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디니아 (3)
머리에 물망초를 꽂고 있는 여자의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방금 신을 안 믿는다고 하신─”
“와악! 무슨 그런 불경한 소릴 하십니까?”
나는 서둘러서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방금 저보고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흠흠, 그건 그쪽이 뭔가 이교도 같은 건 줄 알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 세르시아 교단에서 나오셨으면 그렇다고 진작 말씀을 하셔야지. 소개도 없이 다짜고짜 신을 믿냐고 물어보시면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망토에 가려져 있던 세르시아 교단의 증표를 슬쩍 드러내서 만지작거렸다. 일전에 고대의 던전에서 치료 사제 엘미나를 구해주고 받은 거다.
“그 브로치는....”
그녀는 역시 세르시아 교단의 관계자답게 바로 이것을 알아보는 듯했다.
“본 교단의 은인이라는 증표네요.”
“아, 제가 비록 교인은 아니지만 교단과 나름대로 가까운 관계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세르시아 님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고요.”
“섬기지는 않지만 존재는 믿는다라... 확실히 일반적인 형태의 믿음은 아니네요.”
“형태야 어찌 됐든 믿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제 믿음의 크기는 교단의 대주교나 성녀님 못지않을 겁니다. 아하하.”
나는 나를 한껏 과대 포장했지만, 실제로 믿음이 솟구치고 있기도 했다.
세르시아가 교단 차원에서 나를 대접하라고 신탁을 내렸다니?
왜 그런 신탁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호구 같은 신이 아니라, 자애로운 신이 분명하다.
“저 못지않은 믿음을 품고 계신다구요?”
“아니요, 그쪽이 아니라 대주교 못지않...... 설마 대주교셨습니까??”
“성녀입니다.”
“.......”
진짜?
성녀라고?
성녀가 왜 머리에 꽃이나 꽂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아, 그... 제가 실언을 좀... 아하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제가 정말 성녀님만큼 믿음이 굳건하겠습니까? 저는 비교도 안 되죠, 예.”
솔직히 나도 세르시아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기 때문에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지만, 그냥 꼬리를 내렸다.
변방에 있는 지부의 치료 사제 엘미나조차 상당한 광신도일진대, 성녀는 그 이상일 게 분명했다. 광신도에게 믿음으로 배틀을 붙자고 하는 것은, 필시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경쟁이 아니니까요.”
“오오....”
내가 너무 섣불리 단정 지었군. 성녀는 내 예상과는 달리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자신의 신앙을 불필요하게 과시하고, 남들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패한 성직자뿐이랍니다. 물론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은... 아직 성직자가 아니시니.”
나를 두고 하는 소리가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잠깐.
“예? 제가 아직 성직자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십니까? 저는 지금도, 나중에도 성직자가 아닌데요.”
묘한 뉘앙스가 느껴져 그렇게 물었더니, 성녀는 머리에 꽂혀있는 물망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신탁을 받은 남자, 엘. 본 교단에서는 당신을 명예 성자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
“임명식은 이틀 뒤, 교단에 있는 신전에서 거행됩니다. 교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외부인사도 참관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신변 안전에 주의하시고─”
“아니아니, 잠깐. 잠깐!!”
내가 고개와 손바닥을 동시에 격렬하게 흔들며 말을 중단시키자, 성녀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시죠?”
“왜 그러긴 뭘 왜 그래요? 저는 성자인지 뭔지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아니, 그보다... 저를 못 만나셨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미리 다 계획을 세워두신 겁니까?”
어이없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성자라는 직위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내 의사는 묻지도 않았으며,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벌써 임명식의 준비를 끝내놓았다는 사실이 몹시 기가 막혔다.
게다가 나를 이 시장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이틀 뒤의 임명식은 ‘성자 없는 성자 임명식’이 되었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어제 신탁을 받았다고. 신탁을 통해 당신이 수도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외지인은 보통 수도에 오면 시장을 먼저 찾으니,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린 거랍니다.”
이 여자... 의외로 두뇌파였군.
“흐음.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제 의사는 안 물어보십니까? 제가 성자가 되기 싫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
“......네? 그, 그게 무슨...?”
대화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성녀가 말을 더듬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다, 당신은 신탁을 받았잖아요? 저도 당신을 교단과 엮으라는 신탁을 받았구요.”
“......? 그래서요?”
“그, 그래서라니요. 신의 뜻이 내려왔으니, 저희는 그것을 따르는 게 당연한....”
아. 왜 혼란스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무려 성녀다.
아마 모든 세르시아 교도 중에서도 가장 신실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신의 뜻을 거스른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아예 상상도 못 하는 거다.
신탁을 받았으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 그런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서, 거절을 고민하는 지금 내 행동은 사뭇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성자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어쨌거나 성자가 되면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세르시아가 나를 잘 대접하라고 했다지 않은가? 설마 이상한 자리를 주지는 않겠지.
“아니, 꼭 거절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진정하시고... 성자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적어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결정하죠.”
나는 눈동자가 고장 난 듯 흔들리고 있는 성녀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네? 아, 제가 잠시 추태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는, 재차 머리에 있는 물망초를 만지작거렸다.
물망초가 그녀의 심리적 안정제인 모양인지, 그녀는 곧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래 성자는 성녀인 저와 동일한 의무가 주어집니다. 신전에 머물며 신의 뜻을 전언하는 역할이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당신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 저는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정식 성자가 아닌 명예 성자니까요. 자유롭게 행동하시다가 신탁을 받으셨을 때만 교단에 알려주시면 됩니다. 다만 의무가 줄어드는 만큼, 받으시는 혜택도 줄어들겠죠.”
의무가 적으면 혜택도 적다라.
뭐, 당연한 거겠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푸짐한 보상만 바라는, 그런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신탁을 받은 것도 뭣도 아니다. 그냥 남의 꿈속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세르시아를 만나서 대화나 좀 나눴을 뿐. 내게도 ‘정식’보다는 ‘명예’ 성자가 부담이 덜했다.
“그럼... 크흠. 그 혜택이라는 건 뭡니까?”
그래도 어쨌거나 혜택이 조금이나마 있다고는 하니, 나는 내심 기대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모든 신도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죠.”
“.......”
거절하는 쪽으로 마음이 단숨에 기울었다.
“그리고 본 교단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엘디니아 왕국에는 저희를 배척하는 곳이 없으니, 전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신분 상승이라는 건가? 이건 괜찮은데?
“그 외의 혜택이나 권한은 아직 설정 중에 있습니다. 실제로 명예 성자를 임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그래도 임명식 때까지는 설정이 끝날 거예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이제 대답을 해주시겠어요?”
“......대답?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이틀 후 임명식 때 뵙겠습니다.”
***
왕좌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호화로운 의자.
그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1왕자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는, 강철 기사단장이 가져온 소식을 전해 듣고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성자 임명식이라고?”
“그렇습니다, 왕자님. 이틀 뒤에 세르시아 교단의 신전에서 거행한다고 합니다.”
“성자라면 신탁을 받았다는 뜻인데... 성녀 이외에도 그런 게 가능한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왕국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은 거의 다 꿰고 있는 그였지만, 성자의 출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성자로 지목된 자는 누구라고 하던가? 할 일 없이 기도질이나 일삼는 귀족가의 자제인가?”
“성이 없는 모험가라고 합니다.”
“......평민? 하!”
1왕자 알베르트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 치며 이죽거렸다.
“역시 종교가 좋긴 좋군? 열심히 믿기만 하면 근본 없는 천출도 요직에 다 앉을 수 있고 말이야. 성녀와 동급이라면 휘두를 수 있는 권한도 작지 않을 텐데.”
“명예 성자라고 하니, 성녀와 동등하진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도 평민에겐 과분한 자리다.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돼. 그래야 오래 사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단장?”
왕자가 그리 묻자, 기사단장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임명식은 참관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세르시아 교단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셔야 후계자 싸움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도 세르시아 교단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왕국의 통치자가 바뀔지언정, 수많은 신도들이 믿는 신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르시아 교단의 권세를 등에 업으면, 평민과 하위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2왕자를 밀어내고 1왕자 알베르트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프란츠는? 그놈도 임명식에 가나?”
“2왕자께서도 참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 그래. 내가 너무 뻔한 걸 물었군. 평민이라면 좋아 죽는 녀석인데, 빠질 리가 있나.”
1왕자의 얼굴에 경멸이 서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고한 왕족의 신분으로 미천한 평민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깎아 먹는 행동일 뿐이었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프란츠가 어쩌든 간에 나도 참관하는 게 좋겠군. 성자로 지목된 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세르시아 교단을 내 뜻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교황도 아니고 고작 명예 성자를 회유한다고 해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기사단장이 아연한 얼굴로 묻자, 왕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교황은 노쇠한 꼭두각시일 뿐, 진정으로 교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신탁이다. 신탁이 내려오면 교황도 성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지. 그런데 이제 성녀 이외에도 신탁을 받는 자가 나타났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왕자님께 무슨 도움이...?”
단장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 이러면 어떨까? 명예 성자가 교황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세르시아 님께서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인 1왕자 알베르트를 지지하라고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라고.”
“거, 거짓 신탁을 발표하게 한다는 말이십니까?”
1왕자는 경악한 기사단장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렸다.
“크크... 그래,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천출이니 재물을 어느 정도 쥐여주면 홀딱 넘어오겠지. 모험가라고 했었나? 그렇다면 수십 골드만 줘도 내 발바닥까지 핥으려 들겠군.”
“하, 하지만 성녀가 건재하잖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거짓 신탁이었다는 게 분명히 들통날 것입니다.”
“상관없다. 진상이 밝혀질 즈음에 나는 이미 왕세자가 되어있을 테니. 책봉된 후 즉시 프란츠를 숙청해두면 아버님께도 별다른 대안이 없겠지. 안 그런가?”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동생을 죽이겠다는 말을 툭 내뱉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거짓 신탁에 대한 신의 노여움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신의 노여움? 그걸 왜 내가 걱정해야 하지? 신을 사칭한 건 명예 성자인데. 신의 분노는 내가 아니라 그놈이 받게 될 것이다.”
뒷일은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명예 성자를 구워삶기만 하면 될 뿐.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하고 대척점에 서려고 하지는 않겠지. 나는 왕이 될 남자니까 말이야.”
1왕자는 음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