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깨! (2)
진짜로 곤란했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는 선의를 가지고 꿈에 들어왔는데, 이러기 있냐고 진짜.
─휘적휘적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었으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과거에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던 체인메일은, 이제는 가장 악독한 적이 되어 나를 물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건 쉽게 벗을 수도 없다.
서서히 가라앉으며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익사.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 나는 꿈에 들어오자마자 고통스럽게 죽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그럴 순 없지!”
─지이잉
전신에서 이질적인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다리 역시 강화됐기에, 발버둥 치는 속도와 힘도 강해졌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트렝스’ - ∞회]
일단 가라앉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후... 살았네.”
한숨 돌린 나는 차분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다. 바다. 바다. 그리고 작은 섬.
저 멀리, 진짜 멀리멀리에 섬이 하나 있었다. 본래의 크기는 모르겠으나, 너무 멀어서 일단은 작게 보였다.
레이첼은 무조건 저기에 있다.
꿈의 주인이 없는 꿈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자, 그럼 저기로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지?”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마법을 통해 강화된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서 간신히 고개만 수면 위로 내밀고 있을 뿐. 힘이 세졌다고 수영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마법사인데... 뭔가 도움이 되는 마법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없었다.
라이트닝 블래스트? 블리자드? 토네이도 랜스? 콜링 썬더? 강력한 마법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봤지만, 그 마법들이 나를 저 섬까지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아니, 하나 있다.
─사사사삭!
내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 구체가 형성됐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프로스트 오브’ - ∞회]
나는 그것을 그대로 가라앉혔다.
─풍덩!
얼음은 물보다 밀도가 낮다. 물속으로 빠진 커다란 얼음덩어리는, 곧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젠장.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빠각! 오래간만에 치밀어 오른 억울함이 담긴 주먹으로 얼음을 적정 크기로 부쉈다. 그리고 얼음 조각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섬을 향해 나아갔다.
─찰박찰박
“대체 왜 이런 배경의 꿈을 꾸는 거지...?”
무슨 꿈을 꾸는지는 레이첼의 자유겠으나,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라리 해변가에 있는 꿈을 꾸는 게 낫지 않을까. 왜 굳이 저런 무인도에 있어서 날 힘들게 만드는 걸까. 그녀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풍경은 좋았다.
고요하고 넓게 트인 바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평화를 느끼게 해줬다. 물론 나는 얼음을 잡은 손이 시려서 그다지 평화로운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참을 헤엄치다 보니 마침내 섬에 가까워졌다.
“허억... 헉....”
아마 반나절 이상은 달려온 듯했는데,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꿈과 현실의 시간개념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꿈에서의 하루가 현실에서는 한 시간일 수도, 또는 이틀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훨씬 간극이 클 수도 있고.
“육지... 육지다...!”
나는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모래를 한 움큼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섬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무인도의 형태였다. 가장자리에 모래사장이 둘러져있었고, 중앙은 울창한 숲이었다. 퍽 아름답긴 했으나, 당연히 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해안가를 따라 둘러보기로 했다.
─쏴아아
─사박사박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기분 좋은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걸어 나가길 잠시, 모래사장 저편에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첼...!’
그녀는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서, 조용히 바다 너머의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망망대해에서 결국 그녀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몹시 기뻐서, 손을 크게 흔들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레이첼 님!!”
레이첼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다, 당신은...?”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죠?”
“예? 헤엄쳐서 왔는데요.”
나는 가감 없이 설명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횡설수설했다.
“그럴... 리가...? 당신은 분명히... 제 마법에 맞아서 죽었... 그리고 여긴... 아무도 올 수 없는... 나만의....”
레이첼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극도로 혼란스러워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어어, 설마?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심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이렇게 위화감을 느낀다면, 꿈인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어쩌면 죽이지 않고도 깨울 수 있을지도.
나는 옆에서 주문을 걸듯 그녀를 부추겼다.
“그렇죠? 이상하죠? 제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건 뭔가 말이 안 되죠? 그렇습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꿈. 레이첼 님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꿈...?”
레이첼이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거 이거 느낌이 좋은데?
나는 꿈이 깨지기 전에 얼른 나를 어필했다.
“예예! 바로 그겁니다! 꿈이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살아있겠습니까? 참고로 제 이름은 엘입니다. 꼭 기억하시고요. 자, 제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생생하죠? 살아있죠? 그렇습니다. 꿈입니다. 이제 레이첼 님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셔야─”
“그만... 그만해!!!”
레이첼의 외침과 함께 온 세상이 새하얀 빛무리에 사로잡혔다.
‘오오, 이렇게 날로 먹나...?’
─화아악!
***
“흐흐흐.”
나는 웃었다.
“흐흐... 흐흐흐흐. 흐....”
실성한 듯이 웃었다.
왜냐하면 주변 풍경이 익숙했기 때문에.
“흐흐... 시팔... 밀러 백작의 도시라니.”
지난주에 레이첼의 꿈속으로 들어왔었을 때, 무수한 적들로부터 그녀를 지키던 장소였다.
그렇다. 꿈이 깨진 게 아니라, 바뀐 것이다.
게다가 바다에서 반나절을 헤엄친 끝에 겨우 레이첼을 찾아냈으나, 1분 남짓 대화하고 헤어졌다는 사실이 몹시 원통했다. 다시 찾아야 하니까.
나는 분노를 가득 담아 도시 한복판에서 외쳤다.
“으아아! 레이체에엘!!!!!”
그러자, 주변을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내게 몰려들었다.
“꺼져!!!”
“썩 꺼져라!!!”
“사라져!!!”
그래... 지난번에도 이랬었지.
이들은 레이첼의 이름을 들으면 이렇게 돌변한다. 레이첼의 피해망상으로 점철된 이 꿈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녀에게 적대적이니까.
“당장 꺼져!!”
“꺼져라!!”
“아아, 시끄럽군... 흐흐흐....”
─치지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체인 라이트닝’ - ∞회]
나는 너그러운 상태가 아니다. 어차피 이놈들은 적. 고민할 거 없이 전류를 내뿜었다.
“끄아악!”
“커억....”
바닥에 쓰러진 그들을 넘어서 지나갔다.
“흐음.”
주변을 둘러보니, 새삼스레 참 잘 만들어진 꿈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느끼긴 했었지만, 영지전 때문에 직접 이 도시를 방문해보고 나니 진짜 똑같이 구현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실과 다름없는 도시에서 다시 레이첼을 찾아야 한다니.
“......아니지. 꼭 내가 찾으란 법은 없잖아?”
이번엔 네가 나를 찾아와라.
나는 도시를 파괴하며 깽판 치기 시작했다.
─쿠르르... 쾅! 쾅! 쾅!
랜드 라이즈로 지형을 아예 바꿔버리고,
─치익! 화르륵!
불 속성 마법들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번쩍! 꽈릉!
귀청이 떨어질 듯한 천둥소리를 일으키며,
─퍼억! 퍼석! 퍽퍽!
스트렝스를 사용해서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으하하! 나와라, 레이첼!”
늘 남의 꿈속에서 꿈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만 행동하다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날뛰어대니 상당히 신이 났다.
어차피 이상한 꿈이고, 나는 꿈을 깨트릴 목적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깽판 쳐서 꿈이 깨지면 좋고, 아니면 적어도 레이첼은 찾을 수 있겠지.
“흐흐흐. 여기다 여기! 이쪽으로 와라!”
─화르르륵!
[금일 사용 가능한 ‘플레임 오브’ - ∞회]
나는 아예 플레임 오브를 신호탄처럼 허공에 발사했다.
너무 깽판을 친 탓일까?
꿈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이 나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마치 레이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
“저놈을 죽여라!”
하지만 그래봤자 일반 영지민일 뿐이다.
기사도, 병사도 아닌 그들이 얼마나 달려오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쉴드는 써둬야겠군.”
─치직. 치직.
전기가 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라이트닝 아머’ - ∞회]
“너는 죽어야... 끄르륵!”
“이놈을... 커헉!”
‘......? 이런 의외의 효과가?’
내게 주먹질을 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내 몸을 보호하고 있는 전기의 갑옷에 의해 감전되며 쓰러져 나갔다.
가만히 있어도 자기들이 알아서 픽픽 쓰러졌지만, 나는 꿈을 부술 기세로 계속 날뛰었다.
─치지지직! 화르륵! 꽈릉! 휘오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이고 있던 중이었다. 문득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느껴졌다.
“......레이첼!”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반말을 해버렸군.
“아니, 레이첼 님!”
건물 사이의 골목에서 레이첼이 경악하며 내가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가 또 그렇게 놀라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아까 하던 대화를 마저 하시죠.”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다시 설명할까 싶었다. 무인도에서는 대화 중에 꿈이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번처럼 밑도 끝도 없이 적이 몰려오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아마 나에게 정신이 쏠려서 망상을 할 틈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까, 레이첼 님은 지금 꿈을─”
“다, 당신은 누구죠?”
“......예?”
“어떻게 절 알고 계신 거예요?”
“하아....”
미치겠군. 이건 또 무슨 소린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 엘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섬에서 같이 대화 중이었잖습니까?”
“섬...? 그게 무슨...? 이런 내륙 지방에 섬이 어디 있다는 거죠?”
그건... 매우 논리적인 반박이군.
레이첼은 매우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당신도 저를 죽이러 온 건가요?”
“아니아니아니. 잠깐!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사실 죽이러 온 게 맞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대로 두면 레이첼의 피해망상이 발동돼서 기사가 떼거리로 몰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상당히 피곤해진다.
“정말 기억이 안 나십니까? 무인도의 모래사장에서 대화를 나눈 게? 진짜 방금 전인데?”
“......왕국 중부에서 바다로 가려면 마차를 타고 열흘은 이동해야 하는걸요? 그런데 어떻게 방금 전에 무인도에 있었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흐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잡아뗄 이유도 없고.
‘대충... 감이 잡히는군.’
무인도에서 내가 했던 말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설명했던 것이, 레이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듯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인도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더욱이 나아가, 자신을 흔들었던 외부인인 내 존재마저도 지워버리고.
이게 그녀가 꿈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아니, 레이첼 님. 근데 저를 기억 못하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내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제가... 당신과 아는 사이였나요?”
“네에! 함께 레이첼 님을 노리는 놈들과 싸웠잖아요? 그 뭔 고위기사인가 하는 녀석이랑도 싸우고.”
“고위기사...? 제퍼슨 경 말씀이세요?”
“예. 뭐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습니다.”
“.......”
레이첼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땅바닥을 쳐다봤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맞아요. 당신이 엄청난 눈보라를 일으켜서 저를... 지켜줬었는데... 제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요...?”
그거야 네가 잊고 싶은 기억은 지워버리니까 그렇지. 속 편하게.
“미안해요... 모두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를 지켜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잊다니. 내가 미쳤나봐... 흑.”
레이첼은 돌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고작 이게 울 일인가 싶었지마는, 레이첼은 일반적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으니 그냥 울게 놔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보는 내가 서글퍼질 정도로.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나를 응시했다.
“잠깐. 당신은 분명....”
“네?”
레이첼은 넋이 나간 것처럼 내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게 달려오는 제퍼슨 경을... 대신 막아주다가... 제... 제... 제 마법에....”
그래. 그 마법에 맞아 죽었지.
하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 무인도에서 나의 죽음을 근거로 삼아 무리하게 설득하려다가 꿈이 바뀌어버렸으니까.
지나친 외부의 개입은 좋지 않다.
그냥 그녀 스스로 생각하도록 놔뒀다.
“무인도... 나만의 섬... 우리는 아까 그곳에서 대화를 했었... 아...!”
무언가 깨달은 걸까.
─풀썩
레이첼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 말했다.
“......아아, 엘. 저는 꿈을 꾸고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