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영지전 (4)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적군의 기세를 꺾길 한참.
전투는 곧 끝이 났다.
─부우우!
기사를 잃은 후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브룩스 자작 측에서 결국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쉽군... 기사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항복을 선언한 남자도 기사처럼 보였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나도 핵심 마법 중 하나인 콜링 썬더의 횟수가 바닥났으니.
깔끔하게 여기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야아아아!!”
“우리가 승리했다!”
“밀러 백작님 만세!”
“마법사 만세!”
우리 측, 그러니까 밀러 백작 측의 병력들은 포효하며 환호했고, 적군은 조용히 부상자를 수습했다.
멀쩡한 적은 100여 명 남짓.
즉, 250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우리 쪽은 50명 안팎의 사상자가 나왔다.
1:5 기적의 교환비다.
어쨌든 패잔병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기에, 더 이상의 싸움은 없었다. 원래 한쪽이 항복하면 웬만해서는 싸움을 멈추는 것이 이쪽 세계의 젠틀한 룰이라고 한다.
게다가 적들은 브룩스 자작의 병사가 아니라 용병. 굳이 죽여 봤자 밀러 백작이 얻는 이득도 딱히 없으니 멈추는 듯했다.
‘뭐, 나도 사람을 죽이는 취미는 없으니....’
솔직히 나 혼자서 백 명도 훌쩍 넘게 처리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자들까지 따라가서 죽일 만큼 비정한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아무튼 이번 전투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나는 일대 다수의 싸움에 능하다는 것과,
어지간한 기사는 일대일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
사실 예전에도 기사 하나쯤을 잡을 화력은 충분했다. 콜링 썬더 세 방이면 누구나 맛탱이가 가니까.
다만 오러를 버티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강화 검과 스트렝스면 막아낼 수 있고, 오러에 북북 찢어지던 쉴드 대신 든든한 라이트닝 아머가 있다.
“이보게! 엘!”
“......? 아, 케이든 씨. 무사하셨네요.”
이 머나먼 타지에서 누가 내 이름을 알고 부르나 했더니, 막사에서 하루를 같이 지냈던 B급 용병 케이든이었다.
“자네에게 적들을 동정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이렇게나 강력하고 무자비할 줄 누가 알았겠나? 아무튼 덕분에 살았군!”
케이든은 전투 시작 전에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었는데, 의외로 승리한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인지 활짝 웃고 있었다.
“제가 혼자 싸웠나요. 다 같이 싸워서 이긴 거지. 근데 왜 제 가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십니까? 뭐가 묻었나...?”
그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내 가슴 쪽에 고정하고 있었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혹시나 뭐가 묻었나 싶어서 가슴을 내려다봤지만,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애당초 나는 이번 전투에서 적을 전부 원거리에서 죽였다.
“하하... 그... 아, 아무것도 아닐세.”
“......?”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케이든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으니, 함께 전장에서 싸웠던 밀러 백작의 병사 몇 명이 내게 다가왔다.
“아주 훌륭하셨소! 마법사님!”
“역시 전장의 꽃은 마법사! 한 방에─”
“덕분에 제 아내는 과부가 되지 않을─”
“제가 본 마법사 중에 가장 강력한─”
병사들은 저마다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는데, 그들 역시 어색하게 내 가슴이나 목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다들 어딜 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마주친 놈은 반드시 죽인다!
라고 말한 것 때문인 듯했다.
“아하하, 아까 한 소리는 그냥 적들의 전의를 꺾으려고 한 거였습니다. 설마 그 말을 진짜 믿으신 건 아니겠죠? 그렇죠, 케이든 씨?”
“무, 물론이네. 나는 다 알고 있었지. 하하.”
“와하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님!”
아무튼 그렇게 승자들끼리 모여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두 명의 남자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밀러 백작과 휘하의 기사였다.
“배, 백작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담소를 나누고 있던 병사들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며, 백작에게 이번 영지전의 승리에 대한 축하를 건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 높은 귀족, 그것도 영주와 대면해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투재판 때 피어슨 남작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예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나도... 한쪽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냥 얌전히 서 있기로 했다.
민간인이 사단장을 만났다고 경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백작의 사병도 아닌 내가 무릎까지 꿇는 것은 조금 오버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밀러 백작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왜 나를 축하하는 겐가? 승리는 제군들이 일구어낸 것인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라. 수고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
백작의 치하에 병사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일어났다.
이윽고 밀러 백작은 기사와 함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말에 올라탄 채로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뭐지...? 내가 뭐 실수했나?’
“으하핫핫!!”
내 걱정과 달리 밀러 백작은 돌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기사도 함께 웃었다.
“으하하핫!”
“하하하!”
“......? 흐흐흐!”
뭔지 모르겠어서 그냥 나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셋이서 한바탕 웃고 난 뒤, 백작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엘입니다.”
“그래, 엘. 정말 대단하더군. 덕분에 큰 고민 하나를 덜었어.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의 성과야.”
백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승리를 견인한 것도 모자라 브룩스 자작의 기사까지 처치하다니.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용병의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껄껄. 기사를 잡는 용병이 세상 어디에 있나? 그것도 마법사가 말일세.”
그는 이번 전투에 걸려있던 평야를 지켰다는 것보다, 적의 기사를 하나 줄였다는 사실이 더욱 기쁜 듯 보였다.
하긴, 이 땅은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긴 했다. 고작 운동장으로나 쓸 수 있을법한 땅을 걸고 왜 수백 명이 싸우는지 의아할 정도였으니까.
“내 당장 자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지금은 안 되겠군. 부상병을 수습해야 하니 말이야.”
백작은 전장 이곳저곳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해서 오늘 저녁 만찬에 자네를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딱 봐도 뭔가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다못해 금화 몇 닢이라도 얹어주겠지.
이걸 거절하면 바보다.
“영광입니다.”
***
밀러 백작이 통치하는 도시 라니아.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백작성 옆의 공터는 상당히 시끌벅적했다. 용병들을 위해 마련해둔 임시 막사 옆에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하하! 마셔라 마셔!”
“전투에서 죽지 못했으니 마셔서 죽자!”
“여기 술 좀 더 주시오!”
아직 해도 다 넘어가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영지전에 참여했던 용병과 병사들은 얼큰하게 달아올라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나도 밀러 백작과의 저녁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야외 테이블의 한구석에 앉아있었다.
‘밀러 백작은 인심이 후한 사람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백작은 용병들에게 이미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전투 시작 전에 보수를 줬고, 사기 진작을 위한 격려금까지 줬으니까.
그런데 연회까지 베풀어주다니.
빵과 고기, 맥주뿐인 연회지만 그게 어딘가.
용병들은 좋아 죽고 있었다.
“크으! 백작님께서는 마음이 넓으시군.”
“누가 또 밀러 백작령을 노린다면 내가 언제든 한달음에 달려오리다! 으하하!”
진짜 그럴까? 용병은 돈을 보고 움직인다. 백작이 이번에 암만 잘해줘 봐야, 다른 사람이 더 큰 금액을 제시하면 그쪽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렇게 연회를 구경하고 있으니, 곧 하녀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엘 님. 만찬이 준비됐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아, 네.”
나는 하녀를 따라 백작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깊게 들어와 본 건 처음이네.’
그녀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중앙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전에도 영주성에 몇 번 방문해본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초입에 있는 응접실만 갔을 뿐, 이렇게 깊숙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2층 복도부터는 벽면에 백작가의 초상화들이 걸려있었는데, 대부분 밀러 백작과 레이첼의 초상화였다.
날 안내하던 하녀는 이윽고 문이 열려있는 어떤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도 따라 들어온 뒤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어서 오게나.”
식당에 있던 밀러 백작이 그리 말했다.
그는 전형적인 귀족의 식탁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는데, 길쭉한 직사각형의 식탁은 진짜로 10m는 되어 보였다.
백작의 반대쪽 끄트머리에는 나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양 끝에 앉으면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을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서 앉지.”
“예.”
일단 시키는 대로 앉긴 앉았는데 몹시 곤혹스러웠다.
내 앞에 놓여있는 포크와 나이프만 해도 각각 네 개였고, 숟가락도 두 개였다. 심지어 잔은 다섯 개였는데 전부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랐다.
‘이런 젠장.’
어디 그것뿐인가.
사람 다섯 명이 세로로 누워도 남을 것 같은 이 길쭉한 테이블에는 음식이 듬성듬성 놓여있었는데, 대체 저걸 어떻게 가져다 먹으라는 건가 싶었다. 게다가 음식이 맛있게 생겨서 더 빡쳤다.
귀족의 식사 예법이 무척 복잡하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 있을 때도 들어봤으나, 순도 백퍼센트 토종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딴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좀 배워둘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쪼르르
‘......!’
수많은 미스테리 중 하나가 해결됐다.
다섯 개의 잔 중 하나는 와인용 잔이었다.
하녀가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으니, 밀러 백작이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식사 예법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편하게 들게나. 내 자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부른 것이지, 예법을 시험하기 위해 부른 게 아니니.”
그렇게 말한 백작이 내 옆에 있던 하녀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시다면 손짓해주세요.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하. 멀리 있는 음식은 그렇게 먹는 거군?
아무튼 백작도 편히 먹으라고 했으니, 편하게 먹기 시작했다.
각 포크와 나이프의 용도에 대해서는 하녀가 옆에서 꾸준히 설명해줬다. 웬만하면 설명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는데, 가끔 틀려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애당초 난 귀족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식사가 진행됐을 무렵, 밀러 백작이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이번 영지전에서 활약한 것을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음... 글쎄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만큼의 활약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수치화하기는 어렵다. 뭘 알아야 견적을 내지.
“적어도 자네가 보수로 받은 3골드는 아득히 뛰어넘겠지.”
“그렇긴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계산을 해주지. 자네는 B급 용병 일백 명 이상을 처리했으니, B급이 받는 보수인 20실버의 백 배. 즉 20골드 이상의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말한 밀러 백작이 하녀에게 손짓하자, 하녀는 식당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다가 나의 적인 브룩스 자작의 기사를 잡은 것과 자네가 지켜준 내 명성까지 더하면, 그 가치는 훨씬 더 높아지지.”
구석으로 향했던 하녀가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내게 다가와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내가 주머니를 받아들자, 밀러 백작이 말을 이었다.
“30골드일세. 자네가 해준 것에 비하면 솔직히 적은 액수지. 하지만 내게도 사정이 조금 있어서 말이야....”
사정이라 함은 레이첼을 말하는 듯했다.
주교가 강제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고 했었나. 아무튼 세르시아 교단에 들이는 돈이 엄청날 테니까.
“혹시 부족하다면 내가 추후에 더 보상하겠네.”
내가 봐도 기사를 잡은 것까지 더하면 30골드는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보수를 받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백작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사례할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승격 퀘스트를 위해 기사를 잡으려고 싸운 것이지, 백작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니었다.
보너스 개념으로 30골드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그런가. 고맙군.”
밀러 백작은 보상이 적어 못내 찝찝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곧 다시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됐다.
“도튼 출신의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거기서 활동했나?”
“자격만 도튼에서 땄습니다. 실제로 활동하던 지역은 케른헴이고요.”
“호오. 버려진 도시 말이로군. 헌데 그곳에서 어쩌다가 중부지방까지 왔나?”
“타스모스 학파에 용무가 있어서 오리아에 잠깐 머물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던 백작은, 오리아라는 단어가 나오자 급격히 가라앉았다.
“오리아라... 내 딸이 잠들어 있는 도시지....”
뭐야. 왜 꼭 죽은 사람처럼 얘기해.
아무튼 그는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식당의 벽면을 바라봤다. 그곳엔 레이첼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어딜 가도 레이첼의 그림이 있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딸을 끔찍이 여기는지 알법했다.
“레이첼 님 말씀이시군요.”
“자네도 알고 있었나?”
“예. 제 동료 중에 회복 마법사가 있어서 치료를 시도해보러 갔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래, 실패했겠지. 이름난 회복 마법사도, 사제도 모두 실패했으니.”
밀러 백작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랑스러운 내 딸... 레이첼을 깨울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거늘....”
“.......”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고?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럼 제가 꼭 깨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