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디니아 (4)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의 화살이 흙더미를 향해 쇄도한다.
─화르륵!
불의 화살이 목표했던 지점에 정확히 꽂히자, 앨리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어떠니? 정말로 배운 거 맞지?”
“오, 그러네. 생각보다 빨리 습득했는데?”
마침내 앨리스는 내가 밀러 백작령에 있을 때 사준 ‘파이어 애로우’ 마법서를 독학해서 습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대략 일주일 정도 소요된 것 같은데, 이만하면 파격적인 학습 속도라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용족 티안브리스를 복제하면서, 그녀가 가진 불 속성에 대한 재능까지도 일부나마 얻게 된 듯했다.
“헤헤. 이 불의 여왕님께서 고작 기초 마법에 고전하면 안 되잖니?”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아무튼, 그럼 이번에는 하급 마법서를 구해줄 테니까 한번 배워봐.”
“마, 마법서를 또? 괘, 괜찮은데....”
앨리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원래 스펙업은 고달픈 법이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사러 가자. 아까 보니까 저쪽에 마법 공방 본점이 있는 것 같던데, 거기로 가면 되겠지.”
수도 엘디니아는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마법을 테스트하러 매번 도시 밖으로 나가기가 번거롭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 공용 연무장이 존재했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도 그중 하나였다.
“바, 바쁠 텐데 다음에 가는 게 어떻겠니? 너 무슨 성자인가 뭔가 하는 걸로 임명된다고 했잖니.”
“뭔 소리야? 그건 내일인데. 군소리 말고 따라와!”
“......쳇.”
성자 임명식까지는 하루가 남은 상황.
나는 볼멘소리를 하는 앨리스를 이끌고 연무장을 빠져나와 마법 공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니, 무려 10층에 달하는 높다란 건물과 꼭대기에 달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라텔라 마법 공방]
내가 첫 마법서인 ‘스태틱 쇼크’를 구입했던 공방과 같다. 이 공방의 분점은 케른헴에도 있고 카트카에도 있고 도튼에도 있고, 그냥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다.
‘그라텔라’라는 마법사가 세운 체인점이라고 하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이 사람은 왕 못지않은 부자가 아닐까 싶었다.
─스윽
공방의 입구로 다가가자 문지기가 말없이 문을 열어줬다. 기름칠을 얼마나 잘해뒀는지, 문을 여는 소리가 전혀 안 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에 서 있던 직원 중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하급 마법서를 구매하러 왔습니다. 불 속성으로요.”
“하급 마법서는 3층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직원은 앞장서서 우릴 안내했다.
로브를 입은 차림새를 보아하니 마법사 같았는데, 안내 데스크에 세워둔 직원조차 마법사라는 사실이 꽤나 놀라웠다.
“이곳입니다.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와....”
“와아....”
웬만하면 수도에서 촌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촌스러운 탄성이 절로 나왔다.
도서관을 방불케 할 만큼 책장에 마법서가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물론 전부 서로 다른 마법서는 아니었고 중복된 게 많았지만, 어쨌거나 압도적인 규모였다.
그리고 같은 마법이라 할지라도, 어디서 발행했느냐에 따라 구분해서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마탑에서 발행한 마법서는 별도의 부스가 존재했다.
“불 마법은 역시 적색 마탑이지.”
가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럴 것이다.
나는 앨리스와 함께 적색 마탑 부스로 다가갔다.
“네가 원하는 마법서로 골라봐.”
“나는 원하는 마법서가 없는데?”
“말대꾸?”
“이, 이 마법서가 재미있어 보이네. 저, 저것두.”
앨리스는 마지못해 미적거리며 마법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마법서를 구경하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곳에서 마법서를 매입하기도 합니까?”
그래도 명색이 왕국의 수도이고, 마법 공방의 본점이니 혹시나 해서 물었다.
여기서 라이트닝 블래스트 마법서를 처분할 수 있다면, 굳이 먼 길을 떠나 황색 마탑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까.
“어떤 마법서를 말씀하시는지요? 저희는 개인으로부터 하급 이하의 마법서는 매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등급 미상인 고대의 마법서입니다.”
“......!!”
직원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고, 고대의 마법서? 혹시 지금 소지하고 계십니까?”
“네.”
“그,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지금 저와 함께 사장님을 뵈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런 마법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고, 매입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는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굽신거리며 부탁했다.
“그러죠. 앨리스, 나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 테니까 그동안 마법서 고르고 있어.”
“응.”
나는 앨리스를 남겨두고, 직원을 따라 건물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승강기가 있었다.
“와,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 마법으로 들어 올리는 건가?”
“손님은 이것의 용도를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저희 사장님께서 직접 설계, 제작하신 장치입니다.”
직원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승강기 내부에 있는 10층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뭔가 공명음 비슷한 소리가 나며 승강기가 작동했다.
“.......”
개느린데?
계단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빠를 듯했다.
어쨌거나 한참을 느릿느릿 올라간 끝에 10층에 도달했다. 10층은 특이하게도 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와 장치가 즐비한 것을 보니 연구실로 쓰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한 중년의 남성이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분주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직원의 부름이 들리지 않은 모양인지,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직원이 한층 더 소리높여 불렀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음? 아, 잠시만 기다리시게.”
사장은 뒤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사장님이 외골수적인 면이 좀 있으셔서... 잠시만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어려운 일은 아니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저 사람이 그라텔라겠지? 듣기로는 마법 공학의 대가라고 하던데, 대체 뭘 만들고 있을지 제법 흥미가 동했다. 물론 그가 만든 승강기는 개느렸지만.
‘.......’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성이군!”
그는 방금 만든 듯한 길쭉한 원통 형태의 도구를 한쪽 어깨에 얹고는, 연구실의 벽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모종의 조작을 하자, 원통에서 불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무언가가 발사됐다.
─쾅!!
벽면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알라의 요술봉인가?
그의 발명품은 대전차로켓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위력은 하급 마법보다 조금 약한 정도?
“으하하! 이 정도면 일회용 공성 병기로 수요가 있겠어.”
자기 연구실을 때려 부수고 웃어젖히는 모습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그것과 같았다.
“......음? 아, 그래. 손님이 오셨었지.”
그는 갓 발명한 물건을 바닥에 휙! 내동댕이치고 나에게 다가오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라텔라라고 하네. 그라텔라 그라텔라.”
과연, 미치광이 과학자 타입답게 특이한 인사 방식이군. 이럴 땐 상대방을 따라 하면 반은 간다.
“저는 엘입니다. 엘 엘.”
“오, 자네도 성과 이름이 같군?”
“.......”
젠장.
이 사람은 단순히 이름도 그라텔라, 성도 그라텔라였을 뿐이었다.
“아... 저는 평민입니다.”
“음? 그럼 왜 소개를 그렇게 한 건가? 조금 특이한 친구로군? 으하하!”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소개는 이쯤 하면 됐고,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온 건가?”
“제가 고대의 마법서를 처분하고 있는데, 혹시 매입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고대의 마법이니 등급은 없을 테고... 계열은 무엇인가?”
“전격 계열입니다.”
역시 수많은 마법 공방 체인을 거느리고 있는 사장은 달랐다. 그는 고대의 마법에 등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격이라... 그렇다면 조금 까다로울 수도 있겠군. 혹시 내가 마법서를 잠시 살펴봐도 괜찮겠나?”
“그러시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물건을 판매하려면 당연히 보여줘야 하니까.
내가 품에서 마법서를 꺼내 건네자, 그는 그것을 조심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낀 뒤, 세심한 손길로 책장을 넘기며 살폈다.
“이건... 아무래도 신화시대 초기나 중기쯤에 만들어진 마법서 같군.”
그는 미간을 좁히며 그런 분석을 내놓았다.
“네? 제작 시기에 관한 내용은 쓰여있지 않던데요.”
“장담할 수는 없네만, 이렇게 극단적인 형태의 마법이라면 그 시기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네. 오래된 마법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지거든.”
“오, 그렇군요.”
확실히 무식하게 극단적인 마법이긴 하지.
모든 마나를 쥐어 짜내서 한 점을 공격하니까.
“흠흠, 그래서 어떠십니까? 이 마법에 흥미가 있으십니까?”
“흥미야 차고 넘치네만, 내가 구입할 수는 없겠군. 이건 구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걸세.”
“......예? 어째서죠?”
기운 빠지는 소리에, 나는 따지듯 되물었다.
“이 마법이 신화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게 맞다면, 전격 속성이 쿼드러플 이상인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네. 안 그래도 희귀한 속성인데 쿼드러플까지 갖춘 자는 극히 드물지. 황색 마탑이라면 모를까.”
“아... 그럼 결국 황색 마탑으로 가야겠네요. 거긴 너무 멀어서 여기로 와본 건데.”
뭐야. 왕국의 수도도 별거 없잖아?
나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추욱 늘어져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라텔라가 슬쩍 입을 열었다.
“내가 수도에 사는 전격 속성 쿼드러플을 한 명 알고 있다네. 원한다면 소개시켜 줄 수 있긴 하네만....”
“오오, 정말이십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속성은 타고나기도 힘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속성을 낱낱이 공개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런데 그자가 조금 특이해서 말이야.”
“상관없습니다. 저도 특이하니까요.”
“으하하! 좋아. 그렇다면 내가 추천서를 작성해주지.”
그라텔라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듯이 써서 내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왕립 아카데미의 정령학 교수 아스왈드를 찾아가 보게나.”
“......정령? 마법사가 아닌 겁니까?”
“마법사인데 정령술사이기도 하지. 물론 마법과 정령은 엄연히 다른 분야이지만, 그는 둘 다 다루는 것이 가능해. 엘프거든.”
엘프라고?
지금껏 소문만 들어봤지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노예로 거래되기도 한다던데, 그런 건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성자 임명식 이후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군.
***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세르시아교의 본단을 찾아왔다.
임명식은 정오에 거행한다고 하는데, 사전에 옷도 갈아입고 이것저것 준비할 게 조금 있으니 일찍 오라고 한 탓이다.
‘오... 본단이라고 해서 커다란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세르시아교의 본단은 자그마한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러 개의 건물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회랑으로 이어진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전에는 당연하게도 웅장한 세르시아 석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귀족 몇 명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외부인사가 참관한다더니... 귀족을 말하는 거였군.’
하긴. 누구나 자유롭게 참관할 수 있게 한다면 저 신전에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본단을 구경하던 중, 사제로 보이는 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린 초상화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성자 후보이신 엘 님 되십니까?”
“예.”
“아, 맞으셨군요. 저는 오늘 임명식의 준비를 도와드릴 사제, 알렉스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대기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공손히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나를 가까이에 있는 어떤 건물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길쭉한 전신 거울과 잘 개어져 있는 새하얀 법복이 놓여 있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겠습니다. 양팔을 벌리고 서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임명식에는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가야 한다고 한다. 솔직히 마법사인 나에게 무장해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지마는,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 순순히 따랐다.
그는 내 시중을 드는 와중에 임명식에 관해 설명해줬다.
“성사가 시작되면 세르시아 님의 석상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계셔야 합니다. 고개는 교황님께서 성수를 얼굴에 뿌려주실 때 잠깐 들어주시면 됩니다.”
“예, 뭐. 간단하네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무릎 꿇고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 저린다.
“임명식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은 성자의 출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임명식이 끝나고 참관인들과의 연회가 더욱 중요─”
─벌컥!
돌연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백발이 무성한 성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성직자 뒤에는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는데, 둘 다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한 명은 기사로 보였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기사는 저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는 느낌.
다른 한 명은 귀족 같았는데, 약간 교활해 보이는 인상을 가졌고, 진짜로 말도 못 할 만큼 사치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 중 하나만 팔아도 웬만한 사람은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듯했다.
내 시중을 들고 있던 사제가 백발의 성직자를 향해 의아한 듯 물었다.
“헤이든 대주교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분들께서 잠시 성자 후보를 보자고 하신다. 조용히 얘기하고 싶으시다니, 너는 잠시 나가 있거라.”
대주교라 불린 성직자는 뒤편에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를 흘끗 쳐다보고 그리 말했다.
사제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대주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외부인은 성자 대기실의 출입이 불가합니다. 성자 후보께 볼일이 있으시다면, 임명식 이후에 연회에서─”
“알렉스 사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발을 하는가! 이분이 누구신지 몰라?”
대주교는 시뻘게진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이분은 장차 엘디니아 왕국의 왕이 되실 제 1왕자,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 님이시다!”
......뭐? 왕이 될 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