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 백작가 (3)
“엘은 이쪽 방에서 머무시면 돼요.”
레이첼이 웃으며 안내해준 장소는 백작성 4층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호화로운 방이었다.
“오....”
널찍한 실내에 푹신푹신한 침대, 고급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파, 고풍스러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기타 가구들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섬세한 손길이 닿은 덕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으나, 이건 손님을 위한 방이 아닌 듯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아, 예. 근데 벽에 걸려있는 저것들은....”
왜냐하면 벽에 레이첼의 초상화가 다닥다닥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웃는 레이첼, 어린 레이첼, 자고 있는 레이첼, 창밖을 내다보는 레이첼, 정원에서 꽃향기를 맡는 레이첼, 강아지를 쓰다듬는 레이첼.
온갖 버전의 레이첼이 벽면을 가득 메웠다.
하나같이 보기 좋은 명화였으나, 이건 좀 과한 감이 있었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엘.”
내가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내듯 흔들자, 레이첼이 고개를 끼익 돌려서 나를 올려다봤다.
“제...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녀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그, 그럴 리가요. 눈이 호강하는 기분입니다. 아하하... 와...! 치, 침대 위 천장에도 붙어있네? 이거 기분 좋게 눈뜨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는걸?”
“어머, 정말요? 역시... 당신이라면 좋아해 주실 줄 알았어요!”
언제 그랬었냐는 듯, 그녀는 눈동자를 밝게 빛내며 기뻐했다.
아무튼 천장에까지 큼지막한 초상화가 붙어있는 걸 보면, 여긴 분명히 손님들을 위한 방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위치도 너무 구석진 느낌이다. 방을 드나들려면 좁은 통로를 거쳐야 한다.
“흐음. 근데 여긴 손님을 위한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 귀빈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앨리스가 머물고 있는 곳 말입니다.”
“......쪽이요.”
“네?”
“서쪽이요.”
매우 부실한 답변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세상의 절반은 서쪽이다. 그냥 서쪽이라고만 설명하면 알아들을 턱이 없다.
“서쪽 어디요? 몇 층?”
“......2층 서쪽 끝이요. 그건 그렇고 제 방은 저기예요. 엘이 머무는 방과 가깝죠? 심심하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된답니다?”
레이첼은 귀빈실의 위치에 대해서는 매우 짤막하게 스쳐 가듯 설명한 뒤, 딱히 묻지도 않은 자신의 방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의 방은 내가 서 있는 좁은 통로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내 방을 오고 가려면 레이첼의 방 앞을 지나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습니까? 의외네요. 레이첼 님의 방이 이런 구석진 곳에 있다니.”
레이첼은 밀러 백작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이다. 어머니는 진즉 여의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그녀는 백작가 서열 2위인데, 왜 좀 더 좋은 곳이 아니라 이런 외진 곳에 살까.
“아, 그, 그게... 저는 새 삶을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 겸해서 방을 옮겼어요. 아, 아직 다른 사람들도 믿지 못하겠고... 여기가 겨, 경치도 좋아서....”
“......? 그러시군요.”
그녀는 몹시 난처해하며 횡설수설했다.
그냥 이사했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거지?
어쨌든 나는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밀러 백작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버님이요? 집무실에 계실걸요?”
브룩스 자작의 선전포고.
아까 전 연무장에서 기사가 들고 온 소식을 들은 나는, 전투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밀러 백작은 가문의 은인으로 온 손님을 전투에 내보내는 가주가 세상에 어디 있냐며,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했다.
뭐,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나는 승격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밀러 백작을 찾아가 다시 한번 설득해볼 생각이다.
“백작님의 집무실은 어딘데요?”
“3층 중앙 계단에서 우측에 있어요. 찾기 어려우시면 성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아니,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상세히 설명하던 레이첼은 자기가 직접 데려다주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내 팔을 붙잡았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니면... 혹시 다리에 힘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다든가...? 아까 연무장에서 달려온 것처럼 말이죠. 예?”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레이첼은 황급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아앗, 그, 그러고 보니 다리가 아프네요... 아까 너무 무리를 한 바람에... 죄송하지만 엘 혼자서 가셔야겠어요.”
“흐음... 그러십니까? 아직도 다리가 아프다고요? 뭐, 알겠습니다. 내려가는 김에 방까지는 제가 부축해드리죠.”
어차피 중앙 계단을 내려가려면 레이첼의 방을 지나가야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첼은 감동받았다는 듯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너무 다정해...!”
“빨리 제 팔이나 잡으세요.”
“박력 있어...!
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그녀의 들쭉날쭉한 감정선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이 나이롱환자를 방에 데려다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바로 밀러 백작의 집무실로 향할까 했으나, 앨리스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지 확인부터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2층으로 내려가서 서쪽으로 얼마간 걸어가니, 곧 귀빈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머무는 방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열려있는 문틈으로 내부를 슬쩍 들여다봤다.
“이것 좀 더 주세요! 그리구 이것도!”
“알겠습니다.”
‘......벌써? 식사 시간도 아닌데?’
안에서는 앨리스가 신나게 음식을 먹고 있었고, 하녀는 카트에 담긴 음식을 부지런히 날라서 그녀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안으로 들어가서 아는 체하지 않고, 바로 밀러 백작의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알프레드 밀러 백작의 집무실.
밀러 백작은 선전포고 소식을 들고 온 기사와 함께 영지전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브룩스 자작이 기사와 병사를 얼마나 투입하겠다던가?”
“기사 셋에 병사 이백입니다. 나머지는 용병으로 채우겠다고 하더군요.”
“허, 무리를 하는군.”
백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브룩스 자작이 보유하고 있는 기사는 총 10명. 며칠 전에 하나가 죽었고, 자작의 아들들을 제외하면 6명뿐이다.
그런데 그중 셋을 투입하겠다니?
아무리 이번 선포 지역이 경작지라고는 하지만, 기사 셋을 투입할 정도로 가치가 있지는 않다. 만에 하나 그들을 잃으면 브룩스 자작으로서는 전력의 절반을 잃는 셈이다.
“자작은 자신의 기사가 죽은 것, 특히 고작 용병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고 합니다.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면서 말입니다.”
기사가 보충 설명을 하자, 밀러 백작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고작 용병에게 당했다니? 놈이 못 봐서 그렇지, 엘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다면 그런 소리는 하지 못했을 텐데.”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수백 명의 적을 향해 홀로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던 그 용맹한 뒷모습을. 마법을 뿜어대며 무수한 용병을 쓰러트리던 모습을. 그리고 기사를 압도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마법사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에 장점이 있지만, 근접전투, 특히 기사에게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장점만 있고 단점이 없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도, 고위 기사인 제퍼슨을 제외하면 누구도 엘과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십중팔구는 패배할 것이다.
“아무튼... 이번 선전포고는 감정적이라는 거군. 용병에게 기사를 잃은 것에 대한 복수를 원해서 말이지.”
“예,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기사를 잃었으니, 너도 잃어야 한다.
이게 브룩스 자작의 논리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작은 기사를 얼마나 투입할지 미리 통보하는 것이다. 그래야 밀러 백작도 그에 걸맞은 숫자의 기사를 준비할 테니까.
“허나 나와 그런 식의 소모전을 벌이면 불리한 것은 놈일 터인데....”
기사 셋.
브룩스 자작에겐 보유한 기사의 절반에 해당되는 숫자지만, 밀러 백작에게는 아니다. 서로 똑같이 기사 셋을 잃어도, 브룩스 자작이 훨씬 뼈아프다.
“그만큼 복수에 눈이 먼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그렇게까지 멍청한 작자는 아니었는데.”
밀러 백작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레이첼 때문에 조급해진 모양이군.”
“영애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이가 아닌가? 그 아이가 잠들기 전을 생각해보게. 주변 영주의 아들들이 매일 같이 선물을 보내오지 않았었는가.”
“아! 영애님이 깨어나셨으니, 백작님께 동맹이 생길까 봐 조급해졌다는 말씀이시군요.”
레이첼을 얻으면 밀러 백작령을 얻는다.
방대한 영지와 대도시 라니아, 그리고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모두 외동딸인 그녀의 남편이 승계받는다. 젊은 귀족 남성이라면 누구든 탐낼만하다.
하물며 정략결혼이라는 카드도 있다.
밀러 백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뿐인 딸을 도구처럼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브룩스 자작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서 무리해가며 크게 한판 붙자는 것 같군... 어쩌면 이건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겠어.”
브룩스 자작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한다면, 그리고 기사 셋을 전부 처치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자작령으로 쳐들어갈 만한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밀러 백작도 기사를 잃을 위험성이 있고, 브룩스 자작이 무슨 흉계를 꾸몄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인가?”
─엘입니다, 백작님.
“오,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엘이 들어왔다.
백작은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하고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투는 사흘 뒤라고 했나? 그럼 우리도 서둘러야겠군. 용병을 이백 정도는 고용해야 할 테니 말이야. 당장 인근 도시로 사람을 보내서 공고를 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기사는 즉시 집무실을 떠났다.
“이쪽에 앉게나.”
밀러 백작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엘이 착석하자,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첼이 소개해준 방은 마음에 들던가? 아까 보니 방을 어떻게 꾸밀지 그 아이가 직접 지시하는 것 같던데.”
“아, 그 방이 레이첼 님의 지시대로 방금 꾸며진 거였습니까? 영애님의 초상화가 워낙 많아서 원래부터 그림을 전시해둔 방인 줄 알았는데....”
“......그 방에 레이첼의 초상화가 있다고?”
“네? 네.”
역시.
레이첼은 눈앞에 있는 이 사내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연무장에서 안긴 것도 그렇고, 굳이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둔 것도 그렇다.
밀러 백작은 팔짱을 끼고 엘을 빤히 응시했다.
“흐음.”
“......?”
썩 나쁘지는 않은 사내다.
인물도 이만하면 됐고, 실력도 출중하다.
‘다 괜찮은데 평민이라는 점이......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주책이었다. 레이첼의 감정이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 사내는 레이첼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밀러 백작은 엘에 대한 평가를 미뤄두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흠흠.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저도 영지전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허허...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가문의 손님을 전장으로 내몰 수는 없다네.”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백작으로서도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대접하겠다고 초대해놓고 가문을 위해 대신 싸워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엘은 이미 밀러 백작가를 위해 충분히 많은 일을 해주었다.
“제가 원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지. 마음만 고맙게 받겠네. 나도 염치라는 게 있다네.”
“.......”
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손님이라서 꺼려지시는 거라면... 저를 용병이라고 생각하고 고용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방금 기사와 나누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용병을 이백 명이나 고용하겠다고 하시던데요.”
“그건 그렇네만....”
실제로 엘은 용병이니 고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게다가 기사를 때려잡는 실력까지 갖추고 있으므로, 솔직히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건가? 그것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전쟁에 말일세.”
“저는 밀러 백작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습니다.”
엘은 생각했다.
기사를 잡아서 승격 퀘스트를 해야 한다고. 그리고 하루빨리 밀러 백작가의 위신이 높아져야 고급 마법서를 받기 수월할 거라고.
밀러 백작은 생각했다.
이 사내는 반드시 붙잡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