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20화 (120/200)

영지전의 결말 (2)

“......그렇다는데요?”

나는 옆에 서 있는 밀러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뭔가 떠올리려고 하는 듯 잠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브룩스 자작의 처가라면... 서부에 있는 페인 자작가였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군.”

“아,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진실의 마법을 사용해서 알아내겠습니다.”

“진실의 마법...? 그런 마법도 있었나?”

금시초문이라는 듯 묻는 밀러 백작에게 오른손을 들어서 보여줬다.

“이겁니다. 맞으면 진실을 말하게 되죠.”

파지직! 내 손에서 스파크가 일자, 말콤 브룩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 마, 맞습니다. 페인 자작가가 맞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으로 병력을 빌리러 가셨소. 아마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돌아오고 계실 거요!”

“예, 그렇다고 하네요.”

“.......”

밀러 백작은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정말 진실의 마법이로군?”

“네. 궁금한 게 더 있으시다면 편하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내가 말콤을 가리키며 말하자, 밀러 백작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를 향해 질문했다.

“고맙군. 이봐, 자네. 자네의 아버지가 병력을 얼마나 빌렸는지 알고 있나?”

“그, 그건 나도 모릅니다.”

말콤은 삽시간에 내 체면을 구겨버렸다.

“이게? 모르면 다야? 기억나게 해줘? 어!!”

“사, 삼백 명! 최소 삼백 명을 요청하겠다고 출발하기 전에 내게 그러셨었소. 하지만 얼마나 빌려왔는지는 나도 정말 모릅니다.”

역시. 한 번에 똑바로 대답하면 서로가 편한데, 꼭 이렇게 윽박질러야 성의 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최소 삼백이라... 적지 않은 숫자로군. 거기에 용병까지 더해지면 더 늘어날 터인데.”

밀러 백작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내 생각에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내가 참여했던 두 번째 영지전에서 브룩스 자작 측이 데려왔던 병사가 이백 명 정도였었으니까.

“그래서, 브룩스 자작이 어디를 공격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말콤도 그것까지는 모르더군요.”

나는 밀러 백작에게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브룩스 자작이 병사를 얼마나 데려왔는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가 중요했다. 그걸 알아야 자작을 노릴 수 있을 테니까.

“글쎄. 확실하진 않네만, 그 정도 규모라면 내 영지를 공격하지 않을까 싶군.”

“예? 이 도시를 말입니까?”

“그건 아닐세. 도시를 치려면 병력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아야 해. 아마 영지 외곽의 곡창지대를 공격하고, 자작령과 말콤 브룩스의 반환을 위한 협상을 제안할 것으로 보이네만....”

일단 듣기에는 꽤나 그럴싸한 추측 같았다.

“당분간 정찰병의 수를 대폭 늘려야겠어. 나머지 병사들도 언제든 싸움터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항시 준비태세를 갖추게끔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저도 정찰을 돕겠습니다.”

내가 정찰을 자원하자, 밀러 백작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자네가...? 아니야. 자네한테 너무 신세만 지는 것 같군. 이번에도 적의 핵심 인사를 잡아 오고 중요한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자네에게 정찰 따위를 시킬 수는 없지. 나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으나, 나는 밀러 백작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해 행동하는 거지.

“아하하.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산책 삼아서 가볍게 도와드리겠다는 거니, 그렇게 부담을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대신 정찰병들에게 저를 만나면 정찰 상황을 공유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그래야 더욱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요.”

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정찰병이 브룩스 자작을 발견하면 내가 제일 먼저 소식을 듣고 달려가기 위함이다. 남들에게 막타를 뺏길 순 없으니까.

“자, 자네...! 자네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감격했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밀러 백작을 보니 왠지 조금 찜찜한 기분도 들었으나, 어쨌거나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 않은가?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내가 브룩스 자작을 처치하면, 결국 밀러 백작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네의 의지가 그토록 굳건하다면... 좋아, 알겠네! 내 병사에게 단단히 일러두도록 하지. 자네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라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고맙지. 아예 이 기회에 브룩스 가를 멸문시키고,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악연과 전쟁의 마침표를 찍어야겠어.”

***

그로부터 사흘 후.

나는 몹시 언짢은 상태였다.

‘......대체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거지?’

아직까지 브룩스 자작의 행보가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사흘간 틈틈이 밀러 백작령을 순찰하고, 정찰병을 접선해서 뭔가 발견한 게 있는지 물어도 보았지만, 뚜렷한 소득이 없었다.

말콤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병사를 빌리러 떠났던 브룩스 자작은 진작 돌아왔을 것이다. 이미 어디 한 군데를 공격하고도 남을만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움직임이 없는 걸까.

‘설마, 말콤 그 자식이 거짓말을? 다시 가서 족쳐봐?’

그런 생각이 잠시 미쳤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실의 마법을 무수히 맞고도 거짓말을 할 정도로 강인한 놈이라면, 찾아가서 더 족쳐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흐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냥 단순히 도착이 늦어지는 건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병력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이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고, 이미 도착했지만 어딜 어떻게 공격할지 고민하느라 조용한 것일 수도, 또는 내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저절로 윤곽이 드러나겠지.’

내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사냥꾼은 나고, 사냥감은 브룩스 자작이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인 말콤 브룩스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니, 먼저 움직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그럼 다시 정찰이나 나가봐야겠군. 가는 김에 모험가 길드에도 잠깐 들르고.’

앨리스가 혼자 모험가 길드에 있었다.

그녀는 모험가 등록을 완료한 다음 날부터 줄기차게 모험가 길드에 나가고 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모험가 일을 하고 저녁 즈음 돌아와서 마법을 공부하는, 충격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순수하지만 조금 괴팍한 구석도 있기 때문에, 정찰하러 나가는 김에 길드에 들러서 과연 그녀가 모험가 활동을 잘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 생각이다.

나는 바로 여관을 떠나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미 눈이 제법 쌓여서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집중하며 걷다 보니, 머지않아 모험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 앨리스가 있나 싶어 길드 내부를 둘러보던 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엘 씨 아니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만티코어 토벌을 함께했었던, 귀족 출신의 모험가이자 태세전환의 달인 조셉이었다.

“엘 씨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일전에 잡은 포로 때문에 한동안 바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말콤이요? 그건 진작 밀러 백작님에게 넘겼습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앨리스 못 보셨습니까?”

“애, 앨리스 양 말씀이십니까? 아까 남쪽 숲 지대로 트롤을 잡으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의뢰를 수행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트롤을 잡으러 다닌다니.

대견하군.

그리고 돈도 잘 벌어오겠지.

“그렇군요. 앨리스는 잘하고 있나요? 혹시 문제를 일으켰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무, 문제라니,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대, 대단히 성실하고 훌륭한 모험가이십니다. 제가 본 모험가 중에서 최고... 아니, 두 번째로 뛰어나십니다.”

“......?”

왜 이렇게 당황하며 말하는 건데?

하여튼 간에 이 사람도 참 특이하단 말이지.

“어쨌든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 그렇습니다. 하하.”

조셉은 어색하게 웃으며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저... 엘 씨께서는 영주님과 가까운 사이 같던데, 맞습니까?”

“그렇게까지 가까운 건 아닌데 안면이 있긴 하죠. 근데 그건 왜요?”

“아, 제가 어젯밤 하피 토벌의뢰를 수행하다가 녀석을 놓치는 바람에 브룩스 자작령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만, 거기서 의아한 걸 목격해서 말입니다.”

“의아한 거? 그게 뭡니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자, 조셉이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못 보던 차림새의 병사를 봤습니다. 영주님의 병사도 브룩스 자작의 병사도 아닌 듯 보였는데... 혹시 영주님께서 위장을 시킨 병사입니까?”

“......위장이요?”

“예. 은밀한 정찰을 위해 위장시킨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영주님과 가까운 엘 씨라면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 묻는 겁니다. 혹시 영주님의 병사가 아니라면... 당장 신고하러 가야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밀러 백작이 위장시킨 병사는 없었다. 나는 정찰병과 자주 접선하기 때문에, 그들의 복장을 잘 알고 있다.

이건 수상한 냄새가 난다.

“브룩스 자작령의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자작령 기준으로 남쪽부터 동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산맥입니다. 거기서 나무를 패고 있더군요. 저도 도망치는 하피를 쫓느라 정신이 없던 터라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쪽에 숨어있는 건가?

나는 즉시 모험가 길드의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장 가봐야겠네요. 그들은 아군이 아닙니다. 조셉 씨도 밀러 백작성으로 가서,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고 알리세요.”

“예, 알겠습니다.”

브룩스 자작령은 현재 레이첼이 관리하고 있다. 그녀를 찾아가 봐야겠군.

***

브룩스 자작의 임시거처.

“자작님,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호위 기사가 재촉하듯 말했지만, 브룩스 자작은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었다.

“흐음... 어디를 쳐야 밀러 백작이 가장 아파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오백에 달하는 병사와 기사, 그리고 용병까지. 모두가 브룩스 자작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자작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소수의 용병으로 마을을 습격할 뿐, 본격적인 공세는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마을을 습격하는 것조차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간혹 레이첼이나 밀러 백작의 기사가 숨어있는 마을을 습격하게 되면, 오히려 큰 손실만 입고 돌아올 뿐이었다.

“페인 자작가에서 빌려온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날씨는 계속 추워지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면서 말입니다.”

“......머저리 같은 놈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쯧.”

자작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히려 도와주러 온 병사들을 탓하며 혀를 찼다.

“그래도 서두르셔야 합니다, 자작님. 무단으로 주둔지를 이탈해서 땔감을 구해오는 병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군인이 그깟 추위 하나 못 견딘단 말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군. 저런 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내 영지를 되찾고, 말콤을 되찾는단 말인가.”

브룩스 자작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투덜댔으나, 기사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처음 계획대로 밀러 백작령의 남부 곡창지대를 공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곳을 잃는다면 밀러 백작도 순순히 협상에 응할 것입니다.”

“아니야... 요 며칠 사이에 밀러 백작령의 경계가 부쩍 심해지지 않았는가? 정찰병도 늘어났다고 하고.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찢어 죽일 놈이 정보를 누설한 거지?”

아직 이곳으로 공격해오지 않는 걸 보면 주둔지의 위치 정보는 새지 않았지만, 자신이 병사를 빌려왔고, 밀러 백작령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는 유출된 게 분명했다.

미리 방비하고 있는 밀러 백작과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낮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군!”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브룩스 자작은, 돌연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을을 공격하지.”

“......예? 그게 무슨... 마을 습격은 지금껏 계속해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조차 번번이 격퇴당했고요. 오늘 습격을 보냈던 자들도 백작 영애가 지키고 있어서 실패한 채로 돌아왔습니다.”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자작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경도 이해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군? 그 딸년이 마을을 지키고 있으니까 공격하자는 소리야. 전군을 이끌고 말일세.”

“아! 그렇다면 설마....”

“그래, 우리도 레이첼을 붙잡자고. 밀러 백작도 내 아들을 잡아갔으니, 나도 그놈의 딸을 잡아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정보가 유출된 것 때문에, 밀러 백작의 주력은 대부분 밀러 백작령에서 대기하고 있다. 오히려 그 점을 역이용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브룩스 자작령을 치는 것이다.

물론 레이첼이 자작령에 있는 도시로 들어가서 수성을 한다면 붙잡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지금 도시 바깥의 마을을 지키고 있다.

생포하기 딱 좋은 상황.

“크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붙잡히면 내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겠지. 당장 출진을 준비하라 일러라! 나도 함께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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