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악몽 (1)
치료소 출입구까지 배웅을 나온 사제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한 것도 없는데요 뭘.”
나도 그에게 꾸벅 인사한 뒤 등을 돌렸다.
당연히 백작 영애 레이첼을 깨우는 데엔 실패했다. 애당초 우리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었으니.
여기사가 백작 영애에 대해 성심성의껏 설명해줬지만, 그런다고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냥 적당히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앨리스에게 회복 마법을 한 번 사용하게 했다. 물론 그게 통할 리가 없었고, 나는 몹시 안타까운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나왔다.
‘정보는 이만하면 충분히 얻었고....’
백작 영애의 마법 실력을 비롯해, 잠들어 있는 위치, 치료소의 내부 구조 등 필요한 정보는 다 파악했다.
그녀는 꿈속으로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중급 마법을 구사하는 자였으니까. 바람 속성이 쿼드러플에,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고작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건 조금 의아했지만, 딱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혹시 잠에서 깨우는 것에 성공한다면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깨웠다는 증거를 내밀기가 어렵겠지만.
“일단은... 여관부터 잡아야겠어.”
백작 영애의 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앨리스도 떼어 놔야 하고.
“너 혼자서 얌전히 있을 수 있지?”
“그러엄. 내가 언제 문제 일으키는 거 봤니?”
앨리스는 팔짱을 끼고 콧대를 높이 들어 당당하다는 듯 말했다.
“문제? 많이 봤는데? 나를 단검으로 쑤시려고 했고, 다른 모험가도─”
“그, 그건 옛날 일이지! 나는 이제 인간처럼 되려고 노력 중이거든? 나중에 마법사가 됐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야!”
“그래? 잘 생각했네.”
앨리스가 너무 인간처럼 되어버리면 나중에 나를 죽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앨리스의 꿈에서 내가 죽기 어려워질 수도 있으나,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어항 속의 물고기나 다름없으니, 청색 마탑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련을 할 수도 있고, 평소에 자주 마법을 보여 달라고 해도 된다. 위화감을 없앨 방법은 많다.
“어쨌든 근처에 괜찮아 보이는 여관이 많네.”
케른헴에서도 그랬지만 세르시아 교회는 웬만하면 입지가 좋은 노른자 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주변에 있는 여관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나는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들어갔다.
과연 고급 여관답게 1층의 식당에선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고,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앨리스가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우, 우리도 여기서 밥 먹으면 안 돼?”
“기다려봐. 우선 방부터 잡고.”
팔에 매달려있는 그녀를 질질 끌고 카운터로 다가가서 종업원에게 말을 걸었다.
“빈방 있습니까?”
“물론이죠. 몇 개를 빌리시겠어요?”
“하나면 됩니다. 대신 좀 크고 좋은 걸로.”
“3층에 특실이 하나 비어있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요금은 1박에 10실버입니다.”
10실버? B급 모험가가 이틀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미친 금액이었지만, 나는 이제 제법 여유로운 사람이다. 앨리스를 가둬두려면 좋은 방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걸로 주세요. 사흘 묵겠습니다.”
“30실버 선불입니다. 기본적인 조식은 제공되지만 그 외의 식사나 다른 메뉴를 원하시면 추가로 주문하셔야 해요.”
나는 숙박비를 지불하는 김에 메뉴판에 있는 음식 몇 개를 골라서 함께 주문했다.
“음식은 방으로 보내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건네는 열쇠를 받아서 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빌린 특실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었다.
“오, 괜히 10실버가 아니군.”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특실은 돈값을 하는 듯 보였다.
널찍한 공간에 푹신푹신한 침대와 깔끔한 테이블이 들어서 있었고, 창가에 놓인 화분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딸려있는 화장실에는 세면을 위해 나무통에 물까지 받아져 있었다.
이런 풀옵션이라면 앨리스를 놔두고 하룻밤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물론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똑똑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곧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보고 앨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이렇게나 많이 주문했니?”
“그래. 너 많이 먹으라고. 대신 말썽 피우지 마라.”
앨리스는 몸만 어른이지 성격은 아직 어린아이와 유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음식 같은 걸로 꼬시면 잘 넘어간다.
나는 식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배낭에서 얇은 체인을 꺼내 침대와 앨리스의 발목에 연결했다. 그렇게 튼튼한 사슬은 아니지만, 앨리스의 육체 능력으로는 끊어내기 어렵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리스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있지, 엘. 내가 인간이 되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뭔지 아니? 바로 음식이야. 너무 맛있어!”
“그러냐.”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앨리스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내가 그녀의 음식을 뺏어 먹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조금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준비를 해볼까.’
나는 품에서 단검을 꺼낸 뒤, 갑옷을 들치고 배를 찔렀다.
“으윽.”
그리 깊게 찌르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피가 흥건하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야!?”
식사 중이던 앨리스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마나 속박 고리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왜, 왜 네 배를 찌른 거니? 빨리 이거 풀어줘. 내가 회복 마법을 써줄게!”
“잠깐만. 피를 좀 흘려야 돼.”
치료소에 있는 백작 영애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도 다칠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옆방인 회복실에 들어가 하룻밤 요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심각한 상처를 낼 수는 없으니, 출혈을 구실로 삼으려고 한다.
이미 흘려버린 피는 사제도 회복시킬 수 없다. 그저 안정을 취하라고 권고할 뿐. 그런 상태에서 돈을 좀 내면 회복실에서 하룻밤 보살펴준다. 나는 은인의 증표가 있으니 무료로 해줄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면 되겠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듯했다. 진짜로 많이 흘릴 필요는 없고, 그냥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앨리스에게 피가 멎을 정도로만 회복 마법을 받은 뒤, 치료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소.
치료 사제의 손이 하얗게 빛난다.
─우우웅
이윽고 상처가 아물자, 여성 사제가 손을 거두며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치료는 끝났지만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흘린 피까지 회복된 건 아니거든요.”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변이었다.
나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가볍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어쩐지 어지럽더라고요.”
“그렇죠?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신 것 같던데, 오늘은 더 움직이지 마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푹 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사제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치료 감사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어억!”
─꽈당!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사제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어, 어머. 괜찮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어지러워서 잠시 발을 헛디뎠네요.”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나는, 벽을 짚고 선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 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혹시 오늘 하루만 치료소에서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비용은 지불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도 회복실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즉시 나를 부축해서 2층에 있는 회복실까지 데려다줬다.
회복실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하게 침대가 몇 개 놓여있고, 치료소의 관계자가 가끔씩 둘러보며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장소였다. 병원의 단체 병실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사제는 나를 회복실 입구 가까이에 있는 침대에 눕히려고 했는데, 나는 부득부득 창가에 있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여기가 백작 영애의 침대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옆방에 바로 그녀가 있다.
“비용 걱정은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수습 사제가 회복실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니, 혹시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있다면 말씀하시구요.”
“예, 감사합니다.”
역시 브로치 덕분인지 공짜였다.
친절했던 사제가 떠난 뒤 눈을 감자 옆방에서 꿈꾸고 있는 백작 영애가 느껴졌다.
“.......”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 회복실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명의 환자가 더 있었다. 지금 꿈속에 들어갔다가는 그들이 발생시키는 소음이나 기척에 의해 방해받아 내가 잠에서 깰 위험이 있다.
지금은 늦은 저녁.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들도 모두 잠들 테니, 그때 들어갈 계획이다.
‘트위스터라면... 회오리바람이겠지?’
백작 영애 레이첼의 중급 마법은 트위스터.
이름으로 추측건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서 공격하는 마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형태의 마법에 맞아 죽으면 된다. 만약 다른 마법으로 공격해온다면 막거나 피해야 한다. 윈드 블레이드 같은 마법에 맞아 죽으면 손해니까.
‘......근데 무슨 꿈을 꾸고 있으려나.’
그녀는 일 년이 넘게 잠들어 있는 상태다.
그것도 악몽을 꾸면서.
유쾌한 꿈은 아닐 테니, 그 꿈속에 들어가야 하는 나로서는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나는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을 통해서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그게 무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그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육체 강화 마법 ‘스트렝스’를 얻기 위해 들어갔었던 꿈. 나는 그 꿈에서 꿈의 주인에게 붙잡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지는 끔찍하고도 생생한 고통을 체험했었다.
‘아오.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아픈 것 같네.’
어디 육체적 고통뿐이랴.
정신적인 피로도도 만만치 않다.
‘랜드 라이즈’를 얻기 위해 들어갔었던 싸이코패스 수배범의 꿈은 얼마나 기괴했던가. 말뚝에 박혀 피를 뚝뚝 흘리던 시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정체불명의 여인과 눈알 없는 괴인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이상한 꿈에 걸리면, 언제든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라고 할지라도 개고생하기 마련이다.
‘제발 이번에는 평범한 꿈이었으면 좋겠군.’
악몽이라고 해서 꼭 끔찍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거미를 무서워하는 사람의 꿈에 거미가 나오면 악몽이지만, 그 꿈속에 들어간 나는 거미를 무서워하지 않으므로 내게는 그저 평범한 꿈일 뿐이다.
운이 좋다면, 백작 영애가 내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듯한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며 악몽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뭐 마법 공부가 어렵다든지, 아버지의 기대가 부담스럽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일 년이 넘게 잠들어 있으므로, 하나의 꿈이 아닌 여러 개의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소등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금세 밤이 된 모양이다.
어느새 들어온 수습 사제가 회복실을 돌아다니며 벽에 걸려있던 등불을 하나하나 끄기 시작했다. 그는 출입문 근처에 있는 등불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끄고 떠났다.
어두워진 덕분인지 머지않아 다른 환자들이 하나둘씩 잠들었다.
“후우....”
어둡고 고요해진 회복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제발... 제발 평범해라...!’
그런 작은 소망을 품은 채, 백작 영애의 꿈으로 들어갔다.
─화아악!
나는 어떤 구조물 안에 있었다.
‘여긴... 탑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사각형의 탑 같았다.
가장자리에는 계단이 둘러져있었고, 텅 비어있는 중앙을 통해 아래위를 살펴보니 그리 높은 탑은 아닌 듯했다.
높지도 않고 크기도 작은 걸 보면, 방어나 감시를 목적으로 지어진 망루 정도로 추정됐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비록 창문도 없고 비좁은 탑이었지만, 일단은 기이한 꿈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마 이 탑을 벗어나면 근처에 마을이나 도시가 있고, 거기에 백작 영애가 있겠지.
나는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사각형의 계단을 내려갔다.
“꿈이 평범하니 꿈의 주인도 평범할 테고... 이거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흐흐흐.”
원래 꿈이라는 게 좀 그렇다. 꿈이 음습하면 꿈꾸는 자도 음습하고, 꿈이 깨끗하면 꿈꾸는 자도 깨끗할 확률이 높다. 깊숙이 숨어있는 무의식이 반영되니까.
─터벅터벅
“......뭐지? 보이는 것보다 좀 높은가?”
계단을 제법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중앙으로 보이는 탑의 밑바닥은 여전히 멀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터벅터벅
“.......”
한참을 더 내려가고도 여전히 멀리 있는 탑의 밑바닥을 보고 확신했다. 나는 지금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처럼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영원히 제자리를 맴도는 계단. 이건 펜로즈의 계단이었다.
“시팔.”
이렇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형태의 구조물이 꿈에 등장했다는 것은, 꿈의 주인인 백작 영애도 어딘가가 좀 이상한 사람임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