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등하거나, 그 이상 (1)
낯선 천장이었다.
“.......”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불사조와 티안브리스를 쓰러트리고 앨리스에게 달려가 잠시 대화한 뒤 탈진해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에 있었다.
침대가 몽실몽실하고 내부 장식도 상당히 고풍스러운 것이, 아마도 체스터 백작성에 와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우, 마나 탈진도 오랜만이네.”
진짜로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탈진한 게 청색마탑에 있을 때였으니까. 그 후로도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몇 번 쓴 적이 있었지만, 기사를 죽이거나 승격 퀘스트를 완료해 능력치가 올라서 탈진까지 가지는 않았었다.
“몬스터에게 사용하니 이런 부작용이 있군. 어쨌든...... 흐흐흐.”
어쨌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탈진하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에서, 앨리스는 티안브리스의 고유 마법 복제에 성공한 것 같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거기서 불사조를 소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앨리스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정말로 성공했을 확률이 높다. 그녀는 회복 마법을 복제했을 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라고만 말했었는데, 진짜로 쓸 수 있었다. 뭔가 자신만이 느껴지는 감각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일단 앨리스를 찾아가 봐야겠어.”
앨리스는 티안브리스의 모습을 취했다.
당연히 카트카에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으므로, 일단 우리가 묵었던 여관으로 가서 숨어있으라고 했다. 혼자서는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을 테니 도린 형제까지 붙여뒀다.
나는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섰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공손히 말을 걸어왔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 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체스터 백작성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방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도련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도련님이라면... 에드윈 님이요?”
“예, 엘 님께서 깨어나시면 바로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나한테 용건이 있나?
당장 앨리스한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편의를 제공해준 사람이니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예의일 듯했다.
“그냥 제가 에드윈 님을 찾아가는 편이 낫겠네요.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저를 따라오시지요.”
하녀는 내게 허리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얼마간 걷다 보니 금세 에드윈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도련님, 엘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녀가 노크하며 문 안쪽에 대고 말하자, 문이 벌컥 열리며 에드윈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깨어났군. 몸은 괜찮나? 하녀를 보냈으면 내가 방으로 찾아갔을 텐데. 어쨌든,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서니 에드윈이 소파를 권했다. 내가 그곳에 앉자, 에드윈도 맞은편에 착석했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네?’
에드윈은 전투 막바지쯤에 불사조에 의해 몸에 불이 붙었었다. 금세 끄긴 했지만 화상을 좀 입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한 것을 보니 회복 마법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전쟁은... 이겼겠죠?”
나는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에, 뒷일은 알지 못한다. 내가 살아서 백작성에 옮겨진 걸 보면 십중팔구는 승리했을 테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래, 승리했다.”
“몬스터가 엄청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다 처리했나 보네요.”
“네가 다 처리했잖나.”
“......예?”
뭔 소리지? 내가 자면서 싸우기라도 했나?
“티안브리스가 쓰러지자 대부분의 몬스터가 도망쳤다. 트롤을 비롯한 지능이 떨어지는 놈들이 몇 남았었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지.”
“오, 그렇군요. 근데... 그게 어떻게 제가 처리한 게 됩니까?”
“티안브리스를 쓰러트린 게 너잖나. 그러니 네가 몬스터를 쫓아낸 거나 다름없다.”
에드윈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얼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나를 높게 쳐주는 건 고맙지만, 솔직히 나 혼자서 해낸 것도 아니었으니까.
“흠흠, 그게 어디 제가 혼자서 잡은 건가요. 에드윈 님도 도와주셨고, 클로이 씨도 있었는데.”
특히 클로이의 활약이 어마어마했다.
그녀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클로이가 풀 컨디션이었다면 티안브리스도 잡아냈을지 모른다.
내 말을 들은 에드윈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클로이 양은 명불허전이었지. 내가 전에도 말해주지 않았나? 클로이 양에게 절대 원한을 사지 말라고 말이야.”
“아, 그러셨었죠. 맞습니다, 진짜로. 클로이 씨랑 같은 편이어서 다행이에요.”
나는 클로이가 불사조에게 사용했던 고유 마법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움직이는 대상은 맞히기 힘들다고 했었나? 아무튼 위력만 놓고 보면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빙산을 만들어낼 정도였으니.
“큰 활약을 해준 사람에게 예의는 아니지만... 굳이 따진다면 클로이 양은 이등공신이야. 일등공신은 엘, 너다.”
“.......”
“두 사람 모두 공통된 활약을 했다. 둘 다 용족을 하나씩 쓰러트렸고, 불사조도 소멸시켰으니까. 하지만 네가 잡은 불사조가 갓 소환돼서 더 강했지. 용족도 여자 쪽이 훨씬 더 강했고.”
불사조에 관해서는 에드윈의 말이 맞다.
클로이가 소멸시킨 불사조는, 전장의 수많은 마법사들에게 얻어맞아서 꽤나 약해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티안브리스는 아닌데?
티안브리스가 티안브리켄보다 강하긴 했다. 하지만 내 능력이 뛰어나서 잡았다기보다는, 3:1로 다구리 쳤기 때문에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이건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겠다는데, 굳이 내가 나서서 말릴 필요는 없다.
“결정적으로 너는 몬스터가 도망치게 만들었지. 덕분에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래서.......”
뒷말을 흐린 에드윈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용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돌아와 내 앞에 올려놨다.
“......? 이게 뭡니까?”
“카트카를 지켜준 것에 대한 보상이다.”
“아....”
검집과 손잡이에 아지랑이 비슷한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검이었는데,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검은 오러를 버틸 수 있도록 강화된 거라서, 충분히 만족하며 사용 중이었다.
장식용 검 따위는 필요 없다. 차라리 마법서나 돈이면 모를까. 나는 정중하게 사양하려 했다.
“괜찮습니다. 제 검도 좋은─”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검이다. 우리 가문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거지만, 일단 말씀은 들어보는 게 좋겠네요.”
나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의 신이 존재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검이다. 신이 직접 제작에 관여하고, 힘까지 일부 불어넣었지. 물론 불의 신이 사라지면서 검에 깃들어있던 힘도 사라졌지만, 그가 새겨넣은 마법진은 아직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헙!”
군침이 싹 도는 설명에,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불의 신이 새긴 마법진이라는 게... 어떤 효과가 있는 겁니까?”
“직접 보여주지.”
에드윈이 검집에 들어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화륵!
별안간 검신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나는 이글거리는 검을 넋 놓고 바라봤다.
‘와, 멋있네... 불 색깔도 좀 특이하고.’
일단 비주얼은 합격이었다.
광선검을 방불케 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불로 전환해주는 효과가 있다. 일반적인 불이 아니라, 불의 신이 사용하던 것과 유사한 형태의 불이지.”
“유사한 형태요? 같은 게 아니라?”
“흉내만 낸 거다. 아무리 신이 새겨넣은 마법진이라고 해도, 완전히 신과 똑같은 힘을 일으킬 순 없다.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오러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겠군.”
“......오러!”
오러라는 말에 흥분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검을 감상하던 중, 문득 의문이 하나 치밀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걸 왜 직접 쓰지 않으십니까?”
“내가 생성하는 오러가 더 강하니까.”
에드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아, 티안브리스랑 싸울 때 쓰셨던 그 붉은 오러 말씀이시군요.”
“그래, 오러에 불 속성을 입힌 거지.”
그래서 붉은 빛을 띤 거였군.
몰랐다. 에드윈이 불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몰랐고, 오러에 속성을 입힐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본 기사는 전부 평범한 오러를 사용했었으니까.
아무튼, 에드윈은 더 강한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이 검이 필요 없는 듯했다.
“에드윈 님이야 불 속성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가족분들에겐 유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문에 불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없다.”
“예?? 모든 구성원이 불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무슨 그런 축복받은 집안이 다 있어?
물론 트리플 이상이 아니라면 성장에 한계가 뚜렷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다른 귀족 가문도 마찬가지다. 귀족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기득권이 된 게 아니야. 강하기 때문에 귀족이 된 거지. 내 가문의 시조께서도 불의 신관을 맡으실 정도로 강력한 불 마법사셨다.”
과연. 그런 것이었나.
귀족 가문이라는 것은, 과거에 운 좋게 한탕 쳐서 만들어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이야기가 샜군. 그래서... 어떤가?”
에드윈이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부담가지지 않아도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가족 중에는 이걸 쓸 만한 사람이 없다. 기사는 오러를 다루니 필요 없고, 마법사는 검을 쓸 일이 없으니까.”
“어우, 그래도 이 귀한 걸....”
“귀하긴 해도 창고에서 썩고 있던 물건이다. 그럴 바에야 이걸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트카의 구원자에게 주는 게 옳겠지. 이미 아버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그런 훌륭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니...!
에드윈의 말마따나 체스터 백작가의 사람들에겐 별 쓸모없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극도로 유용한 물건이다. 나는 마법사지만 검을 애용하니까. 에드윈도 내 전투 스타일을 알기에, 이 검을 보상으로 고른 것처럼 보였다.
뭐, 체스터 백작의 허락까지 떨어졌다고 하니, 사양 않고 받기로 했다.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인사는 됐다. 네가 세운 공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니.”
꾸벅 인사하는 나를 향해 에드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검집을 들어 검을 반쯤 뽑아봤다. 스릉-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벌써부터 무언가 썰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검을 완전히 뽑은 뒤, 마나를 밀어 넣었다.
─화륵!
“오오, 이거 진짜 좋네. 진작 있었으면 티안브리스를 더 수월하게 죽였을 텐데.”
“......음? 아, 너는 모르고 있나 보군?”
내가 타오르는 검신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에드윈이 영문 모를 소릴 했다.
“네? 뭐를 말입니까?”
“티안브리스는 죽지 않았다.”
“예에? 설마 도망쳤습니까? 분명 쓰러졌었는데?”
“아니, 생포했다는 뜻이다. 네가 사용했던 그 굉장한 마법이... 아마 불사조를 소멸시키면서 위력이 경감된 것 같더군. 쓰러져있는 그녀를 살펴보니 미약하게 숨이 붙어있어서 잡아 왔지.”
호오. 생포했다라.
뜻밖이지만 상당히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티안브리스는 매우 유용한 존재니까.
일단 앨리스가 불사조를 복제하는 데 성공한 듯했지만, 만에 하나 실패했다 하더라도 보험이 있다. 티안브리스의 꿈속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앨리스가 복제에 성공했어도 마찬가지다. 티안브리스는 불사조 외에도 강력한 불 속성 마법들을 보유하고 있다. 마법이 그득그득한 마법 창고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한 개밖에 못 꺼내지만.
그리고....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워낙 강해서 어디에 가둬두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던데.”
“저거 보이나?”
에드윈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실내에 앉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창밖으로는 하늘과 카트카를 감싸고 있는 붉은 결계만 보였다.
“여기선 결계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래, 결계 말이다. 저 결계는 티안브리스가 만들어내고 있는 거다.”
“......?”
“그녀에게 각종 금제를 가하고 결계 마법진 위에 올려뒀다. 우리가 받은 피해가 얼마인데, 그냥 처형할 수는 없지 않나? 지속적으로 불 속성의 마나를 뽑아내고 있지.”
“오....”
나만 티안브리스가 유용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나 보다. 체스터 백작가에서도 그녀를 마나 탱크로써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백작가 입장에서도 그녀를 처형대에 올려봤자 실질적으로 얻는 이득은 없으니까. 저렇게 마나를 뽑아서,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나석에 드는 비용을 아끼는 게 좋겠지.
“혹시 제가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소릴. 네가 잡은 건데 안 될 것도 없지. 그녀도 너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눈치더군.”
“......저를요? 왜요?”
“글쎄. 네가 그녀를 쓰러트렸으니 그런 거 아니겠나. 원한다면 지금 만나볼 텐가?”
“음, 아니요. 지금은 가볼 데가 있어서. 다음에 만나보겠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래? 그럼 편할 때 찾아와서 만나봐라. 병사들에겐 내가 미리 일러두지.”
***
앨리스가 숨어있는 여관으로 향하는 길.
나는 몸이 근질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와 씨. 어디 싸울 일 없나?”
내가 싸움에 미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니고, 에드윈에게 받은 검을 사용해보고 싶어서다. 물론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시비 걸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스펙업의 기회가 늘어났다.
이 검도 그렇고, 앨리스의 불사조와 티안브리스까지. 거기에 머지않아 밀러 백작으로부터 받게 될 상급 마법서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폭풍성장이다. 심지어 클로이 복권은 아직 긁지도 않았다.
“흐흐흐. 이거 성장하기에도 바쁘구만.”
라이트닝 블래스트 마법서도 처분해야 하는데, 당분간은 그럴 짬이 없을 듯했다. 일단 황색 마탑과 타스모스 학파에 서신을 보내 둔 상태니, 회신을 기다리며 다른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곧 목표했던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곧장 계단을 올라 최상층에 있는 특실로 향했다. 앨리스와 도린 형제는 그곳에 있다.
─끼이익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티안브리스, 아니 앨리스였다.
그녀는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앨리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도린 형제를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물.”
‘......? 뭐지? 도린 형제한테 심부름을?’
거칠고 드센 도린 형제의 성격상, 얌전히 심부름에 응할 리가 없다. 아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싶었다.
“무, 물 말이오? 여, 여기 있소.”
순간, 눈을 의심했다.
테도린이 잽싸게 주전자로 달려가 물을 한잔 떠서 앨리스에게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 버럭쟁이 테도린이 말이다!
설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세상이 파멸할 징조인가?
나는 문 앞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이 파멸적이고 충격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꼴깍. 꼴깍. 느긋하게 물을 삼키던 앨리스는 나를 발견하고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아, 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