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지전 (3)
─탓탓탓!
브룩스 자작의 기사 쉐인.
그는 또 다른 기사 빈센트와 함께 용병으로 위장하고, 밀러 백작의 마법사들을 처치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치졸하고 비겁한 행위였지만,
기사로서의 명예를 갉아먹는 행위였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정당하고 명예로운 일만 골라 해서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없다. 명예롭지만 가난한 기사보다는, 비겁하더라도 윤택한 기사가 되리라. 말콤 브룩스가 약속한 보상을 받으면 여생을 놀고먹으며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쪽이 쉽기도 하지. 크크크.’
고작 마법사를 처치하는 일이다.
정면에서 밀러 백작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안전하다. 머릿속에 허영심만 가득한 멍청이들이 기사를 상대하겠다고 자원해준 덕에, 자신은 편안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전장을 우회해서 얼마간 달리다 보니, 마법사를 호위하고 있는 밀러 백작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급히 소리치며 방어대형을 갖췄다.
“적이다!”
“좌측에 적 출현!”
“마법사를 보호해라!”
우습군. 고작 너희들 따위가 기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쉐인은 코웃음 치며 검에 오러를 발산시켰다.
‘마법사는... 셋이군. 아닛! 저놈은...?’
병사들 뒤에 숨어있는 마법사를 살펴보던 쉐인은 눈을 빛냈다.
펑퍼짐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깐족대던 녀석이다.
하급 마법밖에 쓰지 못하는 나약한 녀석이지만, 아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놈이니 처치하면 분명 말콤 브룩스가 추가적인 보상을 줄 것이다.
공명심에 눈이 멀어버린 쉐인은, 옆에서 같이 달리고 있던 동료 기사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병사들은 네가 맡아라. 나는 바로 마법사를 치러 가겠다.”
“뭐? 그러지 말고 함께 행동하는 편이─”
함께? 웃기지도 않는군.
그렇게 말해놓고 내 공적을 가로챌 셈이겠지.
쉐인은 동료 기사의 말을 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달려 나가는 속도를 올렸다. 그러자 곧 호위 병사가 앞을 막아섰다.
“여긴 못 지나간─”
─부욱!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러 병사의 목을 일격에 베어냈다. 쉐인은 그대로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 마법사에게 쇄도했다.
펑퍼짐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벌써 전의를 상실한 듯,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얌전히 서 있으면 깔끔하게 목을 잘라주마!”
역시 마법사는 나약하다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카앙! 끼이이익!
“무, 뭣?!”
쉐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로브 안에 감춰두었던 검을 꺼내서 자신의 검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어째서 마법사가 검을 쓰는 거지?
어떻게 검으로 내 오러를 견디는 거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서, 설마! 네놈이 기사를 죽였다는 그...?”
그놈이 분명했다. 지난번 영지전에서 기사 오마르를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조각조각 분쇄해버렸다는 그놈이!
그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가 오싹해졌지만, 눈앞의 사내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따라 했다.
“얌전히 서 있으면 깔끔하게 벼락을 꽂아주마.”
‘안 돼! 당장 도망쳐야한─’
─번쩍! 번쩍! 번쩍!
─꽈릉! 꽈릉! 꽈릉!
***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0회]
“끄...으....”
내 콜링 썬더를 연달아 맞은 기사가 힘겹게 신음을 흘렸다.
기사 교육과정 중에 쓰러지는 자세에 대한 과목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이 녀석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땅에 꽂은 검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비겁... 하게... 위장을... 하다니....”
녀석은 그게 그렇게 억울했는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기어코 나를 힐난했다. 내로남불의 극치였다.
“무슨 미친 소리야? 나는 원래 마법사인데? 위장은 네가 했지.”
“그... 건....”
마법사가 로브를 입은 게 왜 위장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평소에 체인 메일을 입고 다니는 게 위장이고, 로브를 입은 지금이 진짜 마법사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사이좋게 대화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기사가 한 명 더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녀석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휘오오
내게 바람이 몰려들며 얽히고설켜서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윈드 블레이드’ - 2회]
나는 즉시 그것을 쏘아 보냈다.
─서걱!
“안 돼! 쉐인!!!”
꿇어앉아 있는 기사의 목이 뎅겅 잘리는 것과 동시에, 병사들과 싸우고 있던 또 다른 기사가 절규하며 소리쳤다.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기사 이상의 작위를 가진 자를 처치했습니다. 승격 퀘스트 완료까지 남은 수 - 1명]
“흐흐흐. 마나가 남아도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 기사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검지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도 이리 와.”
“이익...!”
사실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기사와 병사를 잔뜩 처치한 덕에 마나는 충분했으나, 기사를 때려잡는 데에 최적화된 마법인 콜링 썬더의 횟수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기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 있는 척을 해야 한다.
“뭐해? 복수 안 할 거야?”
“크윽!”
나의 뻥카가 먹혀들었는지, 녀석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저 녀석과도 싸우긴 해야 하는데....’
녀석이 그냥 이대로 물러날 리도 없고, 나도 승격 퀘스트 완료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녀석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
콜링 썬더가 없어서 방금처럼 쉽게 처치하긴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못 할 것도 없다. 아직 다른 마법들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지이잉
─치직. 치직.
나는 빛을 숨기기 위해 약하게 시전하고 있었던 스트렝스를 최대로 강화한 뒤, 라이트닝 아머를 캐스팅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로브를 벗어버렸다.
“다들 물러나세요.”
내가 그리 말하자, 기사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이 물러나며 길을 터줬다.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기사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몸에서 발산하는 그 빛... 그리고 마법사답지 않은 복장... 네가 오마르를 처치했다는 용병인가 보군.”
“오마르? 그게 누군데?”
진짜로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으니, 녀석이 버럭 화내며 소리쳤다.
“더러운 자식... 망자의 명예를 모독하다니... 네놈이 지난 영지전에서 죽인 기사의 이름이다! 그리고 방금 죽은 기사는 쉐인이다!”
“아아, 그래? 나는 죽은 자의 이름 따위는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네 이름도 별로 안 궁금해. 너도 곧 죽을 테니까.”
사실 나도 이렇게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일부러 건방지게 말했다.
싸우기 전에 상대를 도발해서 흔들어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적인 전략. 녀석이 화를 내게끔 만들 수 있다면 베스트다.
“이이... 내 이름은 빈센트다!”
안 궁금하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녀석은 부들거리며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했는지, 전신을 감싸고 있던 낡은 망토를 벗어 던지며 구구절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브룩스 자작님의 적을 베는 검이자 그분을 수호하는 방패이며, 사 년 전 호이엔 평야를 두고 벌였던 영지전에서 승리하고 직접 깃발을 꽂은─”
“하암~. 아, 미안.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이야기를 듣느라 잠시 졸았네. 그래서... 그 장황한 소개는 다 끝났어?”
“이, 이 천한 용병 놈이!”
그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어차피 규칙을 깨고 용병으로 위장하는 반칙을 쓴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자신을 포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내 차례인가? 나는 케른헴의 억울한 마법사이자, 눈을 마주친 상대는 반드시 죽여 버리는 중부지방의 메두사 엘이다.”
“......네놈의 그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역시 소문이 난 모양이군.
“그래? 그런데 왜 눈을 피하지 않았지? 눈깔아!”
─사사사삭!
도발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맹렬히 회전하는 얼음덩어리를 생성해서 즉시 날려 보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프로스트 오브’ - 1회]
“허업!”
기습적으로 공격했지만, 역시 투사체 형태의 마법은 속도에 한계가 있었다. 녀석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리며 얼음덩어리를 피해냈다.
“비열한 자식! 기습이냐!”
놈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듯 몸을 움직여서 갑옷에 낀 살얼음을 털어냈다. 그리고 내게 쇄도해서 검을 휘둘렀다.
─카앙!
─타앗!
‘......?’
나는 당황했다. 녀석이 오러가 맺힌 검을 내게 힘껏 한 번 휘두른 뒤, 추가 공격을 하지 않고 바로 몸을 뒤로 내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원을 그리듯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뭐지?’
내 정신을 사납게 만들려는 작전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녀석이 다시 달려들었다.
─카앙!
─타앗!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검을 휘두르고, 거리를 벌려서 전속력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패턴이 반복됐고, 나는 그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보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내 허풍이 너무 잘 먹혀들었구나.’
나는 조금 전까지 여유로운 척 그를 도발했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 버린 녀석은, 내가 콜링 썬더를 더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러는 것이었다.
즉, 남아있지도 않은 콜링 썬더를 피하기 위해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카앙!
─타앗!
“내 벼락이 그렇게 두렵나 보지?”
“.......”
이죽거리며 말했지만, 녀석의 움직임은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검으로 버티면서 체크 메이트로 묶을 생각이었는데....’
한 번씩만 검을 휘두르고 내빼는 바람에 녀석의 공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대신 나도 마법을 맞히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역 슬로우 같은 마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내겐 그런 마법이 없다. 꿈속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오직 공격 마법뿐이니까.
‘......녀석이 움직이는 경로를 예상해서 앞쪽에 미리 체크 메이트를 써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녀석은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나에게서 마법을 쓰는 낌새가 보인다면 즉시 알아차릴 것이었다.
─카앙!
─타앗!
‘속도를 조금만 늦추거나, 잠깐만 한눈팔게 만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아!’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무려 두 명의 중위 마법사가 근처에 있다.
혹시 그들 중에 슬로우 같은 유틸리티 계열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을 품고 슬쩍 눈알을 굴려 그들이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한 명은 윈드 블레이드를 캐스팅해놓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냥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저자들도 뾰족한 수가 없는 듯 보였다.
나는 그들을 대놓고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뭣?!”
내 주변을 빙빙 돌던 기사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고개를 꺾어 중위 마법사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진짜 지금이다!’
나는 기사가 잠시 한눈을 파는 틈에, 그의 앞쪽 경로에 속박의 저주를 모조리 쏟아냈다.
─츠츠츠...
─츠츠츠...
─츠츠츠...
[금일 사용 가능한 ‘체크 메이트’ - 0회]
짙은 황색을 띤 기운이 소리 없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세 번을 연달아 사용했기에, 마치 연막탄이 터진 것처럼 자욱했다.
“이, 이게 뭐지...?”
황색 지대에 발을 디뎠던 기사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늦었다.
자칭 세상을 저주하는 마법사께서 창조해내신 속박의 저주는,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그를 잠식해나갔다.
“흐읍...! 크윽... 네, 네 녀석!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기사는 저주에 저항해보려 허우적거렸지만, 그럴수록 더 옥죄여질 뿐이었다.
‘무슨 마법으로 끝내야 전세에 도움이 될까?’
지난번의 영지전에서 기사를 처치할 때에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었기에, 일부러 보란 듯이 토네이도 랜스를 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싸우느라 바쁘다. 조용한 토네이도 랜스를 써봤자 목격하는 사람도 적을 테고, 전세에 영향을 미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역시 큰 소리로 어그로를 끌려면 이것뿐이겠군.’
─파직. 파직.
모든 마나가 오른손에 몰려들며, 샛노란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매우 오랜만에 사용하는 마법이다. 마나 탈진 때문에 웬만하면 쓰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탈진하지 않을 것이다.
[금일 사용 가능한 ‘라이트닝 블래스트’ - 0회]
기사를 죽임으로써 능력치가 오를 테고,
또 승격 퀘스트를 완료함으로써 능력치가 오를 테니까.
─쩌저저적!!
─꽈르릉!!
번쩍! 그동안 증가한 마나량으로 인해 전에 없이 강렬해진 새하얀 번개 줄기가 기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번개가 지나간 경로의 공기가 팽창하며 귀가 터질 듯한 천둥소리를 만들어냈다.
“우와악!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귀, 귀가... 귀가 아파....”
근처에 있던 호위 병사들이 귀를 틀어막았고,
“컥.”
기사는 짧은 신음을 흘리고 툭, 쓰러졌다.
전장에서 각자 전투를 벌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천지를 뒤덮는 듯한 천둥소리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잠시 멈춰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나도 귀가 아프군.’
삐- 하는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얼굴을 찡그린 채 귀를 후비고 있으니, 곧 메시지들이 잔뜩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승격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조건을 달성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이제부터 상급 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용 가능한 마법 횟수가 증가합니다.]
‘역시... 횟수가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의 보상이었다.
[성장 보조 특성이 강화됩니다!]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반경이 증가합니다.]
‘......또 반경 증가야?’
약간의 실망감이 느껴졌다. 물론 반경이 늘면 꿈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니 좋기는 하지만, 좀 더 특별한 보상이 있을 줄 알았다.
“에잇. 이러면 평소와 다름없는... 어?”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꿈속에서 마법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이 완화됩니다. 이제부터 꿈의 주인에게 동일한 마법을 3회 이상 맞는 경우에도 획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