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마법서 (2)
─달그락달그락
밀러 백작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리스가 기대감과 지루함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저기, 엘. 우리 언제 도착하니?”
“글쎄... 출발한 지 나흘이 지났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조금 더 늦어지겠지만.”
원래 케른헴에서 밀러 백작령까지는 5일 정도가 걸리는데, 정확한 건 아니다. 마부의 실력이나 말의 컨디션, 날씨와 길의 상태 등등, 수많은 변수에 의해 걸리는 시간이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역시 길이다. 어떤 경로를 택해서 가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천차만별이다.
얼핏 보면 최단 경로로 가는 게 가장 빠를 것처럼 느껴지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길이는 짧아도 노면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히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도적 떼를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선호한다. 일종의 ‘소금길’처럼 그 지방의 영주가 신경 써서 치안을 유지해주는 길이 있는데, 약간의 통행료를 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아아, 빨리 마법 쓰구 싶다....”
“조금만 참아라. 우리는 최단 경로로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가는 도중에 네가 마법을 쓸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안전이 확보된 길이 아닌, 가장 짧은 길로 가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적이 습격해와도 앨리스 선에서 정리할 수 있으니까.
“내가 마법을 쓸 기회?”
“그래, 혹시 가다가 도적을 만나면 앨리스, 네가 처리해.”
내가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듯 말하자, 앨리스가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처, 처리? 설마 죽이라는 말이니...?”
“그거야 네 맘이지. 죽이든 살리든, 아니면 팔 한쪽을 잘라버리든. 아, 근데 너는 불 속성 마법밖에 못 쓰니까 살살 하기도 힘들겠네. 그냥 죽여버려.”
불 속성 마법은 화끈한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상대를 불태워버린다는 특징 덕분에 언데드나 트롤 같은 특수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 타 속성보다 강점이 있으나, 적당히 힘 조절해서 싸우기가 어렵다.
“그, 그치만 네가 인간은 절대 죽이지 말라고 했었잖아.”
“아니, 그건 당연히 무고한 인간을 말한 거였....... 이거 안 되겠네? 아무래도 사회화 교육이 필요하겠어.”
내가 한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건 좋았으나, 그래도 사람이 좀 융통성이 있어야지.
이제 앨리스도 음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텐데, 지금 상태로라면 어디 가서 뒤통수 맞기 딱 좋아 보였다.
“자, 세상에는 죽여도 되는 인간이 있어.”
“죽여도 되는 인간...?”
“그래. 너의 생명, 재산, 가족, 친구를 위협하는 놈은 그냥 죽여버려도 돼. 어때, 간단하지?”
“그, 그렇구나....”
나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예외가 있지. 상대가 너보다 강하다고 판단되면 절대 까불지 말고 도망가라. 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뭐야, 그 정도는 나도 알지! 내가 지하 묘지에서 살았을 때, 언데드한테서 얼마나 도망 다닌 줄 아니?”
앨리스가 샐쭉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그 던전에 앨리스보다 약한 몬스터라고는 오직 슬라임뿐이었으니 생존본능은 확실하게 체득했겠지.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강함이라는 게 마법이나 힘이 전부가 아니야. 신분이 높은 것도 강한 거라고 볼 수 있으니까. 너는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솔직히 지금의 앨리스를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마법으로 전투하는 감각만 좀 익히면,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길 수준이니까.
문제는 귀족이다.
자기보다 약해 보인다고 귀족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여러 명의 기사에게 집단 린치당할 수도 있다. 아직 인간의 예법에 어두운 앨리스는 이걸 주의해야 한다.
심지어 나에게도 귀족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다. 친한 귀족들이 몇 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늘 껄끄럽다. 원래 귀족은 기본적으로 오만하고 거만하며, 평민을 멸시하는 경향이 짙다.
“......알겠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니까 명심하라고.”
“응, 명심할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앨리스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애를 하나 키우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앨리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히히힝!
─우당탕!
“아야!”
급제동에 의해 정방향으로 앉아있던 앨리스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괜찮아? 갑자기 왜 멈췄지?”
나는 그녀를 일으켜서 다시 의자에 앉히고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차 밖으로 내려갔다.
마차 앞쪽을 바라보니, 무장한 병사 여러 명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뭐지? 통행료를 받으려는 건가?
여긴 통행료를 내는 길이 아니랬는데?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 병사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위아래로 나를 스윽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마차의 주인인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마차 내부를 수색해야겠다.”
상당히 무례한 녀석이었다.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내 복장을 보고 평민인 걸 알아챘겠지만, 병사도 평민인 건 마찬가지다.
“......먼저 당신의 신분과 마차를 수색하려는 목적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이 땅의 주인이신 팔머 남작님 휘하의 병사다. 어제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 있어서 이 일대를 수색하는 중이니 협조해라.”
탈옥수? 말투가 싹수없긴 하지만, 그런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예, 뭐. 살펴보시죠.”
내가 허락하자 그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응?”
하지만 마차 안에는, 앨리스가 이마에 난 혹을 어루만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다고 느꼈는지, 병사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동료들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와... 끝났으면 끝났다고 뭔 말이라도 해주고 가야지.”
쫓아가서 뒤통수를 냅다 한 대 후려쳐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영주의 병사를 건드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므로 참기로 했다.
내가 구시렁거리고 있으니, 앨리스가 마차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뭐야? 무슨 일이니? 왜 세운 거래?”
“아, 탈옥수들을 찾고 있대. 어제 탈옥해서 이 일대에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아무래도 오늘 밤엔 마을에서 자는 게 좋겠네.”
딱히 탈옥수가 두렵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자고 있을 때 공격받으면 장사 없다. 마차에서 자려면 앨리스와 둘이서만 불침번을 서야 하는데, 그건 여러모로 피곤하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가니까...... 마부님! 가다가 마을이 보이면 세워주세요. 혹시 근처에 아는 마을이 있으시면 거기로 가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요.”
***
다행히 마부가 아는 마을이 있었기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고블린의 비명’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뭔 마을 이름이 이따위인가 싶었는데, 여기가 원래는 고블린 서식지였다고 한다. 마을을 세우기 위해 고블린을 싹 다 토벌했는데, 그때 고블린의 비명을 들은 영주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버렸다고 한다.
“이름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묵자고. 마부한테 들어보니까 내일이면 밀러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더라.”
“정말? 너무 기대된다!”
“너도? 나도. 어떤 마법서를 줄지 아주 기대된단 말이지... 흐흐흐. 아무튼 들어가자고.”
나는 앨리스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다.
끼익.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간 여관은 제법 왁자지껄했다. 마을에 있는 유일한 여관이라던데, 그래서 그런 모양이다. 웬만한 여관에서는 음식과 술도 파니까.
“우리도 저녁부터 먹자.”
밖은 완전히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그렇지 실제로는 늦은 저녁 시간 정도였다.
아무튼 앨리스가 먹는 걸 마다할 리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이곳에서 파는 메뉴라고는 스튜, 닭고기, 맥주뿐이었지만, 그래도 이 세계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스테디셀러다. 주문한 음식은 금방 나왔고, 우리는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맛은 괜찮네.”
“응, 엄청 맛있다.”
“그래, 너한테 뭐가 맛이 없겠냐... 어쨌든 좀 천천히 먹어라. 너도 이제 강력한 마법사이니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킬 필요도─”
─쾅!!
갑작스럽게 여관의 출입문이 부서질 정도로 벌컥 열리더니, 험상궂게 생긴 열 명가량의 성인 남성이 걸어들어왔다.
“이봐! 여기 술하고 고기, 있는 대로 다 가져와.”
“배고파 죽겠으니까 빨리 가져오라고!”
그들은 두 개의 테이블에 나뉘어 앉아서, 종업원을 향해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그 흉흉한 기세에 질겁한 몇몇 마을 주민이 눈치를 보며 여관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들 중 하나가 입구를 막아서며 제지했다.
“어이, 잠깐. 어딜 그렇게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시나?”
“예...? 지, 집에 가려고....”
“웃기지 마! 영주에게 신고하러 가려고 했지!”
퍼억! 녀석은 주민의 복부를 한번 걷어차고는, 여관의 문을 걸어 잠갔다.
“다들 잘 들어라! 오늘은 여기서 한 놈도 빠져나갈 수 없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떠날 테니, 죽고 싶지 않다면 그때까지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으라고.”
‘......탈옥수들이군.’
정황상 탈옥한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도 오늘 밤은 이곳에서 지내며 굶주린 배를 채우고, 날이 밝으면 다시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뭐야...? 쟤들 뭐니?”
“탈옥수야. 별거 아닌 것 같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음식이나 마저 먹어.”
나는 속삭이며 묻는 앨리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딱히 저런 조무래기들과 엮일 필요는 없었다.
잡아서 영주에게 넘기면 소정의 보상을 받겠지만, 그래봤자 얼마 안 되는 푼돈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절차를 밟으려면 시간도 꽤 걸릴 텐데, 그럼 밀러 백작령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서 오히려 손해다.
하지만 조용히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과는 달리, 놈들은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기웃거리며 행패 부리기 시작했다.
“이봐, 아저씨. 내가 주문한 음식이 늦어져서 그런데, 당신 것을 좀 나눠 먹어도 괜찮겠지?”
“무, 물론이오. 마, 마음껏 드시오.”
“고맙군, 쩝쩝. 그런데 그 외투가 참 따뜻해 보이는걸? 나는 이렇게나 추위에 떨고 있는데?”
“이, 이것도 가져가시오.”
그들은 여관 내부를 순회하며 주민들의 음식과 옷가지, 돈 등을 갈취했다.
그리고 곧, 우리 테이블에도 찾아왔다.
“오, 여긴 두 명이서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켰지? 다 먹기 힘들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내가 도와줘야겠.......”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집어 먹으려던 탈옥수가 돌연 뒷말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앨리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촌구석에 이만한 미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크크크.”
놈은 음흉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 여자인가? 너 같은 샌님에게는 과분한 여자 같은데.”
“신경 꺼라.”
“오우오우, 꼴에 여자 앞이라고 센척하는 건가? 어이쿠 무서워라.”
녀석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이죽거렸다.
“보아하니 탈옥수 같은데, 그냥 가라. 지랄하지 말고.”
“뭐? 뭘 하지 마?”
“지랄하지 말라고.”
“크크크. 나는 하지 말라는 걸 해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 이 몸이, 네놈 따위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것 같은가?”
귀찮아서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밖으로 따라 나와라.”
“뭐? 설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건가?”
“그래, 남의 영업장에 피 묻히기 싫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 나와.”
“크, 크하하핫!! 그 허리에 꽂혀있는 알량한 쇠막대기를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건가? 어이가 없군. 좋아, 밖으로 나가지.”
녀석이 순순히 밖으로 따라 나왔다.
물론 다른 탈옥수들도 전부 데리고 왔다.
놈들은 나와 앨리스를 포위하듯 빙 둘러싼 뒤 히죽거렸다.
“흐... 굉장한 미인인데?”
“여자가 아깝군.”
“아깝긴 뭐가 아깝나? 저놈을 죽이고 우리가 뺏으면 되는데.”
“그건 그렇군? 킥킥. 내일 저 여자도 데리고 떠나자고.”
우리를 향한 저속한 말들이 오고 가자, 앨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엘, 저것들은 죽여도 되는 인간 맞지? 널 위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