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꿈 (5)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마법 횟수가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 횟수가 복사가 된다고!
세르시아는 내 마법을 거둬들이지 못하자, 자신의 권능을 시험하기 위해 역으로 마법 횟수를 부여해본 것이다.
“오오?! 이게 신의 권능...? 역시 세르시아 님이 맞으셨군요! 이거 잠시나마 의심했던 제가 다 한심해질 지경이네요. 죄송합니다.”
“그, 그래! 너도 느꼈니? 그것이 나의 권능. 내가 너에게 마법을 허락해준 것이란다.”
그녀는 자신의 권능이 내게 닿았다는 사실이 내심 기쁜 듯 보였다.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감정을 쉽사리 바깥으로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 신으로서 군림하던 자신의 권능이 막혀본 적이 대체 언제 있었겠는가? 당황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다.
“오오, 제게 마법을 허락해 주시다니.”
“그렇단다. 내가 너에게 잠시 허락을─”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내, 내가 잠시 허락을─”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그러니까... 잠시만 허락을─”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자, 잠시만 허락하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이번 기회에 신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
방금 다시 뺏어가려고 엄청 노력한 거 아니냐?
세르시아는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마법을 허락해준다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자기 딴에는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마법을 회수하려 할 때마다 메시지가 뜬다고요, 이 어설픈 신님아.
‘근데 진짜 왜 뺏는 거만 막아주는 거지...?’
어쨌든 나야 좋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마 보편적으로, 마법을 배우면 배웠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기 때문에, 시스템이 한 번 입력된 마법은 보호하는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뭐, 나라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나는 내가 왜, 어떻게 이 게임속에 떨어졌는지부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시스템이니 뭐니 하는 것들? 내가 제일 궁금하다.
“과연, 신의 아량이란 인간인 저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군요. 마법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란다. 일단 그 손의 상처부터 마저 치료해보렴. 너는 이제 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원동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오.”
나는 세르시아를 섬기지 않는다.
하지만 세르시아의 존재는 믿는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내게 마법 횟수까지 부여해줬다. 이건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내 신앙이 매우 불순하기는 하나, 어쨌거나 ‘신의 존재’자체는 굳게 믿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신성력은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까 치료에 실패했던 손바닥의 상처를 향해 마법을 캐스팅했다.
─위이잉
손끝에서 성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회]
여전히 엘미나가 사용하는 것만큼 뚜렷하고 강렬한 빛은 아니었으나, 아까전의 희끄무레했던 빛과 비교하면 확연히 밝아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사제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나는 빠르게 아물어가는 손바닥의 상처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오오....”
“역시 그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어느새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르시아가, 앞에서 김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꼬맹이의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니 왠지 더 얄미웠다.
“......예? 이 정도가 어때서요?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능인데요?”
“나를 진심으로 섬긴다면,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어.”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리고 나는 딱히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물론 세르시아 면전에 대고, 당신을 섬기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난처해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게....”
“너는 나를 섬길 생각이 없구나?”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와 씨. 뒤끝 장난 아니네.
곧바로 마법을 회수하려고 하다니.
“그래, 너에게 강요하지는 않을게.”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신앙을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나도 충분히 이해하는... 아, 짜증나!”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4회]
또다시 내 마법을 회수하려고 슬쩍슬쩍 시도하던 꼬맹이 세르시아는, 왈칵 짜증을 쏟아내며 애꿎은 땅을 발로 찼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행동이었다.
‘외형이 어려지면 성정도 같이 어려지나?’
아무튼 상당히 소름 돋는 행태였다.
말로는 괜찮다면서, 속으로는 아니었다.
신이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닌 모양이다. 솔직히 조금 호구 같은 구석도 있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혹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도...?”
“.......”
내가 모르는 척 묻자, 그녀는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다시 자세를 정갈하게 바로잡았다. 그래도 신이라고, 어린아이의 모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너는... 신비한 인간이야.”
마침내 포기한 모양인지, 세르시아는 체념과 자조가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히 인간은 맞지만... 마치 나보다 높은 신격을 지닌 존재가 너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구나. 설마 창조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거니...?”
“네? 그런 신도 있습니까? 이 세계에 신은 세르시아 님만 존재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나는 이 게임이 유일신 세계관인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의 어디를 돌아다녀도 세르시아 교단 외의 종교단체나 시설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무수히 존재한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 태어나고 소멸하고 있지.”
“새로 태어나고 소멸한다고요?”
“그래. 신도 영원불멸하진 않아.”
꼬맹이 세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이 돌덩어리를 믿는 자가 많아진다면, 그 믿음이 모여서 돌의 신이 탄생하는 거란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돌의 신은 소멸하게 되지.”
“오오, 그렇군요.”
세르시아 님의 재미있는 신학 교실!
신은 인간들의 믿음이 모여 발현되는 것.
뭐, 그런 설정의 세계관인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네게 마법을 허락해줄 수는 있어도, 그 원동력까지는 주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내 힘은 나를 믿는 만큼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그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거두렴.”
들켰군.
가만 보니 세르시아는 약간 어리숙한 면도 있는 듯했기에, 혹시 대화가 잘 풀리면 신성력 좀 팍팍 밀어달라고 은근슬쩍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법도 준 거, 기왕이면 힘도 주시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신성력이라는 것은, 딱 내가 세르시아를 믿는 만큼만 따라오는 모양이다.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하하....”
“그래도 너는 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으니, 내 힘을 일부나마 빌릴 수 있게 되었단다. 그쯤에서 만족하고 현실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신비한 인간아.”
꼬맹이 세르시아는 자애롭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내게서 마법을 회수하지 못해 상했던 기분은 어느새 다 풀렸는지, 말투도 근엄해져 있었다.
물론 나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1회 밖에 안 되던 회복 마법이 4회까지 늘어났고, 그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신성력까지 얻어냈으니까.
무엇보다 현실로 돌아가라는 그녀의 권고.
이건 권고 아닌 경고가 아닐까.
신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시스템이 마법은 지켜줬지만, 내 목숨까지 지켜주지는 않을 것이다. 순순히 세르시아의 권고를 따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세르시아 님.”
나는 그녀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신 앞에서 자살해도 되는 건가?’
내가 알기로 웬만한 종교에서 자살은 죄악으로 취급된다. 세르시아의 눈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면, 뭔가 신의 권위를 부정했다거나 하면서 화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저... 제가 이 꿈에서 벗어나려면 죽어야 하는데... 혹시 자살해도 괜찮겠습니까?”
“뭐? 쿡쿡.”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꼬맹이 세르시아는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쿡쿡 웃었다.
“현실도 아니고 꿈속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너무 끔찍하잖니? 내가 너를 현실로 돌려보내줄게.”
“예? 예? 그 말씀은... 세르시아 님께서 직접 저를 죽이시겠다는...?”
나는 살벌한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설마 아직도 뒤끝이 남아있었나?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그럼 저를 어떻게 돌려보내시게요?”
“하아, 신비한 인간아. 네 이름은 뭐니?”
“엘입니다.”
“좋아, 엘. 너는 내가 무슨 신이라고 생각해?”
그거야 당연히....
“희망의 여신 아니십니까?”
“희망을 다른 말로 하면 뭔데?”
“글쎄요....... 꿈?”
“그래, 나는 희망의 여신이자 꿈의 여신이야.”
세르시아의 마지막 말과 함께, 내 몸이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화아악!
“.......”
고요한 새벽.
나는 몸을 일으켜, 쉼터 구석에 잠들어있는 엘미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망의 여신이자 꿈의 여신이었다니....’
진작 말해주지. 어찌 보면 나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신이 아닌가? 세르시아가 그걸 진작 말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 회복 마법이 아니라, 꿈에 들어가는 내 능력의 횟수를 늘리도록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녀는 꿈의 여신이고, 나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꿈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게다가 세르시아는 나를 ‘신비한 인간’이라고 부를 만큼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 또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언젠가 내 꿈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
날이 밝고 우리는 네크로맨서 수색을 재개했다.
이제는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트롤짓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일행들을 이끌기로 했다.
“저쪽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일단 거기로 한 번 가보죠.”
“알겠네, 형제여.”
두 명의 수습 성기사는 성큼성큼 걸으며 나를 따라왔지만, 왜인지 엘미나는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뭐 하십니까? 엘미나 님?”
“......네? 네?”
“저쪽으로 가보자니까요?”
“네? 아, 네.”
얼빠진 듯한 얼굴로 되묻던 엘미나는, 황급히 대답하며 나를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뭐지? 이렇게 멍 때리는 여자가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허! 엘미나 님! 동료끼리 숨기는 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허둥대는 엘미나를 근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무려 세르시아도 꾸짖은 남자. 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못 이겨 엘미나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제가 이상한 꿈을 꿔서....”
“이상한 꿈? 무슨 꿈인데요?”
나는 딱히 엘미나의 꿈속에서 그녀에게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내 탓은 아닐 것이다. 혹시 내가 꿈밖으로 나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제가 성지순례를 하는 꿈이었는데, 거기에 엘 님이 계시더라구요. 그런데 막... 엘 님이 바닥에 넘어지시고... 혀, 혀를 깨무신 것 같은데....”
잘 들어보니 내가 이상한 짓을 하긴 했네.
“아하하... 그것 참 이상한 꿈이네요.”
“그,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
“웬 꼬마아이가 나왔어요. 아주 이상한....”
이상한 꼬마라고? 그거 신성 모독일 텐데.
하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했기에, 나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고결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느낌의 꼬마아이였는데... 자꾸 저한테 엘 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있죠?”
“예? 저에 대해서요?”
“네. 저는 함부로 엘 님에 대해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뭐랄까... 거역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받아서....”
그거야 그렇겠지. 세르시아니까.
“......저에 대해 뭘 물었습니까?”
“성격은 어떤지, 주변인은 누군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세르시아 교단의 증표는 왜 달고 있는지 등등. 너무 많아서 다 기억도 못할 정도예요.”
나는 엘미나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이거 완전 스토커 아니야?
그렇게 나에 대해 궁금했으면 직접 물어볼 것이지. 쿨한 척 나를 현실로 보내놓고, 엘미나를 통해 내 뒷조사나 하다니. 신은 존엄할 것이라는 환상은 깨져버렸다.
“도, 도대체 제가 무슨 꿈을... 어째서 온통 엘 님에 관한 꿈을 꾼 건지... 내가 미쳤나봐....”
엘미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내 꿈 좀 꿨다고 스스로를 미친 사람 취급하다니. 왠지 떨떠름한 느낌이군.
어쨌든 그렇게 동굴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짐승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는 한 무리의 좀비 떼를 발견했다.
“사악한 마물...!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로군.”
“형제여, 저것들은 우리가 정화하겠네.”
두 명의 수습 성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좀비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늘 이렇게 먼저 나서주니, 나로서는 놀고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신성력이 없는 사람은 언데드를 처치하기 번거로우니까.
‘......아니지. 나도 이제 신성력이 있잖아?’
그렇다. 내 신앙은 불순하지만, 어쨌거나 신성력은 있다. 나는 즉시 성기사와 싸우고 있는 좀비 떼를 향해 마법을 캐스팅했다.
─위이잉
‘엘미나가 어떻게 하는 거라고 했었지? 넓게 퍼트린댔나?’
내 손에 하이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엘미나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좀비 떼를 향해 빛을 쏘아 보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3회]
뻗어나간 빛은 내가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하고는, 은은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좀비 떼를 태워버렸다.
“카하아아이엑!”
“키헤에에엑!”
순식간에 스무 마리가량의 좀비가 산화했다.
‘뭐, 뭐야. 꿈에서 썼을 때보다 강해졌는데?’
이상하게도 위력이 증가한 듯 보였다.
왜지? 그 스토커 여신이 내게 뭔가 해줬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게 할 수도 없을 테고... 설마 내가 세르시아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해서?
내가 꿈속에서 이 마법을 썼을 때는 그녀가 희망의 여신이라는 사실만 알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꿈의 여신이라는 것도 인지함으로써 전보다 더 명확히 알게 됐으니, 덩달아 신성력도 강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사제 뺨때리는 위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혀, 형제여? 이게 무슨?”
“엘 님이 어떻게...? 어떻게 신성력을...?”
성기사와 엘미나는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자리에 얼어붙어서 경악했다.
“아, 사실 저도 어젯밤에 묘한 꿈을 꿨는데... 세르시아 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부터 이렇게 됐네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앞뒤를 자르고 말했지만, 솔직히 전부 사실이긴 하다.
“시, 신탁...!! 신탁을 받으셨다구요?!”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네크로맨서
“......예? 아니,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꿈에서 세르시아 님과 대화나 좀 한 건데요.”
“그러니까 그게 신탁이죠!!!”
엘미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질렀다.
이게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인가?
그렇게 따지면 엘미나도 신탁을 받은 거 아닌가. 애당초 내 꿈이 아니라 엘미나의 꿈이었고, 그녀 역시 세르시아와 대화한 건 마찬가지니까.
“단지 꿈에 신께서 나타나셨다고 해서, 또는 대화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해서 신탁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엘 님은 신탁을 받으신 게 맞아요!”
“......결론이 이상한데요?”
“세르시아 님께서 직접 당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면서요. 그게 신탁이 아니면 뭐겠어요? 심지어 신성력까지 내려주셨잖아요!”
뭐지? 뭔가 착각하고 있군.
세르시아는 자신이 신성력을 내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내 신성력은 세르시아로부터 공짜로 받은 게 아니라, 내가 그녀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어쨌든 수석 사제인 엘미나조차 신성력이 무상 증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면, 웬만한 사람들도 다 모를 듯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성력이 전혀 없던 엘 님이 갑자기 이렇게 되셨다는 건...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예요!”
“아, 네....”
그래, 그냥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내가 뭐라고 설명해도 엘미나는 자신의 믿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계속하느니, 대충 맞장구쳐주고 네크로맨서나 잡으러 가는 게 백배 나을 것이다.
“성녀님 이외에도 신탁을 받는 분이 계셨다니... 그게 엘 님이라니... 이건 당장 본단에 보고를 올려야─”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부정한 네크로맨서가 신의 섭리를 거스르며 끔찍한 피조물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일단 놈부터 잡아야 합니다.”
엘미나가 야단법석을 떨며 삼천포로 빠지려 했기에, 나는 황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어제는 아니었지만, 회복 마법을 얻은 지금의 나로서는 보상을 받기 위해 네크로맨서를 몹시 잡고 싶었다. 원래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의 표정은 다른 법이니까.
“그치만 이건 너무 중대한 사안─”
“엘미나 님. 제가 신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내일이 돼도, 모레가 돼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많은 부정을 저지르겠죠.”
“그, 그건 그렇지만....”
“잘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녕 세르시아 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무엇일지를 말입니다.”
나는 짐짓 진중한 어조로 설교하듯 말했다.
세르시아 방패는 못 뚫겠지.
“......역시 신탁을 받으신 분은 달라도 뭔가 다르네요. 엘 님 말씀이 옳아요. 가죠! 부정한 존재를 정화하러!”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신탁을 받은 자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하는 것. 파급효과가 상당했다. 이 부분을 잘만 이용하면, 세르시아 교인들에게 톡톡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도?
아니, 그건 너무 인간쓰레기 같군.
사이비 종교의 교주나 할 법한 행동이다.
그냥 네크로맨서를 잡아서, 정정당당하게 성수나 요구해보도록 하자.
“좋습니다! 갑시다!”
“네에!”
우리는 의욕이 충만하여 네크로맨서 수색을 재개했다.
솔직히 어디에 숨어있을지 대충 감이 왔다.
저편에 보이는 산. 암석의 비중이 높은 산이라, 케른헴의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돌산이라고 불린다. 동굴이 많다는 특성이나, 언데드의 출현 빈도로 미루어보면 네크로맨서는 저 돌산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어제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지만, 시간을 끄느라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일행들을 이끌고 돌산으로 향했다.
“......근데 네크로맨서는 어떻게 싸웁니까?”
그러고 보니 네크로맨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적어도 놈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정도는 알아둬야 편할 것 같았기에, 함께 걷고 있는 몬스터 박사 엘미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망자를 되살려서 하수인으로 부리며 싸워요.”
어디 먼지가 수북이 쌓인 교과서에 적혀있을 것 같은 고루한 답변이었다.
“아니, 그건 저도 압니다만... 다른 건 없습니까? 그래도 흑마법사의 일종이니, 뭔가 공격 마법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그런 거요.”
“보통은 강령술 이외의 흑마법은 잘 다루지 못한다고 해요. 분야가 엄연히 다르니까요. 으음... 회복 마법사와 공격 마법사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오.”
그래, 이게 몬스터 박사 엘미나지.
이해가 쏙쏙 되는 비유였다.
회복 마법과 공격 마법을 모두 다루는 자는 흔치 않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능통할 수는 없는 노릇. 어느 하나는 주력으로 삼고, 어느 하나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흑마법도 이와 비슷한 모양이다.
강령술을 주력으로 삼는 자는, 저주를 비롯한 다른 분야의 마법은 다루지 못하고, 설령 다룬다 해도 썩 대단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그럼 혹시... 네크로맨서한테 회복 마법을 쓰면 언데드처럼 불타버립니까?”
나는 네크로맨서에게 홀리 리버커리를 사용하면 데미지가 들어갈까 궁금해서 물었으나, 엘미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아요. 그것은 부정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한 존재. 회복 마법을 쓰면 오히려 도와주는 꼴이에요.”
“흠, 그렇군요.”
“오직... 죽음으로써 정화시켜야 해요! 신의 섭리대로 영면에 들게 하고! 죄악에 젖은 육체를 불로 태워서! 영혼조차 울부짖을 만큼! 잿더미만 남을 때까지! 세상에 흔적─”
“지, 진정하세요.”
엘미나는 그라데이션 분노가 치밀어 오른 모양인지, 말하면서 점점 더 격앙되어갔다. 만약 네크로맨서가 산 채로 그녀에게 붙잡히면,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험한 짓을 당할 게 분명하다.
뭐, 산 채로 잡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곧 목표했던 돌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여기가 맞는 것 같군.’
돌산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언데드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딱딱딱딱딱딱
아처, 메이지, 워리어 등 다양한 스켈레톤 시리즈가 턱을 딱딱 부딪치며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두 명의 수습 성기사와 함께, 스켈레톤 무리를 향해 달려 나가 검을 휘둘렀다.
─뽀각!
해골이 부서지는 상쾌한 소리.
손끝에 찌르르한 쾌감이 몰려온다.
“역시 손맛은 스켈레톤이지!”
나는 수습 성기사처럼 검에 신성력을 씌우는 스킬은 없다. 그렇기에 조각조각 분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네크로맨서를 만나기 전에 몸을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뽀각! 뽀각! 퍼석!
***
음습한 동굴 안.
한 사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주변에는 인간을 비롯한 몬스터와 짐승들의 썩은 사체가 악취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세르시아의 사냥개들인가.”
그는 자신의 파밀리어인 들쥐와 시야를 공유하며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들쥐의 시력은 인간의 그것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근거리에 있는 것 정도는 식별할 만했다.
“사제가 하나 있고... 저건 수습 성기사인가? 하, 이거 완전히 얕보였군.”
낌새를 눈치채고 흔적을 추적해 이곳까지 온 것은 박수를 쳐줄 만했으나, 전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정식 성기사도 아니고 수습을 데려오다니?
네크로맨서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
“저따위 잡졸들은 경 혼자서도 충분하지. 안 그런가, 루터 경?”
그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서 있는 언데드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캬악!”
“이런, 알았네. 내가 사과하지. 경을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었어. 크크크.”
돌아온 건 대답 아닌 괴성뿐이었으나, 네크로맨서는 마치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 일생일대의 역작인 경이라면, 수습 성기사가 아니라 정식 성기사가 와도 문제없겠지.”
데스나이트.
생전에 기사였던 자가 언데드화한 것.
언데드 중에서는 최상위급 개체다.
네크로맨서라면 누구나 데스나이트를 원하지만, 제작과정이 쉽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기사의 육체를 구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
하지만 자신은 운이 좋았다.
한 달쯤 전, 기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우연히 접한 것이다.
“경처럼 강한 기사가... 어째서?”
마침 자신은 그 근방에 머물고 있었고, 정보를 더 수집해 무덤의 위치까지 파악했다. 그렇게 야밤을 틈타 파헤친 무덤 속에는 싱싱한 기사의 시체가 고이 안치되어있었다.
비록 목과 오른팔이 잘려있었지만, 무덤 안에 함께 들어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까짓 거 다시 붙이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챙겨온 기사의 시체를, 이 동굴에 틀어박혀서 되살려냈다. 강령술 실력이 부족한 탓에 한 달이나 걸렸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생전의 실력을 대부분 복원한,
오러를 쓰는 데스나이트를 만들어냈으니.
“수습 성기사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사제가 조금 걱정이군. 경은 언데드라 회복 마법에 취약하니까 말이지.”
“......캬악!”
“하하하! 그런가? 하긴, 사제의 느릿느릿한 마법 따위에 경이 맞아줄 리가 없지.”
기사는 마법사의 천적. 사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동굴에는 네크로맨서이자 저주술사인 자신이 걸어둔 저주가 득실득실하다. 이곳으로 세르시아의 사냥개들을 유인하면, 사제는 해주만 하기에도 벅찰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저놈은 뭐지?”
세르시아의 사냥개 셋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스켈레톤을 분쇄하고 있는 녀석이.
“성기사는 아닌 것 같고... 길 안내를 맡은 모험가인가?”
검에 신성력도 없고, 마법도 쓰지 않고 있다. 체인메일을 입고 그저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면, 실력이 형편없는 하급 모험가 정도로 보였다.
“저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건 그렇고... 사제와 성기사를 언데드로 만들면 어떤 걸작이 탄생할지 아주 기대되는군. 빨리 이곳으로 와줬으면 좋겠어. 크크크.”
***
“아니, 아까부터 뭔 쥐새끼 하나가 계속 따라오는 것 같네.”
우리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나?
웬 들쥐 한 마리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슬금슬금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관심 없는 척 걷다가, 돌연 휙! 돌아서 들쥐에게 쇄도해 검을 내리찍었다.
─찍!
“까, 깜짝이야! 노, 놀랐잖아요, 엘 님... 갑자기 쥐는 왜...?”
“아, 좀 찝찝해서요. 그리고 원래 쥐는 보이는 족족 죽여야 합니다. 역병의 근원이거든요.”
중세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죽였다는 무시무시한 역병 페스트도 쥐가 옮겼지 않은가? 그야말로 역병의 저주가 따로 없다. 위생을 위해서라도 쥐는 죽이는 것이 좋다.
“아무튼... 언데드가 잔뜩 나오는 걸 보니, 네크로맨서는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 같네요. 서둘러서 동굴을 찾아보죠.”
아무리 내가 케른헴에서 4년을 굴러먹은 모험가라고 할지라도, 동굴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한다. 이 산에 동굴이 많다는 것만 알 뿐. 이제부터는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그렇게 주변을 수색했다.
‘......? 뭐지?’
한동안 돌아다니다 보니 살짝 묘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언데드의 위치가 꼭 이정표 같았다는 점이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빵조각처럼.
어쨌든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언데드가 출현하는 방향을 따라 올라갔다. 우리를 유인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으나, 언데드의 수준으로 미루어보면 그리 대단한 네크로맨서는 아닐 듯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조합이 좋다.
짱짱한 힐러인 수석 사제 엘미나가 있고, 근접전과 마법이 두루 가능한 나, 그리고 몸빵 겸 서브 딜러인 수습 성기사까지. 아주 이상적인 4인 파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이동하니, 곧 동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같은데... 다들 들어가실 거죠?”
“물론이에요. 반드시 정화해야 해요!”
“우리가 앞장서겠네, 형제여.”
당연하다는 듯 두 명의 수습 성기사가 앞장서서 입장했다. 나는 엘미나와 함께 바로 그들을 뒤따라갔다.
기분 나쁜 동굴이었다.
전에 체크 메이트를 얻었던 장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물론 그곳과 비교하면 여긴 별거 아니었지만, 아무튼 음습한 것이 썩 불쾌했다.
초입을 지나니 금세 어두컴컴해졌기에, 라이트를 켜서 주변을 밝혔다.
─화아악!
[금일 사용 가능한 ‘라이트’ - 9회]
환해진 동굴 내부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와 씨. 개징그럽네... 슬슬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죄, 죄악의 냄새예요....”
내가 인상 쓰며 코를 움켜쥐자, 엘미나도 따라서 자신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들어갔을까.
앞장서서 걷던 수습 성기사들이, 돌연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우욱...!”
“구웨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