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84화 (84/200)

꿈 깨! (1)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고?’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밀러 백작은 지금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썩 여유로운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그런 그가 당장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고 말해봐야,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것은 레이첼 때문이다.

레이첼이 꿈에서 깨어나면 막대한 치료비 지출도 사라질 테고, 그 외의 제반 사정도 좀 나아질 것이다. 유일한 자식이 돌아오는 거니까.

레이첼을 깨우면 백작도 여유로워진다.

즉, 큰 보상을 기대해볼 만 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가 깨웠다는 걸 증명할 수 있냐는 건데....’

솔직히 이건 변수가 너무 많았다.

전적으로 레이첼에게 달려있다고나 할까.

백작에게 증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레이첼이 깨어났을 때 ‘사실 저거 제가 깨웠으니 보상을 주쇼.’라고 주장해봤자 미친놈 취급만 당할 게 뻔하다.

그러므로 레이첼의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내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레이첼이 아버지에게 말하든 자기가 직접 보상을 주든 할 테니까.

‘레이첼이 나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한다.’

꿈에서 겪었던 일을 잘 기억하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깨기 직전에 꾼 꿈. 이건 뭐 방금 겪은 일이니 생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강렬한 사건을 겪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깬 직후에 기억을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을 하다가 돌연 떠오르기도 한다. ‘아, 맞다! 나 그런 꿈 꿨었지?’ 라는 식이다.

다행인 점은, 나는 이미 그녀에게 강렬한 사건을 하나 선사한 이력이 있다는 것. 꿈속에서 그녀를 지키다가 토네이도 랜스에 맞아 끔찍하게 죽었으니까.

나를 지켜주던 남자가, 내 마법에 맞아 죽었다?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쇼킹한 장면을 목격하게 한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나라는 존재만큼은 똑똑히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은 레이첼에 대해 좀 물어봐야겠군.’

원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깨워보려 했었으나, 이제는 진심으로 바뀌었다. 본격적인 전략 수립에 앞서, 배경정보가 필요했다.

마침 내 앞에 있는 것은 레이첼의 아버지.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애께서는 어쩌다가 그렇게 잠이 드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그시 감겨있던 백작의 눈이 떠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지. 딸아이는 방에 틀어박혀서 늦은 밤까지 마법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 아이의 깨어있는 모습이었다네.”

마법을 공부하다 잠들고 깨어나지 못했다고?

왜지? 마법이 너무 어려웠나?

“그날 밤 레이첼 님은 어떤 마법을 공부하고 계셨습니까?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제가 정신계 마법 쪽, 특히 꿈에 관련해서 연구 중인 게 있어서... 혹시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사실 정신계 마법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꿈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가 그리 말하자 밀러 백작의 눈이 순간 빛났으나, 금세 시들해졌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이라도 고맙군. 오브였다네. 바람 속성의 오브. 레이첼은 오브 마법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성과가 없었거든.”

“......오브를요?”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꿈속에서 본 그녀는 오브를 자유자재로 다뤘었기 때문이다.

“비단 오브뿐만이 아닐세. 혹시 오브가 딸아이와 상성이 좋지 않아서 고전하나 싶어, 온갖 바람 속성의 마법서를 구해다 줬네. 하지만 전부 마찬가지였어. 트위스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고, 딸아이는 그것을 늘 괴로워했지.”

뭐지? 아닌데?

레이첼은 쿼드러플 다운 면모를 보이며 다양한 바람 마법을 사용했었다. 일대에 끊임없이 바람을 일으키며 기사를 썰어대는 모습은 날 전율케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그 마법 중 하나를 습득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은 진짜라는 뜻이다.

근데 왜 레이첼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녀가 허접이었다고 말하는 걸까?

“중급 마법 습득을 실패했다고요...? 제가 호위 기사에게 듣기로 영애님은 쿼드러플이시라고....”

“그래, 속성을 타고났지.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무척 컸고, 딸아이는 빠르게 성장하며 그 기대에 부응했다네.”

밀러 백작은 과거를 회상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성장이 더뎌지기 시작하더군. 주변에서 거는 기대는 여전히 똑같은데 말이야. 결국 레이첼은 남몰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게 되었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마법 공부에 매진했지만, 결국은 성과가 없었다는 소린데...

내가 직접 목격한 것과 너무 달랐다.

실력을 숨긴 걸까? 아니.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이건 영 모르겠군. 일단 넘어가야겠어.’

레이첼의 실력에 대해 대화를 나눠봤자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다른 것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영애께서 잠드시기 전에 이상한 낌새가 있었습니까? 신경과민 증세가 보였다거나....”

극심한 피해망상.

이걸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 앞에서 딸을 대놓고 정신병자 취급할 수는 없으니 슬쩍 얼버무렸다.

“전혀. 내 딸은 남몰래 밤새도록 공부해도, 다음날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누구에게나 웃어주는 그런 아이였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는 법이 없었지.”

“......훌륭하신 분이셨군요.”

모든 게 내가 아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이쯤 되면 내가 레이첼의 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갔던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뭐, 어쨌든 정보는 이만하면 충분하겠어.’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배경정보는 많이 입수했다. 이제 레이첼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

─달그락달그락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밀러 백작성에서 떠난 나는, 자정이 지나고 나서야 도시 오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밀러 백작은 날이 어두워졌으니 자신의 성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고했으나, 내가 부득부득 오늘 돌아가야 한다고 거절했다.

앨리스가 여관에 혼자 있기 때문이다.

영지전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를 두고 떠난 지 벌써 하루가 훌쩍 넘게 지났다. 물론 나름대로 신뢰가 쌓이는 중이고, 체인도 걸어놨으며, 고급 여관에서 음식까지 끼니때마다 올려보내 주고 있다.

하지만 새장은 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애완견도 하루만 산책을 시켜주지 않으면 답답해 죽으려고 하는데, 인간 세상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앨리스는 오죽할까.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두른 것이다.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엘 님.”

성문에서 검문을 받고 머지않아 마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차와 마부는 친절하게도 밀러 백작이 빌려줬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관 1층에는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니, 종업원이 나를 불러세웠다.

“저기, 3층 특실에 묵고 계신 분 맞으시죠? 젊은 여성분이랑 같이요.”

“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나는 조금 긴장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앨리스가 도망쳤나? 몬스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찔렀나?

“다름이 아니라 함께 투숙하시는 여성분께서 음식을 추가로 주문하셔서요. 선불로 내신 금액을 초과했거든요.”

“아....”

별거 아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돈 내라는 소리였다. 나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며 물었다.

“얼마입니까?”

“30실버요.”

“......예?”

이 여관의 특실이 1박에 10실버였다.

근데 하루 만에 앨리스가 먹은 음식값이 30실버라니?

“특선 요리를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하셨습니다. 여성분께서 식대는 고객님께 받으라고 똑똑히 말씀하셨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여기요.”

내가 진상이라도 부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종업원이 완전히 정색하며 대답했기에 쿨하게 돈을 건넸다. 그러자 종업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애인 되시는 분께서 입맛이 참 고급이세요. 호호호.”

애인? 장난해?

열흘 전만 해도 걔 고블린이었다고!

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냥 대꾸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끼이익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니,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양초와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앨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답답은 무슨... 엄청 잘 지내고 있었잖아?’

답답해할까 봐 서둘러 돌아왔지만,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빈 접시들을 보아하니 즐거운 호캉스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앨리스는 식사를 배달하러 온 종업원에게 추가 음식을 주문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묶여있다거나 도와달라거나 하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던 것을 보면, 조금은 더 믿어줘도 될 것 같았다.

‘뭐, 다행이네. 고민을 하나 덜었어.’

어딘가에 갈 때마다 앨리스를 신경 써야 한다면, 활동 반경이나 기간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이렇게 혼자서 잘 지내주기만 한다면 음식값쯤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앨리스와 함께 도시 이곳저곳 구경하러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말 그대로 놀고먹었다. 이렇게 쉬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아무튼 이제 레이첼을 깨우러 갈 때가 됐다.

나는 지난번과 똑같이 내 배에 상처를 내고, 피를 잔뜩 흘린 것처럼 꾸며서 세르시아 교단 치료소의 회복실에 들어와 있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수습 사제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이곳은 수습 사제가 주기적으로 들어와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때문에, 소등할 때까지는 잠들기 어렵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다.

“예, 덕분에 잘 회복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세요.”

친절한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회복실을 떠났다. 나이롱환자인 나는 침대에 누워서 소등을 기다렸다.

‘흠. 레이첼을 어떻게 깨워야 좋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고, 확실한 계획도 없다. 그녀의 꿈도, 성격도 난해한 구석이 너무 많다.

다만, 종국에는 레이첼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꿈에서 깰 테니까.

문제는 레이첼이 죽이기에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쿼드러플답게 캐스팅 속도도 빠르며, 다양한 마법을 구사한다. 내가 죽이고 싶다고 슥삭 죽여 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눈을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내 최고의 마법인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날리면 쉽게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과연 나를 은인으로 생각할까?

오히려 반감만 살 것이다. 단순히 그녀를 깨울 목적만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겠으나, 나는 보상을 바라고 있으니 은인이 되어야 한다.

‘아예 기습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기습을 통해 본인이 왜 죽었는지 자각도 못 할 만큼 빠르게 죽여 버리면, 당연히 내 덕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최고의 방법은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다.

당신은 일 년이 넘게 꿈을 꾸고 있고, 죽어야만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정말 설득이 되면, 그녀 스스로 자살하거나 내가 편하게 죽여주면 되니까.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꿈꾸고 있는 사람은 꿈을 현실이라고 믿는데.

나도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와서 ‘당신은 꿈을 꾸고 있으니 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개소리 말라며 내가 먼저 그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나조차 이럴진대, 피해망상이 극심한 레이첼은 오죽할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부딪혀보지 뭐. 어차피 꿈이니 내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고.’

“소등하겠습니다.”

어느덧 소등할 시간이 된 모양인지, 수습 사제가 돌아다니며 불을 끄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풉.”

“......?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웃긴 일이 있어서.”

늘 남의 꿈속에서 어떻게 죽을까 궁리만 했던 내가, 이번에는 남을 어떻게 죽일까 궁리한다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아무튼 수습 사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을 껐고, 회복실은 곧 어둠에 잠겼다.

“.......”

눈을 감고 집중하니 옆방에서 꿈을 꾸고 있는 레이첼이 느껴졌다.

나는 바로 그녀의 꿈으로 들어갔다.

─화아악!

지난주에 들어갔던 레이첼의 꿈.

그 배경은 분명히 밀러 백작의 도시였었다.

“......!?”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나는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시, 시팔! 가라앉는다!”

아니, 갑옷 때문에 무거워서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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