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94화 (94/200)

성스러운 꿈 (1)

“저도 함께 가겠어요!”

주먹을 불끈 쥔 레이첼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내가 케른헴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중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앨리스 양은 같이 간다면서요. 왜요? 저는? 왜 저를 또다시 혼자 두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불편하세요?”

솔직히 조금 불편하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이 좋은 동네를 놔두고, 뭐 볼 게 있다고 버려진 도시인 케른헴까지 따라오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앨리스는 원래 케른헴에 사는 사람인데요? 거기가 걔 고향입니다.”

“그, 그건....”

말문이 막힌 레이첼은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붙잡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레이첼 님이 왜 혼자입니까? 아버지인 밀러 백작님이 계시잖아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는 남자다.

그는 아마 레이첼과 백작 작위를 놓고 선택하라면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레이첼을 택할 것이다. 그런 딸바보 아빠를 두고 자신을 ‘혼자’라고 칭하는 것은, 사춘기 소녀나 할 법한 행동이다.

“그치만 아버님은 당신이 아니잖아요!”

“어허! 그런 부모 가슴에 비수를 꽂는 소릴!”

레이첼은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집착한다.

나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악몽에서 내가 꺼내줬으니까. 비정상적으로 나에게 의존할 만하다.

하지만 집착이 심해지면 피곤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병적인 집착이 더 심해지기 전에, 이번 기회를 빌미로 삼아 떨어져 있을 생각이다.

물론 상급 마법서를 받으러 다시 돌아와야겠지만, 일정 기간이라도 멀어져 있으면 그녀의 집착이 조금 옅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저는 케른헴으로 갈 겁니다. 거기서 해야 할 일도 좀 있고.”

“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제가 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저는 단지... 저도 같이 데려가 달라는 것뿐이에요.”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절해 보이는 그 모습에 동정심도 일었으나, 그녀는 이곳에 남아있어야 한다.

“밀러 백작님께서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 하나뿐인 딸이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습니까? 옆에서 아버지를 도와드려야죠.”

그녀가 남아있어야 내게도 이득이다.

그래야 밀러 백작이 기반을 더 빨리 다질 수 있을 테니까.

백작의 외동딸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 그녀가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점령지의 안정화 작업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뭐 하다못해 귀족들의 사교모임에 나가주기만 해도 밀러 백작의 입지를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상급 마법서도 더 빨리 받을 수 있겠지.

“지난 일 년간 잠들어있는 레이첼 님을 백작님이 보살피셨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아시겠죠?”

“그치만... 깨워준 건 당신이잖아요. 당신에게 갚을 은혜가 더 큰걸요? 그러니 저도 같이─”

“레이첼 님.”

내가 돌연 말을 끊고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레이첼이 사뭇 긴장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네...?”

“자꾸 이러시면 저 다시 안 돌아옵니다.”

“?! 그... 그... 그... 그... 아....”

그녀는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한동안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문장을 완성했다.

“......알겠어요.”

“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음... 전쟁이 끝나고 안정화까지 완료되면?”

내가 그리 말하자, 순간 레이첼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화까지....... 그래요, 알겠어요. 엘이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돕겠어요.”

박수를 쳐줄 만한 아주 훌륭한 자세였다.

......설마 전면전에 참여하는 건 아니겠지?

***

나는 밀러 백작성에서 나흘을 더 머물다가, 앨리스와 함께 케른헴으로 출발했다.

─달그락달그락

나흘이나 더 머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이 마법서 때문이다.

마법서 ‘일렉트릭 오브’

두 번의 영지전에 참전하면서 밀러 백작에게 받은 돈이 총 80골드나 됐기에, 오리아에 있는 타스모스 학파에서 마법서를 구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중급 마법서부터는 주문을 받고 나서 제작을 시작하니까.

무슨 마법을 구입할지 제법 고민했었지만, 결국엔 중급 마법의 대명사라 불리는 ‘오브’를 선택했다. 내가 직접 써본 바에 의하면, 오브만큼 범용성이 좋은 마법도 없었다.

그리고 전격 마법사가 전격 속성의 오브는 못 쓰고, 플레임 오브와 프로스트 오브만 쓸 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돈이 있을 때 샀다.

─탁!

아무튼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며 읽고 있던 마법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 ‘일렉트릭 오브’를 배웠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릭 오브’ - 5회]

‘크으... 5회나 주다니. 인심이 후하구만.’

승격 이후로 눈에 띄게 변한 부분이 이거다.

전격 속성 마법의 횟수와 위력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물론 다른 속성의 마법도 늘어나긴 했다.

이를테면 불 속성의 ‘플레임 오브’.

승격 이전에는 2회 사용 가능했지만, 지금은 3회로 소폭 늘었다. 위력도 마찬가지로 소폭 증가했다.

‘콜링 썬더’가 3회에서 6회로, 그리고 위력도 대폭 늘어난 것에 비하면 미미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 진짜 마법사라 이건가...?’

굳이 따지자면 나는 승격 퀘스트를 마친 이후로 ‘고위 마법사’의 반열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고위 마법사는 상급 마법을 다루는 자를 말한다.

물론 아직 다룰 수 있는 상급 마법이 없으니 고위 마법사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거나 배울 수는 있다. 그리고 마법만 없다뿐이지, 능력치는 올랐으니까.

고위 마법사는 진짜 마법사다.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선택받은 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경지다. 왜냐하면 상급 마법부터는 속성이 ‘트리플’이상인 사람만이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격 속성이 강화된 것 같은데....’

나는 하드웨어만큼은 고위 마법사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그에 걸맞게 변화가 발생한 것 같았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니?”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마차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마법서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러니? 하나도 모르겠어? 돈 낭비한 것 같아? 으이구!”

“아아, 날 뭘로 보는 거냐. 벌써 완벽히 이해했다.”

사실 앨리스가 말한 것처럼 마법서의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실토하긴 부끄러우니 거만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쨌든 실제로 습득하긴 했으니까.

“......근데 너 말투가 건방진데? 감히 나를 놀려? 예절 주입 좀 해줘?”

“미, 미안...! 그,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 드디어 케른헴으로 돌아가고 있잖니?”

“케른헴으로 가는 게 기분이 좋다고? 왜? 거기에 가면 밀러 백작성에서처럼 고급 음식을 먹긴 어려울 텐데.”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

백작성에서의 생활을 가장 잘 즐긴 사람은 단연코 앨리스였기 때문이다. 그저 방에 앉아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하녀가 알아서 준비해주니, 먹는 걸 좋아하는 앨리스에게는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으응... 거긴 음식이 참 맛있지만... 조금 불편했거든.”

“......?”

앨리스는 쭈뼛쭈뼛하며 말을 이었다.

“뭐랄까... 무섭다고 해야 하나? 가끔 그 여자를 만나면 그런 느낌이 드는 거 있지?”

“그 여자라면... 레이첼? 레이첼이 왜? 설마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아니이...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심지어 이 마차에는 우리 둘뿐인데도.

“우리가 떠날 때 나한테 웃으면서 말하더라구. 엘한테 손대지 말라고 말이야.”

“.......”

“뭔가 오해했나 봐. 나는 이제 인간을 해치지 않기로 마음먹었잖니? 내가 너한테 손댈 리가 없는데... 하여튼 인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그 손이 그 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거나 앨리스가 인간 타령을 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너 슬슬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을 때가 되지 않았나?”

“맞아. 어제부터 다른 걸 흉내 낼 수 있게 됐어.”

앨리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으나, 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어제부터? 근데 왜 어제 말 안 했어?”

“응? 그거야 이거 때문이지.”

그녀는 입고 있던 로브의 목 부분을 손으로 끌어내렸다.

“마나 속박 고리? 그게 뭐?”

“어차피 이걸 차고 있으면 모습을 바꿀 수 없거든. 그래서 천천히 말해주려고 생각했다가 깜빡했지 뭐야.”

과연. 도플갱어가 다른 존재의 모습을 복제하는 것은 마법으로 취급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런 황당한 일이 마법이 아니면 뭐가 마법이겠냐마는.

“그래서 마법사는 언제 잡아줄 거니?”

“흠... 좀 기다려봐. 뛰어난 마법사는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도 그저 그런 마법사가 되기는 싫을 거 아니야?”

“으응, 그렇긴 해.”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제’ 마법을 얻느냐보다,

‘어떤’ 마법을 얻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

닷새를 달려온 끝에 드디어 케른헴에 도착했다.

“아오... 허리 아파 죽겠네. 온갖 마법이 다 있는 세상이면서 왜 공간이동 마법은 없는 거야?”

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허리를 두드리며 툴툴대고 있으니, 곧 앨리스도 내려왔다. 그녀 역시 장기간의 여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피곤해... 얼른 쉬고 싶어....”

“그래, 일단 여관부터 잡으... 잠깐, 아니지. 나 집이 있었잖아?”

까먹고 있었다.

결투 재판에서 승리하고 피어슨 남작에게 받은 돈으로 케른헴에 낡은 건물을 하나 매입했었다.

“너무 잠깐만 머물고 떠나서 잊고 있었네. 자, 가자. 집으로!”

왠지 옷장에다 처박아둔 겨울옷에서, 잊고 있었던 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그렇게 신나게 집으로 향했지만, 앨리스만 들여보내고 바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는 허리만 조금 아플 뿐 별로 피곤하지도 않을뿐더러, 모험가 길드에 가봐야 했기 때문이다.

‘별일 없으려나...?’

케른헴은 보통 내가 다른 지역에서 뭔가를 하다가 돌아오면,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해있는 경향이 있었다.

수배범을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돌아왔을 때는 메두사가 출현해 있었고, 청색 마탑에서 머물다가 돌아왔을 때는 피어슨 남작과의 던전 분쟁이 진행 중이었다.

물론 그건 내가 무슨 불길한 존재여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웠다가 오랜만에 돌아왔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별일이 없더라도, 모험가 길드는 내 우체통 같은 곳이기 때문에 수시로 들러줘야 한다. 나는 내게 전할 서신이 있으면, 케른헴의 모험가 길드로 보내라고 하니까.

‘통신 마법도 없고, 공간이동 마법도 없고. 하여튼 정작 중요한 마법은 하나도 없는 세상이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곧 모험가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익

이곳의 문을 열 때마다 발생하는 매우 익숙한 소음이다. 진짜로 나는 이 소리만 듣고도 케른헴의 모험가 길드임을 판별할 수 있다.

애매한 오후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길드 내부는 제법 부산스러웠다.

“내일 아침 고블린 토벌을 함께하실 C급!”

“오늘 밤 스켈레톤을 잡으러 가실 분 있소?”

“동쪽으로 좀비 사냥하러 가실 B급 모험가 찾아요!”

스켈레톤? 좀비? 언제부터 케른헴에 저딴 언데드가 출몰하기 시작했지? 상당히 의아했다.

케른헴에는 언데드가 없다. 좀비야 겨울에 공동묘지에 가면 가끔 나타나긴 했으나, 매우 약하다. C급은커녕 D급으로도 상대할 만한데 왜 B급을 모집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접수대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길드 여직원은 뭔가 서류를 작성하느라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똑똑

“......? 아, 엘 씨! 오랜만에 뵙네요!”

내가 접수대를 손으로 두들기자,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예, 오랜만입니다. 근데 뭡니까? 왜 케른헴에 저런 마물들이 나타난 거죠? 설마 던전에서 몇 마리 빠져나왔나?”

지난번에 결투 재판으로 얻어낸 던전은 지하 묘지였다. 그곳엔 스켈레톤도, 좀비도 있었으니 혹시 거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어 물었다.

“아니요. 던전과는 별개예요. 한 일주일쯤 됐나? 그때부터 동쪽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왜인지 토벌을 해도 수가 줄지 않더라구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별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중부지방에서 기사를 잔뜩 잡다가 왔는데, 고작 하급 언데드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런 건 시시하고 돈도 안 되고... 아니, 아니지. 그래도 언데드잖아?’

내가 케른헴에 돌아온 목적 중 하나는 치료 사제 엘미나의 마법을 얻기 위해서다. 신성 마법이라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실한 사제를 술집으로 불러내 술을 왕창 먹이고 재울 수는 없는 노릇.

고대의 던전에서처럼 뭔가 함께 행동할 계기가 필요했는데, 언데드라면 눈이 뒤집히는 세르시아 교단의 특성상 이건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직원에게 더 상세히 질문했다.

“등장하는 좀비가 좀 강한 편인가 보죠? 방금 게시판 앞에서 파티원을 모집하는 소릴 들어보니 B급을 구하던데.”

“네. 일반적인 좀비는 아니에요. 보통 좀비는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있고 약하잖아요? 그런데 이 좀비들은 달라요. 마치... 좀비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직원은 돌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이건 엘 씨니까 알려드리는 건데요, 길드장님이 말씀하시길 네크로맨서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해요.”

“네크로맨서요?”

“쉿! 다른 모험가들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세요.”

그럼 모험가가 아니면 말해도 된다는 거네.

이걸 빌미로 엘미나를 꾀어내야겠다.

독실한 세르시아 교인이자 치료 사제인 그녀에게 사악한 네크로맨서를 같이 잡으러 가자고 말한다? 이건 뭐 프로포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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