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77화 (77/200)

레이첼의 악몽 (2)

“하... 그래... 평범한 사람은 무슨. 그런 사람이었다면 일 년이 넘게 잠들어 있지도 않았겠지.”

나는 이 이상한 계단 위에 멈춰서 마른세수를 했다. 어차피 계속 걸어봤자 벗어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쳇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뿐.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긴 해야 하는데....”

텅 비어있는 중앙으로 뛰어내릴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그러기엔 좀 높은 감이 있었다.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11미터 정도?

“그럼 그냥 부숴버리면 되지.”

─지이잉

전신에서 이질적인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트렝스’ - ∞회]

나는 팔에 힘을 몰아넣고 계단을 내리쳤다.

─콰직!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맥없이 부서졌다. 그대로 계속 내리쳐서 내 몸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구멍을 만들고, 거기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머지않아 탑의 밑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은 평범하군.”

여차하면 탑의 벽을 박살내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평범하게 출입문이 달려있었다. 나는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건 도시였다.

제법 규모가 큰 도시였는데, 풍경이 매우 낯선 것이 아무래도 오리아는 아닌 듯했다. 아마 밀러 백작령에 있는 도시가 아닐까 싶었다.

‘젠장. 이러면 꿈의 주인을 찾기가 힘든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배경의 꿈이었다. 드넓은 도시 어딘가에 있는 꿈의 주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게다가 도시가 굉장히 생생하게 구현되어있었다. 아직 도시 전체를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부분은 현실과 다름없을 정도의 디테일을 자랑했다.

심지어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 중에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보통, 꿈속의 인물들은 웬만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거나, 특별히 신경 써서 창조해내지 않는 이상은 말을 할 줄 모른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꿈이라 그런가?’

이 꿈의 세계가 만들어진지 얼마나 오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의 꿈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백작 영애는 일 년이 넘게 잠들어있었으니, 어쩌면 일 년을 투자해서 만든 꿈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토록 현실적인 꿈이라면, 꿈의 주인을 찾기까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직접 다 뒤져봐야 하니까.

‘계단은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고, 도시는 왜 현실적으로 만든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면 뭐라도 단서가 잡히겠지.

“저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지나가던 행인 하나를 붙잡아 말을 걸어봤다.

“여기가 어딥니까? 음 그러니까... 도시의 이름이 뭡니까?”

“......? 라니아요.”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나도 살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있는 도시의 이름을 묻는 멍청이는 본 적이 없다.

“아, 그렇군요. 영주는 누구입니까?”

“알프레드 밀러 백작님이요.”

알프레드 밀러? 그게 백작의 풀네임인가?

나는 밀러 백작의 성만 알뿐, 이름은 모른다. 아마 꿈의 주인인 레이첼의 아버지가 맞는 듯했지만, 혹시 모르니 더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그분이 레이첼 밀러 님의 아버지가 맞습─”

“꺼져!!!!!”

돌연 그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더니,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예? 갑자기 무슨...?”

“당장 꺼져!!!!!”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 여자를 빡돌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곧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내게 달려왔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이 여자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꺼져!!!!!”

“썩 꺼져라!!!!!”

“사라져!!!!!”

그들은 하나같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악을 쓰고 있었기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미, 미친. 도대체 뭔데?’

설상가상으로 사람은 점점 더 몰려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들에게 갇혀서 공격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물론 체인 라이트닝 한 방이면 인간파도를 만들어내며 전부 쓰러지겠지만, 굳이 문제를 더 키우기보다는 내가 그냥 자리를 뜨는 게 나을 듯했다.

“아, 좀 꺼져!!!!!”

방금 건 내가 지른 소리였다.

이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비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똑같이 소리 지르며, 사람들을 밀쳐내고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일정거리 이상으로 멀어지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 미친놈들을 다 보겠네.”

엄밀히 말하자면 저들이 미친 게 아니라, 이 꿈이 미친 거였지만.

아무튼 이곳은 내 예상대로 밀러 백작이 통치하는 도시였다. 꿈의 주인인 레이첼은 백작의 딸이니, 도시의 중앙에 있는 백작성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흠... 내가 백작성에 들어갈 수 있을까?’

백작성도 디테일하게 구현됐다면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을 듯했다. 외부인인 나를 쉬이 들여보내주지도 않을 것이고, 억지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쯤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가 기사가 한 무더기로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아오... 일이 쉽게 풀리면 다음 주에 깨워주려고 했더니만.”

나는 레이첼을 꿈에서 깨워줄 의향도 있었다.

당연히 이번에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마법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하고, 그녀를 꿈에서 깨우기 위해서는 그녀를 죽여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이번에 성공적으로 마법을 얻는다면,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꿈속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죽여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건 레이첼의 꿈이 정상적이라는 가정하에서다. 이렇게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꿈이라면, 내가 다시 들어오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솔직히 그녀를 죽여서 깨우면 내가 깨웠다는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에, 보상인 30골드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이런 식이면... 마법만 얻고 그냥 케른헴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군.”

어쨌든 이미 꿈에 들어온 이상, 마법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일단은 백작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길 반대편에서 어떤 여자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라?’

달려오고 있는 여자는 레이첼이었다.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소에서 본 것처럼 창백하지는 않았으나, 레이첼이 맞았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서 계속 달려갔다.

나는 즉시 그녀를 뒤쫓아가며 말을 걸었다.

“레이첼 님? 레이첼 밀러 님 맞으시죠?”

“......?!”

나의 부름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는데, 굉장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도 놀랐다.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주다니.

‘공격을... 해야 하나?’

나는 레이첼에게 아무런 빌드업도 해두지 않은 상태다. 그녀가 나를 공격하게끔 유도하려면, 내가 그녀를 공격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보통의 경우에 이건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상대가 위화감을 느껴서 꿈이 깨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일 년이나 꿈을 꾸고 있다.

내가 공격을 한다 해도, 꿈이 그렇게 쉽게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중, 그녀가 덥썩 내 손목을 잡았다.

“도망쳐야 해요!”

“......네?”

뜬금없는 소리였다.

아니, 맞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공격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으니. 어쨌거나 레이첼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구요!”

“왜요?”

“그들이... 그들이 올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굉장히 불안해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수상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이 근처에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요! 이젠 당신도 위험해요. 그들은 저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요!”

“......진정하세요. 누가 감히 도시 한복판에서 영주의 딸을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레이첼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저기서 나올 거예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일 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곧 그 건물에서 사람이 한 명 걸어 나왔다.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딱히 레이첼 님을 공격할 것 같지도 않고, 저런 사람 이 혼자서 덤벼봤자...... 어어?”

한 명이 아니었다.

처음엔 사람이 하나둘 씩 걸어 나오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사람의 종류도 다양했다.

평범한 청년, 어린아이, 노파, 무장한 병사 등. 온갖 사람들이 수백 명 이상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친! 어떻게 저 작은 건물에서,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가 있는 건데?’

그들은 레이첼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저기 있다!”

“쫓아가!”

“죽여!!!”

그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은 레이첼을 보호해야했다. 레이첼이 저들에게 죽으면 마법을 얻을 수 없으니까.

‘도망칠까? 아니, 그냥 쓸어버리는 게 낫겠어.’

나는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레이첼의 손을 뿌리치고 마법을 캐스팅했다.

─치지지직!

내 오른손에 전류가 모여들며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체인 라이트닝’ - ∞회]

이윽고 뻗어나간 한 줄기의 푸른 전류는 가장 앞서서 달려오고 있던 사람에게 직격했다. 그리고 곧 연쇄적으로 퍼져나가며, 인간파도를 만들어냈다.

“끄어어!”

“으아아악!”

“저것들을 죽여!!!”

“쫓아가!”

‘......젠장. 어림도 없군.’

체인 라이트닝은 훌륭하게 기능했으나, 상대의 수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건물에서는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밟아 넘으며 달려왔다.

“일단 튀죠!”

“제가 진작 도망치자고 했잖아요!”

그러네? 어쨌든 나는 레이첼과 함께 도망가기 시작했다. 물론 달리는 와중에도 가끔씩 뒤를 돌아 마법을 날려줬다.

─치지지직!

그렇게 건물 사이로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마법을 쏴대길 한참. 우릴 따라오는 놈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긴 나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레이첼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지민들이 레이첼 님을 저놈들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을까요?”

“영지민은 믿을 수 없어요! 그들도 저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말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길가에 있던 영지민들이 돌연 레이첼을 쫓아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죽여!!!”

“둘 다 죽여 버려!”

“뭐, 뭐야? 저것들은 또 왜 저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이첼에게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이라고 소리치며 달려든다고?

어쨌거나 나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좀 멀더라도 백작성으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기에 있는 기사들이라면 충분히 레이첼 님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사도 마찬가지예요! 분명히 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예요. 어쩌면 지금 저를 죽이러 찾아오고 있을지도 몰라요!”

“.......”

기사가 주군의 딸을 죽이려 든다고?

이거야 말로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

그럴 리가 있었다.

우리가 달려가는 길목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기사 세 명이 검을 겨누고 서 있었다.

‘하,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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