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10화 (110/200)

대등하거나, 그 이상 (3)

잠든 앨리스를 등에 업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길 한참. 해가 슬슬 넘어가려 할 때쯤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이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네.”

겨울이 가까워지며 상당히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도착하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숲 지대로 갈 때는 마차를 이용했었지만, 돌아올 때는 순전히 내 발로 걸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앨리스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으려니 그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스트렝스를 쓸 뻔했다.

아무튼, 앨리스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흠... 시간이 붕 뜨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앨리스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불사조를 얻어내고 싶었으나, 자정이 지나야 능력의 쿨타임이 돌아온다.

즉, 자정까지는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티안브리스나 만나러 가봐야겠군.’

앨리스가 불사조를 소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티안브리스를 만날 수 있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티안브리스의 마법 중에서 불기둥이 가장 탐났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여러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마법을 콕 찝어 유도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쨌든 티안브리스를 찾아가서 대화를 좀 나눠볼 생각이다. 각이 보인다 싶으면 뭐, 시비 걸어서 적개심을 쌓아두든가 하면 되겠지.

나는 즉시 여관을 나서서 체스터 백작성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안에 볼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

“옛! 들어가십시오!”

성문에 도착해 경비병에게 말하니,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그렇게 성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클로이를 마주쳤다.

“엘! 몸은 괜찮아?”

“아, 괜찮습니다. 근데... 그 모자는 뭡니까?”

클로이는 그동안 본 적 없는 파란색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거? 이번 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거야. 어때? 잘 어울려?”

전형적인 마녀의 모습 같았다.

“네, 뭐. 잘 어울리긴 하는데... 보상으로 겨우 모자 하나를 받았다고요? 너무 짠데?”

“겨우 모자가 아니라, 마법 아이템이야. 착용하고 있으면 대기 중에 있는 수분과의 감응력이 높아지거든.”

클로이는 마음에 든다는 듯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며 설명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 같았다.

“......수분과의 감응력? 그게 높아지면 뭐 좋은 점이라도 있습니까? 일기예보를 할 수 있나?”

“내 고유 마법을 캐스팅할 때 도움이 돼.”

“고유 마법이라면... 얼음송곳이 떨어지는?”

“응. 그 정도로 많은 물을 소모하는 마법은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끌어다 써야 해.”

아, 그래서 그때 공기가 건조해진 거였군.

가뭄을 유발하는 여자였네.

“그런데 엘은 여기에 웬일이야? 에드윈 씨가 말하길, 바쁘다면서 보상만 받고 급히 떠났다던데.”

“티안브리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그래? 그럼 중앙 계단을 통해 지하 3층 구석으로 가봐. 그 여자는 지금 거기에 있어.”

클로이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오, 그렇군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클로이 씨도 티안브리스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마나를 추출하는 마법진을 내가 설계하고 그렸으니까. 방금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올라온 거야.”

과연. 체스터 백작 휘하에는 티안브리스와 비벼볼 만한 수준의 마법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녀의 마나를 뽑아내나 싶었는데, 클로이가 관여한 모양이었다.

“이야, 그럼 뭐 걱정 없겠네요.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쪽쪽 빨리겠네.”

“푸훗. 뭐야 그게? 아무튼 얼른 가봐. 나도 피곤해서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거든.”

“예, 그럼 다음에 뵙죠.”

“응, 수고해.”

클로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떠났다.

나도 곧장 중앙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터벅 터벅

어둑어둑한 통로를 따라 내려가니, 금세 지하 1층이 나왔다.

“와... 이게 던전이지.”

지하는 진짜배기 던전이었다.

‘던전’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지하 감옥.

지하 1층은 죄가 비교적 경미한 잡범을 수용하는 장소인 모양인지, 평범한 유치장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적당한 크기의 감옥마다 여러 명의 죄수가 들어있었고, 복도 끝자락에 있는 의자에는 간수 두 명이 한가로이 앉아있었다.

지하 2층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빡빡하다고 해야 하나. 죄수들은 모두 비좁은 독방에 가둬져 있었고, 그마저도 족쇄를 차고 있어서 거동이 제한됐다. 여러 명의 간수는 눈에 불을 켜고 복도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일일이 감시했다.

“끄으으... 아아아!!!”

“조용히 못 해?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간혹 죄수들이 까닭 모를 비명을 질러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간수가 길쭉한 막대기를 쇠창살 사이로 집어넣어서 죄수를 두들겨 팼다.

아마 정신에 이상이 생긴 죄수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는데, 이딴 축축하고 음습한 지하에 갇혀 있다면 누구든 정신이 나가버릴 것이다.

내 생각에 이곳 지하 2층의 입구를 틀어막고 먼 훗날 개봉한다면, 진짜로 언데드가 득실거리는 던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티안브리스는 대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 거지?’

하물며 지하 2층도 이럴진대, 지하 3층 깊숙이에 갇혀 있는 티안브리스는 어떨까. 아예 전신을 사슬로 칭칭 감아버리고, 눈과 귀까지 모조리 막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몸서리치며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여긴 내부가 보이지도 않네.’

1층과 2층의 감옥은 쇠창살로 만들어진 오픈형 구조였는데, 여긴 전부 폐쇄적인 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내부가 보이질 않았다.

뭐 하는 장소일까 잠시 추측하고 있을 때, 간수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누구시오?”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간수는 카트카 공방전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내 얼굴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에드윈이 미리 언질을 줘뒀는지, 이름을 대니 알아들었다.

“아,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분이시군. 나를 따라오시오.”

간수를 따라서 복도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바로 저기요. 용족은 저 방에 있소.”

간수가 가리킨 곳은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자리한 어떤 방. 다른 방보다 훨씬 커다랬고, 무려 기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오, 이거 카트카의 구원자, 엘 군이 아닌가? 이거 반갑구만.”

보초를 서고 있던 중년의 기사가 나를 보고 아는 체했다. 나도 전장에서 잠깐 스치듯 본 기억이 있는 남자였다.

“전투가 끝난 후 탈진으로 기절했다고 들었는데, 금세 기운을 차렸나 보군. 티안브리스를 만나러 왔나?”

“예.”

“그렇군. 어서 들어가 보시게.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나를 부르... 아니, 용족을 쓰러트린 장본인에게 내가 괜한 소릴 했군. 허허.”

말하는 걸 좋아하는 기사였다. 나는 이 대화에서 ‘예’라고 딱 한 마디만 말했다. 지하에서 혼자 보초를 서니 심심했나 보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문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줬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육중한 철문 너머에 펼쳐진 광경은 놀라웠다.

‘뭐, 뭐야?’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의 특실보다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의 붉은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보기만 해도 푹신할 것 같은 붉은색 가죽 소파, 붉은빛이 감도는 원목으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침대 커튼까지 빨간색이었다.

온통 붉어서 정육점을 연상케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시설 자체는 좋았다.

“감상평은?”

그때, 침대 커튼을 열고 티안브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사슬에 칭칭 감겨있을 거라던 내 예상과는 달리 전신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대신 목에 두툼한 금속 고리를 차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금색을 띤 금속이었다.

“내 거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피칠갑을 한 것 같군.”

“하, 품격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로구나.”

티안브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으나, 더 어이없는 건 나였다.

“설마 이 방은 네 취향대로 꾸며진 건가? 뭔데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는 건데? 몬스터를 잔뜩 이끌고 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주제에.”

“너희들도 내 동생을 죽였잖느냐.”

“그건 정당방위지. 그놈이 먼저 덤볐잖아.”

“됐다. 그런 걸로 너와 논쟁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수치스러운 녀석이었으니.”

티안브리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인이 된 동생을 능욕했다. 굉장히 냉정한 여자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로 걸어가서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 마나 회복을 돕기 위해 이렇게 꾸며진 것이다. 그래야 내게서 더 많은 마나를 빼앗아 갈 수 있을 테니 말이지.”

그런 거였군.

마나는 스트레스 없이 잘 먹고, 잘 쉴수록 빨리 회복된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마나를 뽑아내기 위해, 티안브리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는 모양이었다.

푸아그라를 위해 거위에게 강제로 사료를 주입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랄까.

“그런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부를 한 번 더 훑었다.

“......마법진이 안 보이는데?”

클로이가 직접 설계하고 그렸다는, 마나를 추출하는 마법진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자, 티안브리스가 넌지시 물었다.

“왜, 두려우냐? 내게 금제가 제대로 가해진 것 같지 않아서, 혹여나 너를 해칠까 봐?”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도발적으로 웃어 보였다.

“훗, 무엇이 그리 걱정이지? 너는 나만큼 강한 마법사가 아니더냐. 날 이곳에 갇히게 만든 것도 너고. 내가 마법진에 구속받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 나를 쓰러트리면 그만일 텐데?”

묘하게 가시 돋친 말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었다.

일대일로 싸우면 내가 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마법진은 아래층에 그려져 있으니. 이곳에서 이 구속 고리를 차고 있는 한, 나는 한 줌의 마나조차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없다.”

티안브리스는 자신의 목에 채워져 있는 금빛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한평생 내 마나를 인간들을 위해 써야 한다니, 비참하기 짝이 없구나.”

“동정심 유발하려고 하지 마라. 안 통하니까.”

나는 처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티안브리스에게 단호히 말했다.

이미 메두사의 메소드 연기에 한 번 속아 넘어간 이력이 있는 나다. 더 이상의 연기에는 속지 않는다.

“나도 인간에게 동정받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그녀는 정말로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는데, 내게서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을 포기한 건지, 아니면 평생 갇혀 지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서 그런 건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탈출이나 복수에 대한 의지는 딱히 없어 보였기에, 나는 좀 더 본격적인 대화를 위해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살만하잖아? 넓고 시설도 좋고... 뭐야, 심지어 책도 있네?”

테이블 위에는 드래곤에 관한 설화 모음집과 역사서 등의 책이 몇 권 올려져 있었다.

“나는 독서를 즐긴다. 그래서 내가 요청한 것이지.”

“방화 말고도 고상한 취미가 있었구나, 너?”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인간의 업적이 책이다. 아무리 위대한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책으로써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잊혀지기 마련이니.”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뭐, 그래. 너의 취미 얘기는 잘 들었고....”

나는 그녀의 지루한 취미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었으므로,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네가 쓰던 마법 말이야.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그거. 꽤나 까다롭던데, 어떻게 배운 거지?”

“그러는 너는 어디서 그런 강력한 전격 마법을 배운 것이냐? 내 고유 마법을 소멸시키고도 남아서 나까지 쓰러트리다니. 그런 마법은 들어본 적도 없다.”

티안브리스도 내심 내 라이트닝 블래스트의 정체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그렇게 되물었다. 물론 알려줄 생각은 없다.

“아니, 혼날래? 질문은 내가 했잖아. 너는 대답이나 하면 돼. 어떻게 배웠냐고.”

“......뭐? 하, 나를 이렇게 대하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구나. 그 붉은 머리의 기사조차 내게 최소한의 예는 갖추건만.”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대답해주지. 마법서를 통해 배웠느니라.”

“마법서? 네가 마법서를 어떻게 구해? 검문 때문에 도시에 못 들어갈 텐데?”

“......내가 이런 멍청한 녀석에게 당했단 말인가? 당연히 밖으로 나온 마법사를 습격해서 빼앗은 것이다.”

아, 마법서를 구입하고 나온 사람한테서 강탈한 거였군.

“그게 뭐가 당연해? 네 사고방식이 이상한 거지. 아무튼... 그럼 그 불사조도 그렇게 배운 건가?”

“용족 고유의 마법이 마법서가 있을 것 같으냐? 레드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으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이다.”

츤데레인가? 말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지만, 어쨌거나 묻는 말에는 성실히 대답해주는 그녀였다.

“오, 그래? 자연스럽게 체득한다니... 너 혈통이 되게 좋네. 다른 불 속성 마법도 그런 식으로 알아서 배워진 건가?”

“아니. 고유 마법을 제외한 다른 마법들은 마법서를 통해 익힌 것이다.”

“그걸 다 마법서로? 엄청 오래 걸릴 텐데?”

시스템 때문에 한 번 읽기만 하면 배워지는 내가 특이한 거지, 원래 마법서로 마법을 습득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타고난 속성에 따라 개인적인 편차가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오래 걸린다.

누구든지 마법서로 금방금방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람들이 뭐하러 마탑 같은 곳에 제자로 들어가겠는가?

“하아... 너는 대체 나를, 그리고 용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티안브리스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감히 인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 속성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 어떤 마법서라도 불 속성이라면 금세 익힐 수가 있다는 뜻이지.”

되게 재수 없게 말하네.

아니, 잠깐.

“불 속성이면 빨리 익힐 수 있다고?”

“그래.”

“불 속성이면 뭐든 익힐 수도 있고?”

“그래, 지금까지 내가 습득에 실패한 불 속성의 마법은 없느니라.”

“........”

이거 나를 위한 인페르노 학습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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