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디니아 (1)
밀러 백작령을 떠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달그락달그락
나의 갑작스러운 야반도주에 레이첼과 밀러 백작이 일말의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진짜로 배신감을 느낀 건 나였다.
“밀러 백작... 당신마저....”
그나마 정상적이라고 느껴졌던 밀러 백작마저 알고 보니 레이첼과 한통속이었다. 나에게 집요하게 영주 자리를 권한 것은 날 붙잡아두기 위한 레이첼의 오더였단 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런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으으, 무서운 사람들이란 말이지....”
물론 나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든든한 아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내가 여유로운 상황, 그러니까 ‘국왕 시해자’ 같은 메인 퀘스트를 끝내서 딱히 할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흔쾌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눌러앉아서 가끔 전쟁이 나면 도와주고, 탱자탱자 놀고먹는 삶.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결국 왕을 죽여야 하는 운명. 이건 운명론자 레이첼이 자기 편할 대로 갖다 붙이는 그런 가벼운 운명이 아니다. 순도 100%짜리 ‘진짜 운명’. 심지어 내가 선택한 거다.
그런 내가 그곳에 정착하고 왕을 죽이면, 밀러 백작가는 반역에 가담했다고 몰릴 수도 있다. 괜찮은 사람들인데, 괜히 나 때문에 본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역적 집안으로 몰려서야 되겠는가?
그런고로, 도주는 옳았다고 할 수 있겠다.
“뭐, 짤막하게 편지도 남기고 왔으니 괜찮겠지. 영원히 안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마법 관련으로 급한 일이 생겨서 피치 못하게 서둘러 떠난다고 편지를 남기고 왔다. 레이첼도 마법사니까 어련히 이해해 주지 않을까.
역시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있으니, 앨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자꾸 하는 거니? 혹시 어디 아파? 정신이 아프니?”
“......어쭈? 우리 앨리스, 요즘 좀 건방져진 것 같네? 내 착각인가?”
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
“기강 한번 잡아줘야 내가 누군지 기억나겠어? 어!!”
“그, 그게 아니라 거, 걱정돼서... 헤헤.”
앨리스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이 세상에는 내가 여포처럼 행세 할 수 있는 사람이 딱 둘 있는데, 그건 앨리스와 도린 형제다.
나는 검지와 중지손가락으로 내 두 눈을 가리킨 뒤, 앨리스의 두 눈을 가리켰다.
“내가 계속 지켜보겠어.”
“으, 응....”
까닭 없이 앨리스의 기를 죽이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고, 모험가 일을 시작한 뒤로 앨리스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기에 기강을 잡은 것이다.
갑작스럽게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되면, 자칫 거만하고 오만해지기 쉽다. 실제로 모험가 중에서는 그녀와 감히 비벼볼 만한 사람이 없다. 모험가들의 무한한 찬양을 받다 보니 콧대가 조금 높아진 모양인데, 그건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한테까지 그러도록 두면 안 되지.
군대에서도 선임이 후임한테 먹히지 않으려면 이따금씩 자기가 누군지 상기시켜줘야 하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한 이치다.
“저, 저기 엘. 그럼 우리는 황색 마탑인가 하는 그곳으로 바로 가는 거니?”
기강이 성공적으로 잡힌 모양인지, 앨리스가 조금은 예절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럴 생각인데, 왜?”
“내가 모험가들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왕국의 수도라는 곳은 엄청엄청 크고 멋지다는 거 있지?”
“수도? 엘디니아?”
내가 있는 이곳은 엘디니아 왕국.
그리고 왕국 수도의 이름도 엘디니아다.
“응. 무, 물론 거기에 가보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구... 그, 그냥 그렇다구.”
누가 봐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가보고 싶어? 그럼 한번 가볼까?”
“정말?! 정말이니?”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왕국 서부에 있는 황색 마탑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밀러 백작령을 떠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아직도 중부에 있었다.
어차피 가다 보면 수도 근처를 지나야 하니, 한 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앨리스를 위해 이 정도도 못 해줄 건 없고, 나 역시 수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신난다! 고마워! 사실 가보고 싶었어!”
앨리스는 두 손을 치켜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마차에 달린 쪽창을 열고 마부를 향해 말했다.
“마부님, 수도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죠?”
“하루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요.”
“그럼 거기로 가주세요.”
***
왕국의 수도 엘디니아.
그곳에 자리한 세르시아교의 본단.
장엄한 회당 안에 모인 주교급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의 시선은, 길쭉한 테이블 끝에 앉아있는 한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성녀님, 그것이 정녕 사실입니까?”
“......사실이에요. 케른헴의 앨미나 사제가 보고하신 대로, 엘이라는 분은 신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웅성웅성. 성녀의 대답에 장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 하지만 그는 본디 교인이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 교인이 아닌 자가 신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십니까.”
“어젯밤 제 꿈속으로 세르시아 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외람되지만 제가 감히 여쭈어본 사안이에요. 세르시아 님께서는 꿈에서 그분을 만나신 적이 있고, 또한 당신의 힘을 허락했다고 하셨습니다.”
“호오....”
“허.”
탄성과 탄식이 교차했다.
대부분은 교인이 아닌 자가 신탁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탄했으나, 일부 성직자는 그것이 못내 못마땅한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특히 백발이 무성한 대주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저희처럼 신실한 자들을 놔두고 왜 하필 외부인에게 은총을 베푸셨는지....”
당신이 신실함을 운운해? 성녀의 얼굴에 잠시 환멸이 스쳤으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감추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 역시 신탁을 받았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르시아 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분은... 흥미로운 인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단 차원에서 그분과 연을 맺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성녀가 전언하자, 방금 실실함을 언급했던 백발의 대주교가 다시 한번 딴지를 걸었다.
“흥미로운 인간...? 어째서 신께서 특정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셨다는 말이요?”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신의 의중을 헤아리겠어요.”
“허! 연유를 물어보셨으면 됐을 터인데...? 성녀께서는 정말 신탁을 받으신 게 맞소이까?”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대주교의 질문에는 가시가 숨어있었다.
신탁을 빙자해 네 뜻대로 교단을 휘두르려는 게 아니냐? 라는 가시가 담겨있었고, 성녀는 그 숨은 의도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답했다.
“저는 신의 뜻에 의문을 품을 자격이 없답니다. 그저 그분의 의지를 여러분께 전달해 드릴 뿐이죠. 그게 성녀의 역할 아닌가요, 헤이든 대주교님?”
“.......”
헤이든 대주교라 불린 자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회당에 잠시 침묵이 맴돌자, 성녀의 반대편 끝에 앉아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교황이었다.
“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라야지. 성녀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교단의 최고위 성직자는 교황이지만, 희망의 여신 세르시아를 직접 만나고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성녀뿐이다.
그렇기에 신탁이 내려온 경우에 한해서는, 성녀의 의견이 교황의 의견보다 우선시된다.
“엘이라는 분과 연을 맺어두라고 하셨으니...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성자의 칭호를 부여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무슨! 외부인을 성자로 임명하자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요? 교황 성하, 차라리 선물을 주시거나 권한이 적은 명예직을 부여하시지요.”
대주교가 펄펄 뛰며 성녀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녀는 작게 후-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질문했다.
“헤이든 대주교님. 성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 지금 성녀가 그걸 묻는 거요? 그래, 잘 모르신다면 알려드리지요. 성녀란 신탁을 받는 여자를 뜻합니다.”
“그럼 신탁을 받는 남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그건....”
자가당착에 빠진 대주교가 쩔쩔매고 있자, 보다 못한 교황이 중재에 나섰다.
“그만들 하시오. 성녀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탁을 받는 자라면 성자라고 볼 수 있소.”
“.......”
“하지만 대주교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외부인은 성자로 임명해도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할 터. 그래서 내 생각에는 정식 성자가 아닌, 명예 성자로 하면 어떨까 싶소만.”
교황은 그리 말하며 성녀를 바라봤다.
신탁에 관련된 일이었으므로 그녀의 동의가 필요했다.
“......네.”
성녀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동의했다.
“좋소. 그럼 명예 성자의 칭호를 부여하기로 하지. 바로 케른헴으로 사람을 보내서 그를 모셔오도록 하시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황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분은 지금 수도를 향해 오고 계시거든요.”
***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 엘디니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미쳤다 미쳤어.”
“정말, 미쳤다 미쳤어.”
단연코 압도적인 규모. 아직 거리가 조금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고, 높다란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내부는 보이지도 않았다.
“내전이 일어날지언정 외부의 공격에는 함락당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도시라더니... 진짜 그래 보이네. 결계 색깔도 진하고.”
내가 지금껏 가본 도시 중에서 가장 거대했던 곳은 청색 마탑이 있는 도튼이다. 무려 공작이 통치하는 도시였기에 규모가 매우 컸지만, 감히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솔직히 여기에 있는 화장실만 모아도 케른헴보다 훨씬 클 듯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는 가까운 성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검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마차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좀 기다려야겠네. 역시 수도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만.”
“에잇! 빨리 안쪽을 구경하고 싶은데....”
앨리스가 못 참겠다는 듯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두리번거렸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여기서 그래봤자 성벽밖에 안 보인다.
“야야,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얌전히 기다려. 그리고 너... 그렇게 고개 막 내밀면 안 돼. 수도는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거든.”
“무, 뭐야?! 내, 내 코를 왜 베어가니??”
그녀는 황급히 양손으로 자신의 코를 감췄다.
“아니, 진짜로 베인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조심하라 이거지. 너 그렇게 촌티 팍팍 내면 수도 사람들이 등쳐먹으려 들걸?”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가깝다.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은 사기꾼의 타겟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자 돌연 앨리스가 다리를 꼬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사뭇 거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등쳐먹어? 상대를 흔적조차 없이 태워버리는 불의 여왕, 나 앨리스를 말이냐?”
“미, 미친. 진짜 티안브리스인 줄 알았네. 불의 여왕은 또 뭔 소리야?”
“헤헤, 나랑 같이 의뢰를 나갔던 모험가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구. 나도 항상 억울한 마법사나 중부의 메두사 같은 멋진 별명이 갖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지 뭐니.”
내 별명이 멋지다고? 어딜 봐서?
아무튼 앨리스는 모험가들이 아부하기 위해 붙여준 별명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헤실헤실 웃었다.
“......너 대체 모험가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뭐, 어쨌든 방금 같은 태도로 다닌다면 사람들이 등쳐먹지는 못하겠네.”
“흥, 내 태도가 어쨌다는 말이냐?”
“티안브리스 흉내 그만 내라.”
“으, 응....”
그렇게 앨리스와 노닥거리고 있으니, 곧 우리가 검문받을 차례가 되었다.
놀랍게도, 검문은 기사가 진행했다.
“신분패를 제시하시오.”
“아, 예.”
역시 수도라서 기사가 많은 건가? 나와 앨리스는 모험가패를 꺼내 제시했다. 기사는 그것을 꼼꼼히 확인한 뒤,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며 물었다.
“A급 모험가들이셨군. 수도에는 일 때문에 오셨소?”
“아뇨, 그냥 지나가던 길에 잠깐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렀습니다.”
“관광을 목적으로 오셨군? 확실히 수도에는 볼거리가 넘쳐나지. 다만 상인이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민은 마차를 반입할 수 없소. 마차를 이용하려면 수도 내부에서 다시 빌리셔야 하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내리자 앨리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군말 없이 앨리스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순순히 협조해줘서 고맙소.”
“별말씀을.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이제 들어가 봐도 되는 겁니까?”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비켜줬다.
“엘디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