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마법서 (4)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는, 밀러 백작에게 고개를 숙인 뒤 공손히 말했다.
“백작님, 말씀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수고했네. 그건 이 친구에게 주고 경은 나가보게나.”
“알겠습니다.”
기사는 내 앞에 황금빛 찬란한 마법서를 내려놓고 집무실을 떠났다.
‘누, 눈부셔...!’
물론 실제로 눈부시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상급 마법서라 그런지, 다른 마법서와는 표지부터 달랐다. 전격 속성을 대표하는 금빛에 가까운 황색 표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마법서 –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
일단 이름만 봐서는 전기가 폭발하는 마법 같은데, 보다 자세한 건 마법서를 읽어봐야 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박차고 여관으로 달려가서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기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내가 몸을 들썩거리며 눈앞의 마법서를 쳐다보고 있자, 밀러 백작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아,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듭니다.”
진짜 마음에 들긴 했다. 밀러 백작 역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구하느라 허리가 휘어질 뻔했다네. 하지만 나는 은인에게 반드시 합당한 보상을 하는 사람이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엄청 비싸겠지? 이 마법서의 가격이 궁금했으나, 선물의 가격을 묻는 것은 상당한 결례이므로 묻지 않았다. 백작의 허리가 휘어질 뻔했다고 하니, 아주 비쌀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됐네, 우리 사이에 감사 인사는 무슨.”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은 밀러 백작은 눈치 보듯 한동안 나를 흘끔거리더니,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그... 크흠. 체스터 백작가에서는 어떤 보상을 주던가? 꽤나 큰 전쟁이었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고작 몬스터 몇 마리만 잡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큰 활약을 했을 터인데.”
이 아저씨 의외로 호사가였군.
나는 에드윈에게 받은 검을 검집째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받았습니다.”
“......검?”
밀러 백작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허, 고작 검 한 자루라니. 체스터 백작가에서는 자네의 가치를 몰라주는구먼. 자고로 남자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법이거늘.”
그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지만, 왜인지 입은 웃고 있었다.
어쨌거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했기에, 나는 부연 설명을 했다.
“이게 겉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검이라고 합니다. 불의 신이 직접 제작에 관여했다고 하더군요.”
“무, 뭣? 불의 신이?”
“음... 말로만 설명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네요.”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은 뒤, 마나를 불어넣었다.
─화륵!
별안간 검신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예, 뭐. 이런 겁니다. 오러랑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제 전투 스타일과 잘 어울릴 거라면서 이걸 주셨습니다.”
“그, 그런가? 다, 다행이군. 그쪽 가문에서도 자네의 가치를 잘 알아주는 것 같으니 말이야.”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밀러 백작의 얼굴엔 뭔가 패배감 같은 게 서려 있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기보다 더 값비싼 보상을 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흠흠, 어쨌든 조용히 마법을 공부할 공간이 필요하다면 전에 머물렀던 방을 쓰게. 딸아이가 수시로 관리해서 상태가 좋을 거야.”
“배려는 감사하지만, 여관을 잡아뒀습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여기는 뭐랄까...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은, 그런 느낌이 좀 있다.
“......여관? 상급 마법을 익히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여관에서 장기간 생활하기엔 불편하지 않겠나? 그러지 말고 이곳에 머물지 그래.”
“밖에서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여관 생활이 정 불편해지면 이곳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상급 마법도 한번 읽으면 뚝딱이지.
고대의 마법조차 그랬는데, 상급 마법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자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여관에서 머물더라도 이곳에 자주 들르게나. 점령지에 나가 있는 레이첼이 종종 돌아올 때가 있거든. 그 애가 자네를 보면 아주 좋아할 걸세.”
“알겠습니다.”
나는 빨리 마법서를 읽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기에,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끼이익
도착한 여관방은 텅 비어있어 고요했다.
‘......앨리스는 아직 안 왔나 보네. 이 녀석,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아주 신났구만?’
물론 신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테이블로 가서 앉고, 마법서를 꺼냈다.
‘경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야지.’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 심경의 변화가 좀 있었다. 그 잘난 용족 티안브리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법서와 씨름하는 걸 보니, 한 번만 읽고 습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나는 그런 감사한 마음을 품은 채, 마법서를 펼쳤다. 늘 그랬듯이 앞부분에 적혀있는 마법의 개요 부분은 정독할 생각이다.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
전격 속성의 상급 공격 마법이었다.
이것 역시 ‘콜링 썬더’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게 하는 마법이었는데, 내리친 이후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전기의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전류 갈래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첫 타는 단일 타겟 공격, 후속타는 범위 공격이라는 거군... 괜찮은 것 같은데?’
물론 범위 마법의 끝판왕인 ‘블리자드’처럼 광범위하진 않겠지만, 범위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단일 타겟을 강력하게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콜링 썬더’보다도 강한 벼락이 떨어지니까.
대신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캐스팅 이후 벼락이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적혀있었다.
‘흠. 다 좋은데, 기습용으로 쓰기는 어렵겠네.’
하긴, 강한데 빠르기까지 하면 너무 사기지.
클로이나 티안브리스의 고유 마법도 캐스팅 후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었으니까. 그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뭐, 이론은 이 정도면 충분할 듯했다. 더 자세한 건 직접 실전에서 써보면 알게 될 테니, 마법서의 남은 페이지는 대충 휙휙 읽어 넘겼다.
─탁!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을 배웠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 - 2회]
‘흐흐흐. 어디 싸울 일 없나?’
몸이 근질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새로 마법을 배울 때마다 도지는 병이다.
‘어라, 잠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브룩스 자작이 있었잖아?’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는 브룩스 자작.
이건 비단 마법을 테스트하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잡으면 무조건 좋다.
아까 밀러 백작과 대화할 때는 마법서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자작은 왕을 섬기는 자다. 잡으면 능력치가 오른다는 뜻이다.
겸사겸사 잡으러 가기 좋은 상대.
일단 앨리스의 모험가 등록부터 끝낸 다음에, 밀러 백작을 찾아가든 레이첼을 찾아가든 해봐야겠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로 제공된 빵과 우유를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워버린 앨리스가 나를 보며 물었다.
“다 먹었니?”
“뭔 소리야. 아직 먹고 있잖아.”
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이제 다 먹었니?”
“......? 눈은 장식이야?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빵 덩어리가 안 보여?”
빵은 아직 절반이나 남은 상태였다.
“미안... 그럼 이제 다 먹었니?”
“미, 미친.”
앨리스가 이렇게 소름 끼치게 구는 이유는, 빨리 모험가 등록을 하러 가고 싶어서다. 그녀는 어제도 잠들기 직전까지 모험가 모험가 노래를 불렀었다.
“지금은? 지금은 다 먹었니?”
“아, 알았어! 가자, 가! 빵은 가면서 먹어도 되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남은 빵조각을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찰나의 순간에, 앨리스는 이미 문 앞까지 달려가서 서 있었다.
“그럼 바로 모험가 길드로 가는 거니?”
“아니. 너는 지금 아무런 신분도 없는 상태잖아.”
그냥 다짜고짜 모험가 길드로 찾아가서 ‘나 좀 등록해주쇼’라고 해봤자 안 해준다. 최소한의 신분은 필요하다.
“지난번처럼 노예 등록부터 해야 돼. 괜찮지?”
“응, 괜찮아. 빨리 가자. 빨리빨리.”
생각은 하고 대답하는 건가?
어쨌든 빚쟁이 못지않은 지독한 독촉이었기에, 나는 바로 앨리스와 함께 노예 등록 사무소로 이동했다.
사무소는 밀러 백작성 근처에 있었는데, 어제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덕분에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등록은 어렵지 않았다. 담당관이 앨리스에게 정말 노예 계약을 할 거냐고 의사를 물은 뒤에, 그녀의 외형을 문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노예로 등록하는 걸로 끝이었다. 왜 노예가 되었느냐는 진부한 사연 따위는 전혀 묻지 않았다.
“자, 이제 모험가 길드로 가자구!”
앨리스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마 이 세상에 노예로 등록되고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이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근데... 여긴 모험가 길드가 어디에 있지?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야겠네.”
“내가 길을 알아!”
앨리스는 그런 서포터 같은 말을 하며, 내 팔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뭐야, 네가 어떻게 알아?”
“어제 도시를 구경할 때 미리 찾아봤지!”
“와... 의욕이 대단하구나 너?”
늘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앨리스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긴, 그녀에게 모험가 등록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모험가패가 있으면 다른 도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평생 지하 묘지에 갇혀서 살았던 앨리스에게, 자유가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앨리스에게 끌려가듯 걸어가다 보니, 곧 모험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 작네.”
내가 지금껏 본 대도시의 모험가 길드 중에서 가장 작았다. 중부지방은 전쟁이 잦아 용병이 많고 모험가는 적기 때문인지, 이곳은 거의 케른헴과 비슷한 규모로 보였다.
뭐, 규모는 딱히 상관없겠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모험가 길드는 생각보다 알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규모만 작다 뿐이지, 케른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험가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야, 그래도 대도시는 대도시네. 사람 많은 거 봐라. 우리도 빨리 줄 서야겠다.”
접수대에 늘어서 있는 줄이 빠른 속도로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앨리스와 함께 줄의 맨 끝으로 가서 섰다.
줄은 빠르게 늘어났지만, 줄어드는 속도도 빨랐다. 적당히 길드를 구경하고 있으니, 어느새 우리 앞에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어떤 모험가 하나가 불쑥 우리 앞으로 끼어들었다. 갓 성인이 되었을 것 같은 젊은 남자였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새치기라 오히려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 이봐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보면 몰라? 접수대에 볼일이 있어서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그 역시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줄을 서야지, 왜 새치기를 합니까?”
“못 보던 얼굴인데... 외지인인가? 내가 누군지 몰라?”
“누군데요.”
“나는 조셉 오스틴이다. 이곳에 다섯 명밖에 없는 A급 모험가 중 하나지. 이제 됐나?”
성이 있다고? 그럼 귀족인가?
귀족 모험가는 처음 봤다. 하지만 정상적인 귀족이라면 모험가 일을 할 리가 없으니, 아마 몰락한 귀족 출신인 듯했다.
“다음분!”
“아, 내 차례로군. 그럼 실례하지.”
녀석은 자연스럽게 접수대로 몸을 돌려 용무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이쪽 문화인가? 너무 당당해서 헷갈리네.’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A급 모험가가 적은 지역에서는 A급에게 약간의 특혜가 주어지기도 한다. 케른헴에서도 A급 모험가는 길드에서 직접 찾아와서 의뢰를 준다.
녀석의 자연스러운 새치기를 보니 아마 이쪽은 A급에게는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종류의 특혜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음분!”
어쨌거나 따질 틈도 없이 순식간에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모험가패와 앨리스의 노예 문서를 직원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 모험가 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경력자고, 이 친구는 신규입니다.”
“어머, A급이시네요? 혹시 옆에 계신 여성분도 A급으로 등록하실 건가요?”
내 모험가패를 살펴본 직원이 조금 놀란 눈치로 물었다.
“네. 마법사거든요.”
“마법사는 저에게 마법을 확인시켜주셔야 인증이 됩니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여기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앨리스, 그거 써봐. 육체 강화 마법.”
하급 마법 몇 개만 다룰 줄 알아도 A급으로 쳐준다. 육체 강화 마법은 중급이니, 이거 하나만 보여줘도 충분하다.
“힘이 세지는 마법 말이니? 알겠어.”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하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화륵! 하고 피어오른 불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나는 앨리스의 손을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이건 육체 강화 마법입니다. 중급이죠.”
“그, 그럼 이 의자를 때려보시겠어요?”
직원이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서 내밀었다. 앨리스가 의자의 다리를 움켜쥐고 힘을 주자, 콰직! 하며 부서졌다.
“화, 확인했습니다. 바로 절차를 진행할게요.”
길드 직원은 일단 내 모험가 등록부터 마쳤다. 나는 경력자라서 복잡한 절차 없이 보증금만 내면 바로 등록되기 때문이다. 직원은 앨리스의 서류 작업까지 마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여성분은 신규 등록이시라서, 의뢰수행 능력 검증을 위해 의뢰도 하나 나가셔야 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뢰입니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자이언트 로커스트를 50마리 잡으시거나, 트롤이나 만티코어를 한 마리 잡으시면 되는데,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거대 메뚜기를 50마리나 잡아야 한다고? 이건 당연히 기각이다. 많아서 귀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역겨울 정도로 징그럽게 생겼다.
“트롤이나 만티코어로 하고 싶은데, 이것들은 어디서 출몰합니까? 저희가 외지인이라 이쪽을 잘 몰라서요.”
“트롤은 남쪽 베이커 후작령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숲 지대에 서식하고요, 만티코어는 서쪽 브룩스 자작령 방면에 있는 산에서 서식해요.”
고민할 것도 없군.
“만티코어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