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 후작령 (4)
나는 헛숨을 들이켜며 되물었다.
“헛, 소규모 영지전이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베이커 후작령 남쪽 경계면에는, 바네스 자작령과 벌터 자작령이 맞닿아있다네. 최근에는 뜸한 것 같더니만 오늘은 싸우는 모양이로군.”
이럴 수가. 싸움이라니.
불구경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싸움 구경이다. 물론 당사자는 하나도 재미없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꿀잼이다.
귀족들 간의 규모 있는 전투는 어떻게 진행될까? 체스를 두는 것처럼 전략적인 전투를 펼칠까? 아니면 실력 있는 기사끼리 주군의 명예를 걸고 일기토를 펼칠까?
그런 싸움을 해본 적도, 목격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사뭇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구경을 좀 하다가 가는 게 어떻겠나?”
“아닛,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메뚜기야 뭐 네 마리만 더 잡으면 되니,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친김에 편안한 관람을 위하여 마법을 캐스팅했다.
─쿠르르...
[금일 사용 가능한 ‘랜드 라이즈’ - 4회]
땅이 불룩 솟아올랐다. 나는 그곳에 걸터앉아 육포를 꺼내며 말했다.
“좋아, 잘 보이네. 벡 씨도 여기서 보시죠.”
나는 옆에 앉아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앨리스에게 육포를 몇 조각 건네주고, 관람을 시작했다.
저 멀리 들판에 보이는 두 개의 무리.
서로에게 달려가고 있는 그들은 꽤나 거리가 좁혀졌고, 이제 곧 충돌할 듯 보였다.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 설마 저대로 부딪힐 리는 없을 테고... 가까워지면 대열을 정비하고 싸우려나?”
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략? 전술? 그딴 건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양손에 쥔 장난감 자동차를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저들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 무지성으로 격돌했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무식하게 싸워...?”
영지전이라기에 내심 기대했는데, 이건 실망스러운 전투였다.
개개인의 전투 능력과 머릿수를 믿고 밀어붙이는 단순한 방식의 싸움.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누가 이겨도 피해가 클 것 같아 보였다.
내 감상평을 들은 벡이 입을 열었다.
“저들 중 대부분은 용병이라서 그렇다네. 고용주 입장에서는 저들이 죽든 말든 원래 약속한 보수만 지급하면 되니, 싸움의 결과가 빠르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정면 돌격을 선호하지.”
“그럼 영주의 병사나 기사들은 뭘 합니까? 그래도 명색이 영지전인데, 놀고먹고 있지만은 않을 거 아니에요?”
자신의 기사나 병사를 아끼기 위해 용병을 써먹는다지만, 용병은 당연히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이다. 병사를 좀 잃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투입해서 승리하는 것이 더 이득이 아닐까.
“당연히 병사들도 저기에 섞여 있네. 하지만 이런 소규모 영지전에 기사는 잘 투입하지 않아. 만약 투입하면 상대도 기사를 내보낼 테고, 그럼 둘 중 하나는 기사를 잃게 되겠지.”
“아하.”
벡의 설명을 들어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이건 그냥 서로 잽만 날리는 가벼운 전투였다. 영지 전체를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닌, 저 멀리 보이는 평야를 두고 벌이는 작은 땅따먹기.
이기면 좋겠지만, 져도 저 평야만 잃는 것이니 그렇게까지 막심한 손해는 아니다. 그러니 적당히 체면이나 차릴 수 있을 정도로만 힘 조절을 해서 싸우는 모양이었다. 만약 내가 총을 꺼내면 적도 총을 꺼낼 테니까.
영지전은 웬만하면 이런 식이라고 한다.
무척 비효율적이고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영지전이라고 하면 도시를 놓고 벌이는 대규모 공성전 같은 걸 상상했는데... 별거 아니었네요.”
“하하,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네. 그땐 서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지. 지면 끝장이니 온갖 더러운 방법까지 다 동원해서 말일세. 하지만 흔치는 않아. 도시는 결계 때문에 공략이 아주 어렵거든.”
“그렇군요....”
결계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나 보다.
카트카의 불 속성 결계는 따뜻해서 노숙자들이 난로로 사용하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는데 말이지.
아무튼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오러를 쓰는 강력한 검사도 없었고, 간간이 보이는 마법사도 그저 그런 하급 이하의 마법이나 사용할 뿐. 광역 마법을 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평균적인 B급 용병 수준으로 보이네....’
만약 내가 저기에 있었다면, 서로 엉켜서 싸우기 전에 광역 마법으로 절반 정도는 날려버리고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지루하게 구경하고 있었지만, 벡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정말 훌륭한 전투로군...! 역시 용병답게 화끈하게 싸운단 말이지. 바, 방금 저거 봤나? 도끼로 투구까지 그냥 쪼개버리는군!”
B급 모험가인 벡의 눈에는 수준 높은 전투로 보였는지, 그는 손에 땀을 쥐며 몰입해서 관람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싸움은 머지않아 결판이 났다.
한쪽이 항복이라도 한 모양인지, 그들은 일순간에 전투를 멈췄다.
“오른쪽이 이겼네요.”
“그렇군. 벌터 자작이 승리했어.”
오른쪽 진영은 서른 명 정도가 멀쩡히 서 있었고, 왼쪽 진영은 그 절반 정도가 서 있었다.
뭐, 전투가 끝난 뒤 승리한 쪽의 일방적인 학살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서로 부상병을 수습하며 물러났다.
“쩝. 다시 메뚜기나 잡으러 가죠.”
나는 영지전이라는 게 고작 저 정도라면, 피어슨 남작이 케른헴에 쳐들어왔어도 충분히 해볼 만했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오리아의 모험가 길드.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자, 앨리스 씨의 모험가패입니다.”
모아온 거대 메뚜기의 더듬이를 제출하니, 길드 직원이 모험가패를 발급해줬다.
“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앨리스와 함께 길드를 나섰다.
앨리스의 모험가패는 당분간 내가 가지고 다닐 예정이다. 괜히 앨리스한테 줬다가 도망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아직은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어차피 어딜 가든 내가 동행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면 될 것이다.
‘그럼 신분 세탁은 끝났으니... 거기나 한 번 가볼까?’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소.
악몽에 잠식되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마법사가 있는 곳이다.
‘일단은 앨리스도 데려가야겠군.’
꿈에 들어가려면 앨리스는 떼어놓고 가야 하겠지만, 그 전에 정보 수집을 먼저 해야 한다. 잠들어있는 마법사가 어떤 상태인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등.
회복 마법사는 내가 아닌 앨리스이므로, 그녀를 앞장세워서 치료를 빙자해 접근할 생각이다.
“야, 앨리스. 마나 속박 고리를 풀어줄 테니까, 이따가 내가 말한 사람한테 회복 마법을 한 번 써줘.”
“응? 누구 다친 사람 있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써줘. 멀쩡해 보여도 그냥 써. 알겠지?”
어차피 회복 마법은 보여주기식일 뿐이다.
“그래, 알겠어.”
“좋아. 그럼 바로 가보자고.”
나는 앨리스와 함께 오리아에 있는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지만,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유명한 시설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어물어 가다 보니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멋진걸.”
신성하고 장엄한 아우라를 내뿜는 거대한 흰색의 구조물을 바라보니,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케른헴에서 세르시아 교회가 가장 좋은 구조물이었지만, 여기 오리아에 있는 교회에 비하면 그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다시 한번 세르시아 교단의 권세를 실감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교회 옆에 치료소가 별도로 존재했다. 나는 앨리스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 사제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은인께서는 어떤 일로 본 교단의 치료소를 방문하셨습니까? 혹시 치료가 필요하십니까?”
“......은인? 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내 가슴에 달려있던 브로치를 보고 그런 모양이었다.
예전에 고대의 던전에서 치료 사제 엘미나를 구해주고 받은 증표다. 세르시아 교단의 은인임을 나타내는 증표. 이게 있는 사람은 공짜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써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아, 그런 게 아니라 이곳에 악몽에 의해 잠들어있는 분이 계시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여기 이 친구가 회복 마법사거든요.”
나는 앨리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밀러 백작 영애의 치료를 시도해보기 위해 방문하셨군요.”
“예, 바로 그겁니다.”
젊은 사제는 내가 말하는 바를 즉시 이해했다.
“그분께서는 2층에 있는 집중 회복실에 잠들어 계십니다. 외부인이 그곳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사제가 동행해야 하니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신성 마법 한 번에 치료가 끝나는 사람들을 위한 단기 치료실이 있다면, 2층에는 요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회복실이 존재했다. 즉, 병원의 입원실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백작 영애가 잠들어있다는 집중 회복실이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신분패를 요구했다.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백작가의 여식에게 아무나 접근하게 둘 수는 없으니, 백작가에서 파견한 기사인 듯했다.
“여성분께서는 회복 마법사이시고... 그쪽 분은 그냥 마법사 아니시오?”
나와 앨리스의 신분패를 확인한 기사가 그렇게 물었다. 당신은 회복 마법사도 아닌데 뭐 하러 왔냐는 뜻이다.
“아, 저는 앨리스의 보조 역할입니다. 제가 정신계 마법... 그러니까 꿈에 관련된 지식이 좀 있거든요.”
“그렇소? 뭐 좋소.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기사는 내 가슴에 달려있는 브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곧 문을 열어서 우리를 들여보내 줬다.
의외로 쉽게 들여보내 준다 싶었더니, 집중 회복실 안에는 기사가 한 명 더 있었다. 벽면에 붙어있는 고급스러운 침대에 백작 영애로 추정되는 사람이 누워있었고, 침대맡에는 여기사가 서 있었다.
‘철저히 보호하는군....’
모험가 길드 직원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백작이 딸을 반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였다.
침대 근처로 다가가 백작 영애를 살펴봤다.
그녀는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탓인지, 알비노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우릴 안내해준 젊은 사제가 입을 열었다.
“밀러 백작님의 영애이신 레이첼 밀러 님이십니다. 벌써 일 년이 넘게 잠들어 계시지요.”
“일 년이요? 그럼 어떻게 지금까지...?”
일 년이나 밥을 못 먹었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아서 뒷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젊은 사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이해했다.
“저희 지부에는 주교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강제로 생명력을 불어넣으실 수 있기 때문에, 밀러 백작님께서도 이곳에 영애를 맡기신 겁니다.”
“오... 그렇군요.”
왜 백작 정도 되는 인물이 남의 영지에 딸을 놔뒀나 했더니, 이쪽 치료소에 뛰어난 고위 성직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인물이 공짜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리는 없으니, 백작이 보상을 줄인 것도 이해가 됐다. 이미 치료비로 돈이 줄줄 새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건 맞네.’
눈앞의 이 여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무슨 꿈인지는 직접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악몽을 꾸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악몽인 건 어떻게 확신하신 겁니까?”
“사실 확실하진 않습니다. 종종 땀을 흠뻑 흘리면서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이나 비명을 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할 뿐이지요.”
사제의 설명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런 증세를 보인다면 유쾌한 꿈은 아닐 것이다.
“그... 레이첼 님은 마법사라고 하던데, 어느 정도의 마법을 다루는 수준이셨습니까?”
나는 슬쩍 백작 영애의 실력에 대해 물었다.
사실 이게 내 최대의 관심사였다.
“무례한 질문이네요.”
침대맡에 서 있던 여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당신, 그걸 왜 묻는 거죠?”
무례한 것도 맞고, 지금 상황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이상한 게 맞지만, 나는 그럴싸한 핑계를 갖다 붙였다.
“주교님까지 계신 이곳에서 해주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걸 보면, 레이첼 님은 저주에 걸리신 게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악몽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요?”
“무엇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있는지 말이죠. 마법사라면 마법에 관련된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으니, 레이첼 님의 수준을 알려주신다면 어떤 문제를 겪으셨을지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지만, 개소리였다.
그리고 그 개소리는 먹혀들었다.
“......아가씨께서는 어렸을 때 무척 총명하셨어요. 게다가 바람 속성까지 타고나셔서 마법에 대한 성취도 굉장히 빠르셨죠. 그래서 백작님께서도 아가씨께 거는 기대가 굉장히 크셨.......”
나는 그냥 마법 실력만 물었을 뿐인데, 여기사는 백작 영애의 성장 배경부터 줄줄이 읊었다.
외동딸이고, 바람 속성 쿼드러플이며, 어렸을 때는 백작의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성장이 더뎌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그 부담감에 마음의 상처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둥.
여기사는 그렇게 한참을 말하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정보를 말해줬다.
“......해서 아가씨께서 잠들기 전에는 바람 속성의 중급 마법을 겨우 한 개 다루는 수준이셨습니다.”
“중급이요...? 어떤 마법입니까?”
“트위스터입니다.”
중급이라는 말에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지만, 들어도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다.
“트위스터? 공격 마법입니까?”
“네.”
오늘 밤 사냥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