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지전 (1)
밀러 백작에게서 영지전 참여의 허락을 받아내고 이틀이 흘렀다. 즉, 내일이면 전투가 벌어진다.
나는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레이첼을 바라봤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장에 붙어있는 그녀의 초상화를.
“흐음... 기분이 묘하단 말이지.”
수많은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감시당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밀러 백작이나 기사들은 영지전을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듯했으나, 나는 그저 한가하게 놀고먹을 뿐이었다. 그래야 마나 관리가 잘 된다며 백작이 배려해준 덕분이다.
이번 전쟁은 지난번과는 달리 본격적이다.
기사와 병사가 다수 투입되는 만큼, 나름대로 전략과 진형도 갖추고 싸운다고 한다. 뭐, 그래도 양측의 용병들은 무지성으로 돌격하겠지만.
“나는 어떻게 싸워야 좋을까....”
일단 내 역할은 프리롤이다.
밀러 백작의 병사들과 함께 행동해도 되고, 용병들과 함께 행동해도 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싸워도 좋다고 한다.
“마법사들과 함께 있는 게 좋으려나?”
당연히 이번엔 마법사도 투입된다.
백작은 중위 마법사를 두 명 투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중위 마법사라면 중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용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짜배기 실력자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규모 있는 전투에서 핵심적인 화력을 담당하는 것은, 역시 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사다. 중위 마법사는 그 역할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후방에서 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열심히 딜을 넣는 방식이다.
“흠... 그럼 기사를 잡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나도 다른 중위 마법사들과 함께 후방에서 보호받는다면 비교적 안전하긴 하겠지만, 대신 기사를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영지전에 참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사를 처치하기 위해서다. 최소 한 명 이상은 처치해야 나도 뭔가를 얻는다고 할 수 있는데, 후방에만 있으면 그런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나도 확 무지성으로 돌격해버려? 아니지. 그것도 좀 그런데....”
그렇다고 저번처럼 선봉에 서서 달려 나가자니, 그건 또 위험하다. 적군 중에는 기사가 셋이나 있으니까. 둘만 달라붙어도 힘든데, 셋이나 내게 달라붙으면 답도 없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일 상황을 봐서 즉흥적으로 움직여야지.”
지금 골머리를 싸매고 나 혼자서 고민해봤자,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공산이 크다. 어차피 나는 자유로운 역할이니, 임기응변으로 싸워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 아, 레이첼 님. 들어오시죠.”
방문을 열어보니 레이첼이 서 있었다.
그녀는 몹시 초조한 얼굴을 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앉았다.
“엘... 내일 영지전에 정말 참여하실 거예요?”
“아하하, 또 그 소리십니까.”
“그치만... 위험하잖아요.”
“용병이 원래 다 그런 거죠 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또 난리 치는 건 아니겠지?’
이틀 전, 그러니까 내가 영지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날, 그 소식을 들은 레이첼은 미친 듯이 난리를 피워댔었다.
딱히 나보고 전투에 나가지 말라고 난리를 피운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내 결정을 존중해준다.
“그럼 저도 엘과 함께 전장에─”
“어허! 그 얘기는 다 끝났잖아요?”
다만, 자기도 영지전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날뛰었다. 생명의 은인인 나만 내보낼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솔직히 레이첼 정도면 큰 전력이 되긴 하겠지만, 세상에 그 어떤 영주가 자신의 딸을 전쟁터에 내보내겠는가? 내가 봐도 그건 말이 안 됐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와 밀러 백작은 레이첼을 만류했다. 역시나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그녀답게 고집이 얼마나 세던지, 진땀을 흘려가며 한참을 뜯어말려야 했었다.
“레이첼 님은 그냥 성에서 편히 쉬다가, 승전보나 받아보시면 됩니다.”
나는 가볍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번 영지전도 승리할 확률이 높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최소 용병 수십 명 이상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니까.
그저 기사를 처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일 뿐이었다.
“......알겠어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 절대 죽지 마세요.”
“예에? 왜 그런 소릴....”
니 맘대로 사망 플래그 세우지 말라고!
레이첼은 그저 옅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
대망의 영지전 당일.
밀러 백작령 동부에 있는 경작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밀러 백작은, 저편에 보이는 브룩스 자작의 병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숫자는 얼추 비슷한 것 같군.”
병사 이백과 용병 이백. 도합 사백 명.
이것이 밀러 백작이 준비한 병력이다.
상대측이 근소하게 더 많아 보이기는 했으나, 지난번처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경들이 있으니까 말이지.”
밀러 백작은 자신의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세 명의 기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 투입되는 기사들이다.
비록 고위 기사인 제퍼슨을 넣지는 않았지만, 백작의 믿음은 굳건했다. 이들이 브룩스 자작의 기사보다 기량이 더 출중할 거라고.
물론 이들 중 누군가는 전장에서 사망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밀러 백작은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믿는 수밖에 없다.
“옛! 저희를 선택해주신 백작님의 믿음에, 반드시 승리로 보답하겠습니다!”
전쟁터에 출전할 기사로 선택받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이다.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으며, 섬기는 주군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에 매우 감격한 기사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백작은 그런 그들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아주 믿음직스럽군. 허나 자만하면 안 될 것이야. 경들은 병사를 통솔해야 하고, 또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하니까.”
이번 전투에서 세 명의 기사는 각각 60명의 병사를 통솔한다. 돌격할지, 우회할지, 방어할지, 뭘 할지는 그때그때 기사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나머지 20명의 병사는 후방에 있는 두 명의 중위 마법사를 보호한다.
“용병들이 문제인데... 웬만하면 그들도 나의 병사들과 발을 맞춰줬으면 좋겠군.”
사실 정규군의 비율이 절반이나 된다는 시점에서부터, 용병은 그렇게 가치가 높은 병력은 아니었다. 병사들과 달리 그들은 지휘통제도 잘 안되고.
그래도 눈치껏 기사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과 함께 움직여준다면, 훨씬 전술적인 전투가 가능할 것이었다.
“그럼 제가 용병들에게 가서 백작님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아무리 용병이 주력이 아니라고는 해도 막무가내로 돌격하다가 헛되이 죽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밀러 백작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엘이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히고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브룩스 자작의 병력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의 히든카드도 용병이니 말이야.”
그는 비록 용병이지만, 이 전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양측의 전력이 엇비슷한 지금, 엘이라는 히든카드가 얼마나 해주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반면, 경작지의 반대쪽.
브룩스 자작의 진영.
브룩스 자작의 둘째 아들이자, 지난 영지전의 책임자였던 말콤 브룩스는 이를 갈며 반대편을 노려보았다.
“지난번의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주마....”
지난 영지전에서 용병에게 기사를 잃었다.
심지어 기사에게 전장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것은 말콤 자신이었다. 즉, 기사를 잃은 것과 패전의 책임은 온전히 말콤 브룩스가 뒤집어썼다는 뜻이다.
그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얼마나 호되게 문책을 당했던가. 하마터면 아예 눈 밖에 나버릴 뻔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빌고 또 빌어서 간신히 얻어낸 기회다. 이번마저 패배한다면 말콤은 자작가에서 쫓겨나, 다른 가문의 밑으로 들어가 기사 노릇을 해야 한다. 그게 신뢰를 잃은 차남의 말로이니까.
평생 남을 모시며 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는 말콤으로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번 전쟁을 승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해왔다.
“도련님께서는 승리하실 겁니다.”
“저희가 그렇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는 말콤에게 두 명의 용병이 다가와 격려했다.
“그래... 내가 준비한 경들이 있으니 말이지. 큭큭.”
이 두 명의 용병은 용병이 아니었다.
말콤의 지시를 받고 용병으로 변장한, 브룩스 자작가의 기사였다.
그렇다.
말콤은 세 명의 기사를 투입하겠다고 하고,
실제로는 다섯 명의 기사를 투입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극도로 분노하시겠지만... 승리한다면 분명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겠지.”
사실 이것은 매우 치졸한 행위이다.
전장에 기사를 얼마나 투입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거짓으로 통보하고 또 용병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탄 받을 만한 일이다.
귀족 세계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는 것.
브룩스 자작이 허락할 리가 없었기에, 말콤은 은밀하게 준비했다. 아버지가 아침에 호위 기사만 대동해서 사냥을 나간 틈에, 가문에 있는 모든 기사를 데려온 것이다.
자작의 아들들과 호위 기사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기사가 브룩스 자작의 전력이다.
말콤은 이번 전투에 모든 걸 걸었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도련님. 자작님께서 체면이 조금 상하시겠지만, 밀러 백작의 기사 셋을 처치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분명히 기뻐하실 겁니다.”
“역시 경도 그렇게 생각하나? 큭큭.”
기사가 동의해주자, 말콤은 자신이 옳은 행동을 한 것이라며 자기합리화했다.
“어쨌든 경들은 용병인 척 싸우며 전황을 지켜보다가, 밀러 백작의 기사의 위치가 파악되면 우회하라고. 우회해서 놈의 마법사들을 죽여 버리란 말이야.”
이것이 말콤이 준비한 전략이다.
양측의 기사들이 중앙에서 전투를 벌일 때,
용병으로 둔갑시킨 두 명의 기사를 적진의 후방으로 우회시켜 마법사들을 처치한다. 성공적으로 처치한다면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후방교란까지 일으킬 수 있다.
“내가 봐도 기가 막힌 작전이군. 이건 실패할 수가 없어.”
말콤이 자신의 전략에 심취해서 중얼거리자, 용병으로 변장한 기사가 슬쩍 우려하는 바를 전했다.
“저... 그런데 도련님. 또 그놈이 있으면 어떡합니까? 지난 전투에서 오마르 경을 죽인 용병 마법사 말입니다. 그놈이 후방에 있으면 마법사들을 처치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쯧, 경이 그렇게 겁이 많은 줄은 몰랐군.”
말콤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주자면 그놈도 이번 전투에 출전했다고 한다. 첩자에게 들어보니 아예 백작성에 눌러앉아서 레이첼 그년이랑 붙어 다닌다고 하더군.”
“그, 그럼 도련님의 작전을 수행하기가....”
“하지만 걱정 마라. 딱 봐도 레이첼이 꼬리를 쳐서 그놈의 혼을 쏙 빼놓은 모양인데, 그런 놈이 얌전히 후방에 있겠나? 공명심에 눈이 멀어 선봉에 나서겠지. 그 여우 같은 계집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서 말이야.”
“오오... 그렇습니까.”
말콤이 단호하게 말하자, 기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큭큭. 경들은 아무 걱정 말고 마법사의 목을 벤 뒤, 중앙에 합류해서 다른 기사들을 도우면 돼. 내가 틀릴 리가 없으니까.”
***
─척! 척! 척!
‘흐음. 확실히 다르긴 다르단 말이지.’
나는 내 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갖추는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지휘하는 기사가 있어서 그런 모양인지, 지난번보다 훨씬 체계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연히 용병들은 일렬로 대충 서 있었고.
아무튼 나는 일단 후방에서 중위 마법사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뛰쳐나가기보다는, 후방에서 상황을 좀 지켜보다가 움직일 생각이다.
나는 옆에 있는 중위 마법사에게 물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면 마법을 쓰면 되는 겁니까?”
“예. 보통은 시작과 동시에 전진해서 사거리가 닿을 때쯤부터 마법 교전을 벌이지만, 엘 님은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따로 생각이 있으시다면 횟수를 아껴두셔도 괜찮습니다.”
과연. 후방에 있는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법의 사거리가 닿을 만큼은 전진해야겠지.
어쨌든 나는 역할이 고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꼭 이들과 함께 마법을 쓸 필요는 없는 듯했다.
‘기사에게 쓸 마법을 남겨둬야 하니 처음부터 너무 난사하면 안 되겠군.’
회중시계를 꺼내서 확인해보니 곧 정오였다.
나는 그것을 다시 품에 넣고 로브를 푹 눌러썼다.
이번에는 위장을 위해 로브를 입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복장으로 싸우면 적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거나, 또는 적들이 나를 피할 가능성이 있다. 나름대로 내 외형에 대한 정보가 퍼졌을 테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렇게 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사들이 투입되는 전투라면, 기사가 마법사를 노리러 올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퀘스트가 없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싸우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적진으로 돌아가서 마법사부터 처치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적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로브를 입었다. 당연히 로브 안에는 평소처럼 방어구를 착용했고.
─뿌우우!
─부우우!
드디어 정오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전원 천천히 전진해라!”
앞쪽에 있던 기사가 큰 소리로 지휘하자, 기수가 밀러 백작가의 깃발을 높게 치켜들고 앞장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을 따라, 나머지 병사들도 일사불란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두 명의 중위 마법사와 함께 이동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 나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중위 마법사들이 기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기부터 마법의 사정권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의 마법이 닿는 거리였다.
그러자 세 명의 기사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각자의 지휘관을 따르라!!!”””
“와아아!”
“가자!”
병사들도 세 갈래로 나뉘며 달려 나갔다.
─휘이이익!
─쿠콰콰쾅!
나와 함께 있던 중위 마법사들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마법을 캐스팅했다.
─화르르륵!
[금일 사용 가능한 ‘플레임 오브’ - 1회]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