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영지전 (2)
─저벅저벅
밀러 백작령의 동쪽 평야로 향하는 행렬.
행렬의 주를 이루는 것은 용병과 병사였다.
‘생각보다는 숫자가 좀 되는데...?’
출발 전 B급 용병 케이든이 밀러 백작은 병사를 얼마 투입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살펴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용병 백이십 명에, 병사 팔십 명가량.
도합 이백 명쯤은 되는 규모였다.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케이든에게 물었다.
“밀러 백작이 이번 영지전을 포기했을 거라고 하셨는데...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정도 숫자면 할 만할 것 같은데.”
“자네는 늘 낙관적이군. 이거론 턱없이 부족해. 이번 싸움에 걸린 평야의 크기를 보면 삼백 명이 적정 숫자일세.”
케이든은 중부지방에서 오래 구른 잔뼈가 굵은 용병이라 그런지, 땅 크기만 보고도 사이즈가 딱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모양이군.”
행렬의 뒤쪽에는 말을 탄 밀러 백작이 있었다.
당연히 밀러 백작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주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보통 이런 소규모 영지전에 영주가 직접 따라오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기사로 서임 받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사기 진작을 돕고는 하는데, 밀러 백작은 아들이 없으니 본인이 행차하는 것이다.
“그러게요. 완전히 포기할 거였으면 따라오지도 않고, 저희한테 추가 보수도 주지 않았을 테니.”
내가 보기에 밀러 백작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선의 결과를 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용병들은 돈으로 격려하고, 병사들은 본인이 격려하고.
물론 격려만으로 수적 열세를 쉽사리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뭐, 용병인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딱히 언질 받은 것도 없고, 어차피 용병은 지휘도 잘 안된다. 정규군처럼 전략 전술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막싸움에 특화된 자들이다.
“아무튼... 케이든 씨. 흠흠,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헛기침을 하며 그리 묻자, 케이든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뭔가? 지금껏 궁금한 건 실컷 물어봐 놓고, 갑자기 왜 뜸을 들이나?”
“아, 이게 좀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이라....”
“상관없네. 해보게.”
케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기에,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조금 있으면 벌어질 전투에서 동료를 적으로 만나면 어떡하실 겁니까? 브룩스 자작이 고용한 용병 중에, 케이든 씨가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나야 이쪽 지역에 아는 용병이 한 명도 없다고 하지만, 케이든은 아니다.
이건 비단 케이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지인을 적으로 만나면 분명 싸우기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건 무슨 얼빠진 질문인가? 당연히 죽여야지.”
그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어 보였기에, 나는 조금 당황하며 되물었다.
“음... 친구나 형제를 만나도요?”
“용병이 돈을 받았으면 할 일을 해야지. 그런 걸 일일이 따져가며 싸우면 누가 나를 고용하겠나? 어차피 내가 안 죽이면 내 친구가 나를 죽일 걸세. 다들 각오하고 하는 거지.”
잔혹한 세계구만.
확실히 모험가와 용병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이렇게 사람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 모양이다.
적으로 만나면 친구나 가족까지도 죽일 각오가 되어 있다니.
용병이 모험가를 겁쟁이 취급하며 무시하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됐다. 물론 그래도 나를 무시하는 건 못 참는다.
“근데... 자네는 도튼 출신의 A급 용병이 아니었나? 왜 이런 기본적인 것을 묻는지 모르겠군.”
“아, 제가 자격만 따고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안 했거든요. 특히 전쟁 쪽은 아예 처음입니다.”
“그런가? 실력에 비해 경험은 부족하다는 거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케이든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도튼 출신의 A급 용병.
큰 기대를 안 하고 딴 자격이었지만, 이건 용병 세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직함이었다. 맞짱을 떠야하는 도튼의 특이한 테스트 때문에 최소한의 실력이 보장된다며, 다른 지역 출신보다 조금 더 우대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영지전만 해도 그렇다. 나는 다른 A급보다 약간 더 높은 보수를 받았다. 역시 자격증은 많을수록 좋은 법인가 보다.
“자네가 전쟁을 별로 안 해봤다고 하니, 내 조언 하나 하지.”
“그럼 감사하죠. 뭔데요?”
“절대 적들을 동정하지 말게. 신입들이 가장 잘 죽는 이유가 이거야. 적들은 무고한 용병이라느니, 명령만 따를 뿐인 병사라느니 하며 죽이는 걸 머뭇거리다가 오히려 자기가 당하는 거지.”
케이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장에 무고한 사람은 없다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나온 거니까. 오직 아군과 적군. 그뿐이네.”
***
밀러 백작령 동부에 있는 너른 평야.
브룩스 자작의 둘째 아들이자 기사인 말콤 브룩스는, 평야 너머로 보이는 밀러 백작의 병력들을 보고 코웃음 쳤다.
“큭큭. 저거 보이나? 저 초라한 병력이? 많이 쳐줘도 이백 명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아아, 밀러 백작도 다 죽었군. 아무리 딸년 때문에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숫자는 맞춰와야지.”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맞장구쳤다.
“예, 도련님의 승리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래... 우리가 거의 두 배는 많으니까 말이지.”
말콤 브룩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용한 삼백오십 명에 달하는 용병들을 흡족하게 훑어보았다.
“차라리 밀러 백작이 기사를 하나쯤 내보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큭큭. 이 정도로 숫자가 차이 난다면 용병만으로도 기사를 잡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근본도 없는 용병 수백 명을 잃어도, 밀러 백작의 기사 한 명을 죽일 수만 있다면 전혀 손해가 아니다.
용병은 돈으로 또 고용하면 되지만, 기사는 돈으로 사기 어려우니까. 진정한 기사는 돈 몇 푼에 움직이지 않는다.
“도련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쪽에서 정말 기사를 내보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걸 밀러 백작도 알고 있을 텐데요.”
“경은 다 좋은데 너무 단순한 게 문제야. 쯧.”
말콤 브룩스는 기사를 향해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기사를 투입해준다면야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적들 중에 밀러 백작의 병사가 몇이나 되어 보이나?”
“칠십에서 팔십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터무니없이 적은 수가 아닌가? 애당초 밀러 백작은 이번 전투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은 거다. 패배하더라도 병사를 아끼는 선택을 한 거지. 그런 상황에서 기사를 내보낼 리가 있겠나.”
“역시...! 도련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기사의 칭찬에 말콤 브룩스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큭큭. 그래. 우리는 편안히 구경하다가, 아버지께 승전보만 전해드리면 된다.”
반면, 평야의 반대쪽.
밀러 백작의 진영.
백작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적들의 수가 많군.”
고작 평야를 놓고 벌이는 전투다.
경작지도 아닌 평범한 땅.
그렇게 가치가 높은 땅도 아닌데, 브룩스 자작 측은 작심하고 온 것처럼 보였다.
“쉽지 않겠어.”
당연히 밀러 백작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기 진작을 위해 용병에게 추가 보수도 지급했고, 본인이 직접 여기까지 오기도 했다.
게다가 병력의 수는 적을지라도 군사 교육을 받은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전략적인 움직임을 지시해놓으면, 약간의 숫자 차이는 뒤집을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차이가 너무 크다.
“역시 제가 나서는 것이─”
“그만!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경을 내보낼 생각이 없다. 내게는 이깟 작은 땅덩어리보다 경이 훨씬 소중하다.”
밀러 백작은 기사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 하지만 이대로는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저를 투입해주지 않으실 거라면 차라리 항복을 해서 병사들을 살리시는 것도.......”
“그건 더욱 안 될 말이다. 내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소문이 돌면, 병사 팔십을 모두 잃는 것보다도 훨씬 치명적이다.”
그것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다.
대군을 이끌고 가면 알아서 항복한다는 소문이 나면, 브룩스 자작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영지에서 밀러 백작을 만만하게 보게 될 것이다.
“......병사들에게 섣불리 달려 나가지 말라고 전해라. 내가 후방에서 지휘할 것이니.”
백작은 병사들을 따라다니며 지휘할 수 없다. 전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백작도 전투에 참여하는 게 되니까.
그렇게 되면 상대는 백작을 죽이기 위해 기사를 투입할 테고, 백작 측도 백작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들어온다. 즉,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 백작은 후방에서 지휘해야 한다.
“하지만 제자리에 서 있으면 물러날 곳이 없어서 지리적으로 불리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달려 나가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여기에 승부를 걸 수밖에.”
백작의 결심이 굳은 듯 보이자,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용병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백작님께서 지휘를 하셔도 제대로 따를만한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별도의 전술 교육을 받지 못한 용병들에게 강압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오히려 전투 능력 저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들에게는 권고만 하도록 해라. 자유롭게 싸워도 좋으나, 달려 나가지 않고 병사와 함께 있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을 거라고.”
“예, 백작님.”
***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결전의 시간인 정오가 다가온 것이다.
밀러 백작은 초조함을 애써 감추고 눈 앞에 펼쳐진 평야를 바라봤다.
가로로 쭉 늘어서 있는 이백 명의 아군들.
그리고 저편에 늘어서 있는 더 많은 적군들.
“.......”
곧, 정오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
─부우우!
양측에서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울리자, 브룩스 자작 측 병력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숫자.
허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군 병력들이 자신의 지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자유분방한 용병들까지도.
“좋다! 모두 겁먹지 말고 대열을 유지... 응?”
후방에서 큰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던 밀러 백작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돌연 아군 용병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기 때문이다.
“호, 혼자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거칠게 살아온 용병은 정신이 이상한 녀석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녀석인 모양이었다.
백작은 당황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검을 들고 평범한 속도로 달려 나가던 용병은, 어느 순간부터 기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 측 용병 중에 저 정도의 몸놀림이 가능한 검사가 있었나?”
밀러 백작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저자가... 그 도튼 출신의 A급 용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저는 그가 마법사라고 들었습니다만.”
“마법사? 미치지 않고서야 마법사가 어째서 혼자서 검을 들고 달려 나간다는 말인... 허! 마법사가 맞군.”
쏜살처럼 튀어 나가던 용병은 적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손에서 푸른 전류를 내뿜었다. 적에게 닿은 그 전류는, 연쇄적으로 퍼져나가며 적들을 줄줄이 쓰러트렸다.
밀러 백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허, 체인 라이트닝이군. A급다운 실력이긴 한데... 저것만으로는 부족해. 저래서야 결국 자살행위가 아닌가?”
범위 공격이 가능한 체인 라이트닝이라는 비장의 한 수가 있는 것은 좋았으나, 그거 하나만으로 대세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 저건...?”
“오브입니다! 어떻게 용병이 중급 마법을?”
체인 라이트닝으로 인해 자신에게 적들이 몰려들자, 그 용병은 회전하는 얼음덩어리를 생성해서 날렸다.
오브 한 방에 수십 명의 적들이 얼어붙었다.
“저런 실력자가 어째서 고작 3골드를 받고 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는 말인가...?”
이렇게 가성비가 좋을 수가 있나?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백작은, 곧 정신을 차려야 했다.
용병 마법사는 계속해서 전기를 내뿜으며 어마어마한 숫자의 적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그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밀러 백작은 황급히 소리쳤다.
“저 마법사를 호위하면 승산이 있다! 전원 돌격해라! 당장!”
***
─치지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체인 라이트닝’ - 3회]
“끄아아악!”
“흐어어!”
“우으으...”
내 손에서 방출된 푸른 전류에 적들이 줄줄이 쓰러져나갔다.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전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전격 마법이면 어디에 뭘 써도 효율이 끝내줬다.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9회]
“꺼어억!”
“크윽!”
심지어 단일 타겟의 기초 마법인 스태틱 쇼크마저 쐈다 하면 두 명 이상은 감전됐다.
‘오브를 한 번 썼는데도 기사가 안 나오나?’
나는 미친 듯이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굳이 기사 행세를 하며 피곤하게 검으로 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마법을 사용하는 편이 기사를 불러내기에 더 적합했다.
왜? 마법사의 천적이 기사니까.
그래서 미친 듯이 마법을 쏴대며 유혹하고 있었는데, 기사는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오브를 한 번 더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 뒤편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마법사를 보호해라!
뒤를 돌아보니 아군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나오라는 기사는 안 나오고 왜 너희가 나오냐고!’
도와주러 오는 건 고맙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방해다. 아군이 적들과 뒤섞이면 지금처럼 범위 마법을 난사해대기가 어려워진다.
아군이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기사를 불러내야 한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땅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쿠르르...
[금일 사용 가능한 ‘랜드 라이즈’ - 4회]
그리고 그 무대 위에 올라서 보란 듯이 중급 마법을 캐스팅했다.
─화르르륵!
내 머리 위에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생성됐다. 그 구체는 맹렬히 회전하면서, 주변에 작은 불덩어리들을 내뿜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플레임 오브’ - 1회]
생성된 불덩어리를 발사하지 않고 도발하듯 머리 위에 띄워놓고만 있자, 곧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저편에서 기사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