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 백작가 (2)
밀러 백작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
─달그락달그락
무려 영주이자 백작의 마차이니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고급스러웠으나, 나는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몹시 불편했다.
“.......”
맞은편에 앉아있는 두 명의 사람 때문이다.
한 명은 마차의 주인인 밀러 백작.
그는 딱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워낙 거물이라서 좁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조금 느껴졌다.
다른 한 명은 레이첼.
그녀야말로 내가 정말 불편한 이유였다. 레이첼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나를,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는 앨리스를, 쉴 새 없이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
“......?”
처음 보는 유형의 눈빛이었다. 차갑거나 표독스러운 것도 아니고, 따뜻하거나 다정한 것도 아니고. 뭐라 딱 잘라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그런 게 있었다.
뭔가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입은 꾹 닫은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으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기... 엘. 저 여자는 왜 계속 저렇게 쳐다보는 거니...? 혹시 나 뭐 잘못했어?”
불편함을 느낀 게 나 뿐만은 아니었는지, 옆에 앉아있던 앨리스가 초조한 듯한 얼굴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여자라고 부르면 안 돼. 우리는 평민이니까 레이첼 님이나 아가씨라고 불러야 해. 아무튼... 너는 잘못한 거 없어.”
나 역시 귓속말로 대답하며 호칭을 정정해줬다.
앨리스는 인간 사회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인간보다 훨씬 순수한 면이 있다. 그녀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 해도 대부분은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일 뿐,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음식만 제때 잘 챙겨주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녀석도 없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계속 쳐다보는 거니? 나 무서워.”
“야, 너두? 나도 무서워.”
어쨌든 앨리스만 여관에 놔두고 나 혼자 밀러 백작성으로 가서 눌러앉을 수는 없었기에, 정식으로 앨리스를 소개하고 데려가는 중이었다.
케른헴에서부터 함께한 회복 마법사 동료.
그렇게 소개했다. 앨리스는 레이첼의 치료를 시도한 이력까지 있었으므로, 밀러 백작도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사실 회복 마법사라는 직업 자체가 어딜 가든 프리패스다. 변변한 공격 능력이 없어서 무해하고, 회복 마법 때문에 유익하니까.
“아무튼 앨리스, 너는 웬만하면 말을 아끼는 편이 좋겠어... 아직 예법에 익숙지 않아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으─”
“회복 마법사라고 하셨나요?”
내가 앨리스에게 귓속말로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있으려니, 불쑥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귓속말을 중단하고, 대신 대답했다.
“아, 예. 썩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한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혹시 레이첼 님도 회복 마법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어머, 참 든든하네요. 저희 가문에도 회복 마법사가 있지만, 꼭 앨리스 양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어요.”
레이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백작가쯤 되면 휘하에 회복 마법사도 여럿 있을 것이다. 당연히 B급 모험가 수준인 앨리스보다도 뛰어날 테고. 근데 왜 앨리스한테 도움을 받겠다는 거지?
“앨리스 양은 언제부터 엘의 동료가 된 건가요? 오래되셨나요?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서로 귓속말도 하고.”
레이첼이 여전히 웃으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말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내가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한... 이삼 주 전인가? 던전 탐사를 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죠.”
“아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앨리스 양은 말을 할 줄 모르시나 봐요? 계속 엘이 대신 대답해주네요? 아까 보니 귓속말은 잘하시는 것 같던데.”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왜인지 등줄기를 오싹하게끔 했다. 레이첼의 옆에 앉아있던 밀러 백작도 사뭇 놀란 기색이었다.
‘이런... 내가 너무 무례했나?’
실수한 것 같았다. 아무리 앨리스가 말실수를 할 것 같다고 하더라도, 귀족의 질문에 침묵하게 하고 내가 대신 답변하는 것은 실례인 듯했다.
나는 한껏 움츠러들어 있는 앨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무조건 사과부터 하라고 일러뒀다.
“죄, 죄송해요... 제가 귀족분들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앨리스가 레이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가만 보면 이 녀석도 몬스터가 인간이 되기 위해 참 고생이 많다. 맛있는 걸 많이 먹여줘야겠다.
아무튼 나도 따라서 사과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레이첼 님.”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 앨리스 양이 왜 말을 안 하시는지 궁금했을 뿐이지, 사과를 바라고 그런 게 아니랍니다?”
귀족이란 무섭군. 무서워.
확실히 귀족의 포스라는 게 있었다.
“특히나 엘은... 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후훗.”
웃으니까 더 무섭다.
***
밀러 백작이 통치하는 도시 라니아.
우리는 그 중앙에 있는 백작성에 도착했다.
“와아... 이게 귀족들이 사는 성이니?”
마차에서 내린 앨리스가 눈앞에 우뚝 솟아있는 성채를 올려다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아, 너는 성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겠구나. 그래, 여기가 바로 우리가 당분간 머물 백작성이야. 근사하지?”
“오오, 응! 여기에는 맛있는 것두 많겠지?”
“당연하지. 내가 저번에 여기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거든? 근데 너무 다양한 음식이 나와서, 내가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어.”
“와아아....”
음식 얘기에 앨리스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모든 식사가 그때의 만찬처럼 푸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엄연한 귀빈이니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 적어도 우리가 평소에 먹던 것보다는 훨씬 질이 좋을 것이다.
“엘~, 저 좀 부축해주시면 안 될까요?”
앨리스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마차에서 내려오던 레이첼이 도움을 요청했다.
레이첼은 꿈속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호위 기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나와 밀러 백작만이 예외였다.
“예,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로 옆에 그녀의 아버지가 서 있는데 왜 하필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 원하는 대로 해줬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내가 다가가자, 레이첼은 두 손으로 내 팔 한쪽을 껴안듯이 붙잡았다. 옆에 서 있는 밀러 백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레이첼을 부축해서 성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녀는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이쪽 숙녀분께 서쪽 귀빈실을 하나 내어드리세요.”
이쪽 숙녀분이란 앨리스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옆에 계신 분께는 어떤 방을 내어드릴까요?”
“엘이 머물 방은 이따 제가 직접 안내할 거예요. 저희는 아버님과 함께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으니, 먼저 숙녀분을 안내해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집사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입을 떡 벌린 채 성을 구경하고 있는 앨리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어딥니까?”
“연무장이요.”
“갑자기...?”
순간, 나를 붙잡고 있던 레이첼의 팔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마법. 제 마법을 확인해보고 싶어요.”
“아.”
그래, 아직 그걸 확인해보지 않았었지.
레이첼이 꿈에서 깨어난 뒤로, 그녀는 집중 회복실에만 있었기 때문에 마법을 시험해볼 만한 기회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꽤나 확신하는 상태였지만, 레이첼은 스스로를 의심하는 듯 보였다.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첼 님은 분명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좀 더 자신을 믿어보세요. 저도 레이첼 님을 믿는데,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알겠어요... 고마워요.”
레이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밀러 백작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법? 무슨 마법?”
“아, 레이첼 님이 중그... 크흠. 그건 연무장에서 직접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그만뒀다.
이건 스포일러다. 자식이 대성한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기쁨을 뺏을 수는 없다.
“그런가...? 둘만의 비밀이 참 많은 것 같구먼.”
그런 나의 깊은 뜻도 모르고, 밀러 백작은 섭섭하다는 듯 입맛을 쩍 다시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기에, 나도 레이첼과 함께 그를 뒤따랐다.
연무장은 성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널찍한 공터에는 마법과 궁술 훈련을 위한 과녁이 설치되어 있었고, 스탠드형 옷걸이처럼 생긴 무언가도 잔뜩 박혀있었는데, 이건 아마 검술 훈련을 위한 도구 같았다.
나는 레이첼을 연무장 중앙까지 데려다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백작님과 조금 뒤로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끄덕끄덕. 나는 밀러 백작과 함께 수십 걸음 정도 물러났다.
레이첼은 우두커니 서서 과녁을 바라보고 있었고, 밀러 백작은 그런 레이첼의 뒷모습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그러는... 헛!”
─휘이이익!
돌연 바람이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레이첼의 머리 위로 몰려들며 맹렬히 회전하는 구체가 형성됐다.
과연 쿼드러플답게 빠른 캐스팅 속도였다.
“저, 저건 오브가 아닌가...! 내 딸아이는 트위스터 이외의 중급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는데...?”
밀러 백작은 눈이 튀어나올 듯 경악했고,
“엘!! 이것 좀 봐요!! 당신이 옳았어요!!”
레이첼은 나를 돌아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해맑게 웃는 그녀에게 축하를 건네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콰콰콰!
레이첼이 주변을 찢어발기는 바람의 구체를 대동한 채 내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 머리 위에 그거 달고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여기 현실이야!”
“앗, 너무 기뻐서 깜빡했네요....”
그런 걸 깜빡하면 어떡하냐고.
심지어 레이첼이 쓰는 바람 속성의 오브는, 내가 사용하는 플레임 오브보다 강력하다. 나는 관련 속성이 없지만, 그녀는 쿼드러플의 보정을 받아서다.
─콰지지직!
레이첼이 오브를 쏘아 보내자, 저편에 있던 과녁들이 형편없이 박살 났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오오! 내 딸! 자랑스럽구나!!! 이리 오렴!”
감격에 젖은 밀러 백작은, 달려오는 레이첼을 맞이하기 위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소리쳤다.
─탓탓탓! 와락!
“......?!”
“고마워요! 전부 당신 덕분이야!”
레이첼은 그대로 달려와서 내게 안겼다.
나는 엉거주춤 그녀를 받아서 들었지만, 지금 밀러 백작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기조차 무서웠다.
‘이거... 빡쳐서 내쫓는 거 아니야?’
일단 매우 뻘쭘할 것이다. 자신에게 안길 줄 알고 두 팔을 벌린 채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웬 평민 놈팡이가 자신의 딸을 빼앗았다고 화낼지도 모르겠다. 보상을 받아야 하는 나로서는 퍽 걱정되는 부분이다.
─짝!
돌연 밀러 백작이 벌렸던 양팔을 마주하며 크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그리고 자연스럽게 박수를 쳤다.
마치 원래 박수치기 위해 팔을 벌렸었다는 것처럼.
“후, 훌륭하구나. 레이첼. 아주 훌륭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쿨한 척 박수치며 말하는 백작의 모습에, 내가 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그리고 자네! 자, 자네를 만난 뒤부터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군. 영지전도 그렇고, 내 딸아이도 그렇고. 우리 가문의 귀인이야.”
라고 말했지만, 살짝 이를 악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나는 자칫 딸 바보 밀러 백작이 정말로 마음 상하기 전에, 레이첼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레이첼 님. 이제 그만 백작님께... 잠깐.”
가서 밀러 백작과도 기쁨을 나누라고 말하려던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여자, 나한테 ‘달려’왔잖아?
그동안 멀쩡히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계속 부축해달라고 한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미간을 좁히고 레이첼을 내려다봤다.
“그... 그게....”
그녀도 뭔가 깨달았는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근엄하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백작님!! 백작님!!
저 멀리서 기사 하나가 목이 터져라 백작을 부르며 달려왔다.
“백작님!!”
“뭔가?”
“브룩스 자작이 다시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기사가 다급하게 말하자, 밀러 백작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놈이 또? 후... 기사를 잃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선포지역은 어디지? 지난번과 같은 동쪽 평야인가? 이번에는 용병을 부족함 없이 고용해야겠어.”
“아닙니다! 이번에는 경작지를 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기사와 병사를 투입해서 말입니다!”
“흐음. 그걸 미리 밝혔다는 건... 우리 측도 기사를 내보내라는 소리군. 서로 피를 보자, 이건가.”
밀러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나는 솔깃했다.
기사의 피? 그건 내가 보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