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영지전 (1)
적당한 영지전에 참여한다는 것.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기사와 싸울 기회가 생긴다면 승격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고, 만약 적들 중에 기사가 없다 해도 귀족의 사병을 죽임으로써 능력치 상승을 꾀할 수 있다.
물론 적의 대다수는 용병일 테고 사병을 죽여도 능력치가 많이 오르지는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티끌 모아 태산이니까.
그런고로 나는 정보 수집을 위해 오리아의 용병 길드를 찾아왔다.
“중부지방은 용병의 수요가 많다더니... 확실히 크긴 크네.”
보통은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의 규모가 비슷하지만, 이곳은 용병 길드가 다섯 배는 더 큰 듯했다. 상당히 비대칭적인 구조다.
딱 봐도 모험가 멸시가 훨씬 심할 것 같았기 때문에,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용병 길드 내부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프레온 백작님의 깃발 아래에서 싸울 용병을 모집하고 있소! 등급은 C급부터 A급까지!”
“일주일 뒤에 요렌 평원을 놓고 벌이는 영지전에 참전하실 분 계십니까! B등급 이상이면 누구나 고용해드립니다!”
“우드 자작령을 지키기 위해 힘써주실 용병을 찾고 있어요! 자작령까지 거리가 멀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마차로 태워드려요!”
구인 활동으로 인해 시끄러운 것은 모험가 길드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모험가 길드에서는, 모험가가 직접 같은 의뢰를 나갈 사람을 구하는 반면에, 이곳은 의뢰인 측에서 보낸 사람이 직접 구인을 하고 있었다.
지금 목청 높여 외쳐대는 사람은 용병이 아니라, 귀족가에서 파견한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싸울 사람을 구하네.’
이곳 베이커 후작령에서는 영지전이 없어서 그런 모양인지, 대체로 다른 지역의 귀족가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프레온 백작님의 깃발 아래에서 싸울─”
“우드 자작령을 지켜주실 용병─”
들어보니 저 둘은 서로 적이었다.
그러니까, 프레온 백작이 우드 자작령으로 쳐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측 다 이곳에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즉, 오리아의 용병은 서로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프레온 백작을 위해 싸울 테고, 누군가는 우드 자작을 위해 싸울 테니까.
‘용병은 원래 이런 식인가...?’
돈만 주면 사람도 죽여주는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어제까지는 동료였던 자와 적으로 만나서 싸우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용병의 세계는 아주 냉정한 모양이다.
어쨌든 발걸음을 옮겨 길드 내부에 있는 큼지막한 게시판으로 향했다. 나는 저런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 것보다, 필요한 내용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는 게시물을 보는 걸 더 선호한다.
“흠... 좀 빨리할 수 있는 일 없나.”
나흘 뒤에 능력의 쿨타임이 돌아오면 레이첼의 꿈속으로 다시 들어갈 계획이기 때문에, 너무 장거리 출장은 곤란하다. 게다가 첫 영지전 참여니, 가까운 곳에서 적당히 맛만 볼 수 있는 일을 원한다.
게시판에는 게시물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몬스터 토벌이나 상단 호위 같은 일도 있었지만, 과반수는 영지전에 참전할 용병을 구인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게시물 중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밀러 백작?”
그것은 밀러 백작이 영지 방어를 위해 용병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게시물이었다.
***
알프레드 밀러 백작의 집무실.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부터 바닥에 깔려있는 대리석까지. 어느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집무실이었으나, 테이블에 앉아있는 밀러 백작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했다.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밀러 백작은 의자에 등을 젖히고 천장을 바라봤다. 단연코 그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딸에 관한 것이었다.
레이첼 밀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 레이첼은, 벌써 일 년이 넘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밀러 백작은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레이첼을 깨우는 자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주변 영지까지 소문을 내는 것은 물론이요, 왕국 전체를 뒤져서 회복과 해주에 일가견이 있다는 마법사들을 초빙했었다.
하지만 거금을 주고 불러들인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레이첼은 병에 걸린 것도,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니라는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무리한 지출은 결국 재정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레이첼을 포기할 생각은 결코 없지만, 지금은 잠시 회복 마법사 초빙을 멈춰야만 했다.
─똑똑
“들어와라.”
밀러 백작이 허락하자, 문을 열고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 용병들이 도착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백작은 얼굴에 화색을 띠고 물었다.
“오, 그런가? 몇 명이나 왔지?”
“지금까지 총 백이십 명입니다.”
“......고작 그것뿐이라니.”
밀러 백작의 얼굴에 다시 수심이 차올랐다.
너무나도 부족한 숫자.
당장 내일 동쪽 평야를 놓고 벌어질 브룩스 자작과의 소규모 영지전에 대비하려면, 적어도 삼백 명쯤은 필요했다. 상대도 그 정도의 병력을 내보낼 테니까.
이것이 바로 밀러 백작을 괴롭히는 또 다른 문제였다.
최근 들어 옆 영지의 영주인 브룩스 자작의 국지 도발이 잦아졌다. 레이첼의 치료에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보수가 낮은 게 문제였나.”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는 적정한 금액을 제시하셨습니다. 단지 브룩스 자작이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며 용병들을 채갔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전체적인 세력은 밀러 백작이 브룩스 자작보다 우위에 있다. 기사도 많고, 병사도 많다.
그렇기에 브룩스 자작은 돈으로 싸우길 택했다. 기사와 병사를 동원하는 전면전에서는 이기기 힘드니, 용병으로 싸우는 국지전을 벌이는 것이다.
밀러 백작보다 높은 보수를 내걸어 용병을 가로채면, 백작은 인원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당장 전투가 코앞이니, 백작은 결국 자신의 사병을 투입해 숫자를 맞춰야만 한다.
그렇게 전투를 벌이면 전투가 끝나고 브룩스 자작은 용병만 잃게 되지만, 밀러 백작은 사병도 많이 잃게 되므로 힘이 줄어들게 된다.
“교활한 놈. 내 병사를 야금야금 갉아먹겠다 이거지... 그렇다고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고, 정말 골치 아프군.”
밀러 백작이 머리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 앞에 서 있던 기사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내일 전투에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제가 브룩스 자작의 용병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그건 안 된다. 경을 투입하면 놈도 기사를 투입하겠지.”
백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제가 상대측 기사까지 처리하면 되잖습니까? 저는 자신 있습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네. 경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잖나. 병사들을 잃는 것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경까지 잃을 수는 없다.”
귀족의 힘은, 얼마나 뛰어나고 많은 기사와 마법사를 거느리고 있느냐로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는 직접적인 무력의 핵심. 그런 기사를 잃는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일이다.
물론 밀러 백작과 브룩스 자작이 서로 기사를 여럿 투입하는 싸움이 벌어진다면, 결국은 기사 층이 탄탄한 백작이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승리해도 분명히 피해는 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때는 브룩스 자작이 아닌, 또 다른 영주가 하이에나처럼 등장해서 밀러 백작의 목을 노릴 것이다.
왕국의 중부지방은 그런 곳이다.
“후우. 내 땅을 탐내는 놈들이 너무 많구나....”
밀러 백작은 후계자가 없다.
그리고 후계자가 없는 영지만큼 탐스러운 곳도 없다. 당대 영주가 죽으면 주인이 없어지니까.
가신 중 하나에게 물려줄 수도 있겠으나, 정당한 후계자가 없다면 결국 내분과 함께 찢어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하나 있는 자식인 레이첼이 멀쩡했다면 사정이 좀 나았겠으나,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는 상태. 이대로라면 밀러 백작령은 누구나 탐내는 맛집이 될 것이다.
“일단은 내일 전투에서 승리해야 주변에서 나를 쉬이 보지 못할 터인데, 승리하려면 병사를 많이 투입해야 하니 그것도 문제고....”
백작의 고심은 깊어만 갔다.
***
밀러 백작성 옆에 있는 막사.
나를 비롯한 용병들을 위해서 백작이 마련한 장소다.
나는 어제 오리아의 용병 길드에서 게시물을 보고 밀러 백작령으로 달려왔다. 이곳은 오리아와 가깝기도 하고, 바로 오늘 영지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뭐, 기왕이면 아는 사람 쪽에서 싸우는 게 좋겠지.’
물론 밀러 백작과 안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마법을 선물해준 레이첼의 아버지니까.
“자네는 굉장히 여유로워 보이는군?”
내 옆자리에 있던 B급 용병 케이든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를 비롯한 다른 용병들은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해서 굳은 얼굴로 각자 무구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냥 누워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하, 그래 보이나요?”
“그렇다네.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야 하는데,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역시 도튼 출신의 A급 용병은 다르구먼.”
당연히 긴장은 별로 안 됐다.
적들도, 아군들도 평균적인 수준은 B급이다.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엉켜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수준으로는 내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애당초 그들은 내 관심거리조차 아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사를 꾀어내는 것.
이번 영지전에서 단 한 명이라도 꼬셔서 잡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나는 어제 케이든에게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물었다.
“케이든 씨. 영지전에 기사가 무조건 오긴 온다고 했죠?”
“무조건 오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항복이나 퇴각 같은 최후의 명령을 내릴 사람이 필요하니 말일세.”
“흐흐흐. 알겠습니다.”
아무리 소규모 영지전이라 할지라도, 기사가 한두 명쯤은 동행한다고 한다.
보통은 영주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인 자격으로 와서 참관을 한다고 하는데,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면 직접 전장에 뛰어들기도 한다고 한다. 상대방이 기사를 투입했다거나, 전황이 너무 불리하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말이다.
‘기사를 어떻게 꼬시냐가 관건인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돌연 막사 안으로 백작가의 행정관이 들어와서 소리쳤다.
─이쪽으로 오셔서 추가 보수를 받아 가시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막사 안에 있던 용병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왜지? 돈을 더 준다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있나?
그 의문을 해결해준 것은 케이든의 중얼거림이었다.
“젠장. 밀러 백작은 이번 영지전을 포기할 생각인가 보군.”
“네? 왜요?”
“보통 추가 보수는 인원이 부족할 때 준다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어차피 부족한 인원은 백작이 사병으로 메꿀 거 아니에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뭐 하러 우리에게 추가 보수를 주겠나. 이건 병사를 별로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미일세. 적은 숫자로 잘 싸워보라는 격려금이지.”
과연.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자신의 피 같은 사병을 투입해서 인원을 메꿀 거라면, 굳이 용병에게 돈을 더 줄 이유가 없다.
케이든이 계속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상대편인 브룩스 자작 쪽으로 갈 걸 그랬군. 그쪽이 보수도 더 높았는데... 밀러 백작이 이길 것 같아서 여기로 왔건만.”
“수가 적어도 이길 수도 있잖아요? 보니까 우리 측 용병 중에 마법사도 꽤 있던데.”
“백 명 정도는 차이가 날 텐데, 그걸 어떻게 극복하겠나. 그런 게 가능할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용병일 따위를 하고 있지도 않겠지.”
그런가? 하긴. 나는 아직까지 중급 마법을 사용하는 모험가나 용병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돈 주고도 고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백 명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난번에 영지전을 보니, 완전히 무지성으로 격돌했다. 그렇게 일렬로 서서 달려든다면, 진짜로 오브 한 방에 스무 명씩은 나가떨어질 것이다. 뭐, 자세한 건 가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추가 보수를 받고 자리에 앉아있으니, 곧 행정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밖으로 나오시오! 이제 전장으로 출발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