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25화 (125/200)

엘디니아 (2)

앨리스와 함께 성문을 지나쳐 수도로 들어가자마자 무수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휙! 휙!

“......? 뭐, 뭐야.”

수도 초입에 어슬렁거리는 남성들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남성들이었는데, 어찌나 정열적으로 쳐다보는지 몸에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나는 그 불쾌하고 끈적한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은연중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이 새끼들... 설마? 나한테 이상한 짓을 시도하면, 아니 그런 마음만 품었어도 죽여 버리겠어...!’

진짜로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윽고 그 음습한 시선을 보내던 자들 중 몇 사람이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냐, 어디 한번 와봐라. 죽여주마!

“행색이 모험가 같으신데... 수도는 처음이시오?”

“관광하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탈 것이 필요하시겠군요?”

“수도를 구경하기에 인력거만 한 것이 없습니다요. 느긋하게 명소를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중간중간 내려서 구경할 수도 있지요.”

아, 뭐야. 그런 거였나.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이들은, 내 걱정과는 달리 인력거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편에 인력거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고, 이들은 수도에 입장하는 사람 중 손님이 될 만한 자를 물색하고 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어필했다.

“인력거는 마차 따위가 갈 수 없는 좁은 골목도 들어갈 수 있다오. 어떻소? 내가 싸게 해드리지.”

“제 인력거는 최근에 새롭게 손을 봐서 아주 깨끗합니다. 깨끗한 인력거를 깨끗한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저는 수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입니다요. 인력거만 끄는 게 아니라 친절한 안내까지 해드릴─”

“장담하는데 제가 제일 쌉니다! 저를─”

인력거라.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그들의 호객 행위를 들으며, 누굴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가격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고작 인력거에 쓰는 몇 푼이 아쉬운 사람도 아니고, 다들 자기가 제일 싸다고 주장하지만 솔직히 다 거기서 거기다.

“흐음... 그쪽 분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른 인력거꾼은 수도 토박이.

역시 관광 가이드는 토박이에게 받아야지.

“아이구!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굽실거리며 우리를 인력거가 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인력거는 모난 구석 없이 평범했다. 마차처럼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두 명이 충분히 앉을만한 크기의 의자에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었고, 나름대로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지붕도 있었다.

“늘 위험한 몬스터를 퇴치해주시는 모험가 부부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 올라타시지요.”

부부? 완전히 헛다리 짚었지만 굳이 소리 내어 부정하진 않았다. 저 사람도 그냥 상투적으로 말했을 뿐이지, 우리의 관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테니까.

“어디부터 모실까요?”

앨리스와 함께 인력거에 올라타자, 그가 천천히 끌기 시작하며 물었다.

“음,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어?”

“시장! 수도의 시장은 끝도 안 보인대!”

“그래? 그러자 그럼. 시장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요!”

그는 쾌활하게 대답하고는, 힘차게 달려 나갔다.

과연. 인력거는 관광에 특화된 운송 수단이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주변을 구경하기에 적합했기에, 나와 앨리스는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엘디니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꾸려진 도시였다. 마차를 위한 도로와 행인을 위한 도보가 따로 나뉘어 있었고, 2인 1조의 무장 병사가 수시로 돌아다니며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왕성이 있는 수도라서 그런지, 귀족으로 추정되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간혹 우리와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구경하는 귀족들도 있었는데, 지방 출신의 귀족에게도 수도는 신기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인력거꾼은 열심히 달리는 와중에도 명소가 보일 때마다 우리에게 소개해줬다.

“저기 오른편에 높다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이십니까요?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왕립 아카데미입니다.”

“오오,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휘어질 것 같군요.”

나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아카데미를 자세히 살폈다. 나도 한때는 아카데미 입학을 꿈꿨었다.

내가 처음 이 게임 속에 떨어졌을 때 마법을 배우는 방법을 수소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 후보 중 하나가 동부에 있는 아카데미였는데, 내 오장육부를 전부 팔아치워도 마련할 수 없을 만큼 비싼 등록금 때문에 포기했었다.

그런데 왕립 아카데미라고?

대체 얼마나 비쌀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있는 집 자제분들께서 자기들끼리 모여 하하호호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러워서 살짝 배가 아픈 느낌이다.

“모든 훌륭한 기사와 마법사가 왕립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지만, 왕립 아카데미 출신의 모든 기사와 마법사는 훌륭하다는 말이 있습죠.”

“흠? 그다지 와닿는 말은 아니네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 정도로 돈을 받아먹었으면 고블린이라 할지라도 대마법사로 만들어줘야 함이 옳을 것이다.

“아유, 직접 만나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생도 중에서도 고학년은 트롤을 잡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요.”

“트롤...? 그거 별거 아닌데?”

“하하하, 젊은 아가씨께서 농담도 참.”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인력거꾼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시원하게 웃어젖혔는데, 앨리스는 진심으로 한 말이다. 실제로 트롤 따위는 그녀에게 상대도 안 되니까.

어쨌거나 왕립 아카데미의 졸업생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현역 생도는 썩 대단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수도 주변에도 트롤이 있습니까? 저는 수도까지 오는 동안 몬스터를 한 마리도 못 본 것 같은데요.”

“아, 몬스터 서식 구역이 별도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구역을 벗어난 몬스터는 왕실의 병사나 모험가분들이 처리하시지요.”

“와....”

몬스터라고 해서 완전히 백해무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몬스터에게서 발생한 부산물은 마법이나 연금술의 연구재료로 쓰이며, 각종 무구와 도구 제작에도 사용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민간인에게는 해롭기만 한 존재. 그러니 특정 구역으로 몰아넣어서, 민간인 보호와 재료 수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모양이었다.

“왕이 있는 곳은 다르긴 다르구나.”

***

이곳저곳에 즐비한 명소들을 안내받으며 구경하길 한참. 우리는 목표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엘디니아에서 가장 큰 동부 시장입니다요.”

“마, 맛있는 냄새....”

“오호, 진짜 소문대로 끝이 안 보이... 야야, 나한테 침 흘리지 마!”

시장은 소문대로 끝이 안 보였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상점과 노점. 그리고 시장 초입에는 손님을 유인하기 위해서인지 특별히 냄새가 좋은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는데, 앨리스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유효한 마케팅 전략인 듯했다.

“저기 엘. 나 저거 먹어도 되니?”

“안될 거 없지. 돈 줄 테니까 가서 사─”

“괜찮아! 나 돈 있어!”

앨리스는 그리 말하며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꼬치구이를 세 개 사 들고 왔다.

그리고는 내게 한 개를 내밀었다.

“자, 먹어. 아저씨두 하나 먹어.”

“이야, 모험가 일로 돈 벌더니 내 것도 사 온 거야? 배는 별로 안 고프지만... 이건 안 먹을 수가 없겠군.”

“아이구, 잘 먹겠습니다요.”

우리는 각자 꼬치를 하나씩 입에 물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장에는 옷가지나 생활용품 같은 일상적인 물건부터 시작해서, 마법 공학이 적용된 기상천외한 물건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인력거꾼은 우리가 어떤 물품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눈치껏 인력거를 세워줬기에, 보다 수월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던 중, 나는 어떤 노점상 앞에서 인력거를 멈춰 세웠다. 그곳에는 풍선처럼 생긴 커다란 주머니가 있었는데, ‘흡입 한 번에 1실버’라고 적혀있었다.

설마 해피 벌룬인가?

나는 주인장을 향해 물었다.

“이 빵빵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뭡니까?”

“예, 손님. 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수도의 공기는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왕국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장소의 공기를 담았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안 들어있다는 소리 아닌가?

“......공기요? 어디 공기길래 한 번 마시는 데에 1실버나 합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손님. 무려 케른헴입니다! 버려진 도시답게 범죄가 들끓는 미개한 곳이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곳이기도 하죠. 운송비까지 생각하면 1실버는 결코 비싼 금액이...... 손님? 어디 가세요, 손님!”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인력거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머지않아 훨씬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다.

한쪽 다리가 잘려 목발을 짚고 있는 사내가 금화를 팔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화폐인 금화를 판다는 것도 이상한데,

금화를 파는 액수는 더욱 이상했다.

“금화 한 닢을 금화 두 닢에 팝니다.”

봉이 김선달도 이걸 보면 고개를 내저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돈 복사를 시도하는 이 남자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인력거에서 폴짝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1골드를 2골드에 파신다고요?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주조된 금화입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다른 금화와 같습니다.”

이럴 수가.

어떻게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가 있지?

이 남자의 다리가 왜 잘려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두 닢에 파시죠?”

“이 금화는 무려 왕국의 2왕자이신 프란츠 폰 하츠펠트 님께서 저를 가엾게 여겨 적선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게 이유가 되나?

눈앞의 사내는 감격스럽다는 듯 말했으나 나는 2왕자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겠고, 또 그게 금화 두 닢을 받을만한 타당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뭐, 얼마에 팔든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쨌거나 그의 돈 복사는 실패할 게 뻔해 보였다. 그에게서 관심을 끄고 인력거에 다시 올라타려 할 때였다.

“그게 사실이오?”

“정말 2왕자님께서 하사하신 금화란 말입니까?”

놀랍게도, 있었다.

금화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발의 사내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네, 사실입니다. 제가 어제 이 시장에서 왕자님께 직접 받은 금화입니다.”

“그, 그렇다면 내가 사겠소. 왕자님의 자비심이 담긴 금화라니... 집안에 가보로 모셔둬야겠어.”

“아니, 내게 팔아라. 나는 3골드를 주겠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건가?

심지어 3골드를 제시한 사람은 귀족으로 보였다. 귀족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저러니, 어쩌면 저들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싹틀 정도였다.

“......진짜 당황스러운 동네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 공기를 파는 것도 그렇고 저 금화도 그렇고, 이 시장은 상당히 황당한 장소였다.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2왕자라서 그래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뭔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은빛 머리카락은 고결한 느낌을 주었으나, 표정은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 미묘했다.

“2왕자님은 약자를 배려하시는 그 다정한 성품 덕에, 평민과 하위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계시거든요.”

그녀는 목발의 사내에게서 금화를 구입하기 위해 몰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턱짓했다.

“저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니, 왕자님이 소지했던 금화를 얻기 위해 웃돈을 얹어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

얼핏 듣기에는 그럴싸한 것 같기도 했지만,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저 목발의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면 어쩌려고?

그리고 이 여자는 머리에 물망초를 꽂고 있었는데, 머리에 꽃을 꽂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뢰도가 급감했다.

“아, 예예. 그렇군요.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건성건성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잠깐. 잠시만요.”

“......?”

내가 인력거를 향해 걸어가자, 그녀가 나를 따라오며 불러세웠다.

“당신, 신을 믿나요?”

뭐야, 사이비 종교를 설파하는 여자였나?

내 경험상 길거리에서 만나 다짜고짜 신을 믿냐는 둥, 도를 아시느냐는 둥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이비다.

“아니요. 그런 거 안 믿으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나는 칼같이 대답했다. 원래 이런 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신을 안 믿는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긴 뭐가 없어? 아니, 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관심 없다니까.”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추고는, 이리저리 내 얼굴을 뜯어 살폈다.

“......분명히 이 얼굴이 맞는데?”

“뭐야, 저를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십니까? 아무튼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종교에는 관심이 전혀─”

“당신, 엘 아닌가요? 어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수도에 찾아오는 엘이라는 남자를 교단 차원에서 잘 대접하라는 신탁이.”

“─정확히 보셨습니다. 제가 바로 그 엘입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굳건하게 세르시아 님의 존재를 믿는 남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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