딸의 결혼식 주례부터 시작해서, 임신을 위한 기도까지. 진짜 별의별 청탁이 다 들어왔다.

이게 성녀가 말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받아들여도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사소한 종류의 부탁이었다.

풍년을 위해 기도를 좀 해준다고 해서 내가 타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귀찮으므로 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당초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풍년이 들 리도 없고.

“아하하,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을 맡기에는 아직 제가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네요.”

웃으며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귀족들을 뚫고,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들은 새로운 성자에게 무슨 그런 한심한 부탁들을 하는 건가? 다들 비켜라.”

“와, 왕자님...?!”

귀족들이 즉시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비켜서며 길을 만들자, 1왕자 알베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길을 즐기듯이 느긋하게 걸어오면서도 몇 명의 고개를 일으켜 세웠는데, 그건 오직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뿐이었고, 하위 귀족이나 영주가 아닌 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윽고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목에 한껏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1왕자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다.”

“예, 왕자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나는 자네가 먼저 나를 찾아올 줄 알았는데.”

“.......”

“하하, 질책하려는 건 아니니 고개를 들어라. 평민이었으니 아직 예법에 익숙지 않겠지. 어쨌든 조용히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오도록.”

1왕자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는 별수 없이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인적이 드문 신전의 회랑으로 가서 멈춰 선 뒤, 대동했던 기사에게 지시했다.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 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기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철통같이 주변을 경계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왕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이력이 상당히 흥미롭더군.”

“......네?”

“중부의 밀러 백작을 도와 영지전을 몇 번 치렀다지? 얼마 전에는 브룩스 자작을 처치하기도 했고 말이야.”

내 뒷조사를 해본 건가?

왠지 뜨끔했다. 혹시 왕족이니 자신의 신하를 죽였다고 책임을 물을까 봐서다.

그러나 그는 내 우려와는 달리, 비릿하게 웃으면서 나를 칭찬했다.

“밀러 백작 편에 가담한 건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어. 별 힘도 없는 자작 따위에게 붙어서 뭐 하겠나? 기왕이면 힘 있는 사람 쪽에 붙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예? 아, 예....”

딱히 밀러 백작이 힘이 있어 보여서 그를 도운 건 아니었지만, 그냥 잠자코 듣고 있기로 했다.

“그래, 이 세상은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거야. 내가 힘이 없다면, 힘이 있는 사람에게 빌붙기라도 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는 법이지. 뭐, 자네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군.”

칭찬을 하는 건지, 비난을 하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묻는 거네만, 자네는 한 가문의 장남과 차남 중에 누가 더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일반적으로는 장남 쪽이 아니겠습니까.”

“크하핫! 그래, 그게 당연한 거지.”

1왕자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장남과 차남이 둘 다 멀쩡히 살아있다면, 누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나?”

보편적?

은근히 자기가 원하는 답변을 유도하는군.

“보편적이라고 하시면 역시 장남 쪽이겠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자네는 보기보다 상식적인 친구 같으니, 내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보지.”

그는 나를 능글맞게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1왕자와 2왕자. 둘 중 누가 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역시.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내 예상대로 1왕자는 아직 왕세자로 책봉된 게 아니었다. 후계자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 부분은 제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쯧,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군.”

내가 대답을 회피하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 자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야. 무엇이 옳은지는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기가 두렵겠지.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하면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

“그래,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자네가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어.”

“어떤 부탁 말씀이십니까?”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듣자 하니 자네는 밀러 백작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대가로 상급 마법서를 요구했다더군. 마법에 대한 열망이 큰 모양인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 역시 상급 마법서를 약속하지. 원한다면 두 권을 구해줄 수도 있어. 대신 자네는 나를 위해 몇 마디 말만 해주면 돼. 목숨 걸고 싸울 필요도 없고 아주 간단한 일이지.”

너무 간단한 조건에 오히려 경계심이 일었다.

공짜 치즈는 덫에 놓인 것뿐이니까.

“......제가 어떤 말을 하면 됩니까?”

“세르시아 님이 후계자 싸움에서 나를 지지하라는 신탁을 내렸다고 발표해주게.”

“예??”

이 새끼가?

“눈 딱 감고 그것만 해준다면, 내 왕이 된 후에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마법서를 자네가 열람할 수 있게 해주지. 자네도 마법에 대한 열망이 크다고 하지 않았나? 진귀하고 강력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완전히 어이가 없는 놈이었다.

마법이고 자시고 그딴 짓을 하면 세르시아가 나를 가만히 놔두겠냐고 이 미친놈아.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니니 잘 한번 생각해보도록 해라.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지.”

1왕자는 내가 수락할 게 뻔하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떠났다.

예언

“.......”

나는 1왕자가 떠난 후에도 홀로 회랑에 남아서 생각에 잠겼다.

신탁을 거짓으로 발표해달라는 그의 제안은 간단한 듯 보였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일단 세르시아가 분노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내가 그를 돕는다면 나는 왕자 간의 후계자 경쟁에 개입하게 되는 거니까.

물론, 개입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1왕자든 2왕자든 누구 하나를 선택해서 왕좌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엄청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일종의 개국공신처럼 될 수 있다고나 할까.

다만 이 경우에는, 만약 내가 지지한 왕자가 경쟁에서 패배했을 시 내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숙청 대상자가 된다는 뜻이다. 물론 성자라는 이름으로 교단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국왕 시해자 퀘스트를 노려볼 수도 있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나라면 왕을 죽이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할 수도 있다.

어딘가의 외부 행사를 나온 왕에게 다짜고짜 라이트닝 블래스트나 상급 마법을 때려 갈기면? 바로 암살에 성공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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