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 후작령 (3)
나는 모험가 길드 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원한 악몽에 잠식되어 있다고요? 그럼 뭐, 저주에 걸린 거 아닙니까?”
악몽의 저주라는 말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단순히 멋있으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 아닐 테니 실제로 악몽을 꾸게 만들겠지.
아마 그런 류의 저주에 걸린 게 아닐까 싶었다.
“아마 저주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던데요?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 사제들이 해주를 시도해봤지만 잠에서 깨지 않았다고 해요. 죽지 않도록 연명시키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라고.......”
과연. 여러 명의 치료 사제가 해주에 실패했다면 저주는 아닐 듯했다. 아니면 그들로서도 해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저주거나.
“근데 그럼 보상은 누가 주겠다고 한 겁니까? 자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밀러 백작이요. 잠들어있는 사람이 밀러 백작의 영애거든요. 그분께서 온갖 회복 마법사나 정신계 마법, 해주 마법을 다루는 자들을 수소문하고 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희 모험가 길드에도 그런 부탁을 해두신 거죠.”
어지간히 절박한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백작 정도의 거물이라면 인맥이 넓을 것이다. 마탑이나 학파에 요청해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고작 모험가 길드에까지 회복 마법사를 수소문하는 걸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겠지.
‘......한 번 찾아가 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앨리스로는 백작 영애를 치료할 수 없다. 현재의 앨리스는 리사의 하위 버전. 해주 마법도 불가능하고, 어설픈 회복 마법 하나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백작 영애가 정말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거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해주 능력은 없어도 꿈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다. 하다못해 꿈을 들여다보면 좀 더 상세한 진단이라도 내릴 수 있겠지.
“보상은 무엇을 준다고 합니까?”
한낱 모험가 길드에도 사람을 요청할 정도로 절박하다면, 보상도 큰 걸 걸지 않았을까 싶어서 물었다.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30골드를 내걸었어요.”
“네? 보상이 줄어들었다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보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상을 더 늘리지 않나?
“처음엔 계속 보상을 늘렸었어요. 치료를 시도하러 오기만 해도 돈을 줄 정도로요. 그런데 오랫동안 아무런 차도는 없고, 돈은 돈대로 나가고. 밀러 백작도 지친 거겠죠.”
“아....”
반쯤 포기상태라는 말 같았다.
딸의 목숨에 고작 30골드를 걸다니. 결투 재판으로 100골드를 먹어본 이력이 있는 나로서는 왠지 적다고 느껴지는 액수였다. 물론 30골드도 거금이긴 하지만.
“백작 영애가 마법사라고 하셨죠?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뛰어난 실력은 아니라고 들은 것 같은데... 관심 있으시면 직접 한 번 찾아가 보세요.”
“흠. 알겠습니다.”
약간의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달려갈 만큼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30골드를 먹기 위해서라도 당장 찾아가 보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백작 영애가 수준 높은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면 마법을 얻기 위해서라도 가보겠지만, 그것 역시 아닌 듯했다.
그래도 찾아가서 손해 볼 건 없으니, 일단 앨리스의 모험가 등록을 완료하고 천천히 가볼 생각이다.
“뭐, 그건 그렇고... 앨리스가 모험가 등록을 끝내려면 무슨 의뢰를 수행하면 됩니까?”
“특별히 정해진 건 없고 일반적인 B급 수준의 의뢰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서 하시면 돼요.”
간단하군.
이건 내가 같이 수행해주면 될 것 같았다. 나 없이 앨리스만 다른 모험가들과 내보낼 수는 없다. 앨리스가 도망갈 수도, 사람을 죽일 수도, 몬스터에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버스를 태워주고 후딱 끝내는 게 편하다.
“저도 오리아의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고 싶습니다.”
나는 모험가패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내가 이곳에서 의뢰를 수행하려면 당연히 이곳에도 등록을 해야 한다. 기존의 모험가로서 활동 지역만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증금만 내면 바로 등록이 완료된다.
“케른헴의 A급 모험가... 엘?”
모험가패를 살피던 직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럼 설마 당신이... 케른헴의 억울한 마법사?!”
“......예? 아, 예.”
“어쩐지! 모험가가 회복 마법사를 노예로 부린다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결투 재판에서 기사를 이긴 모험가라면 충분히 그럴 여력이 있으시겠네요!”
결투 재판 일화가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모험가에게는 큰 사건이었으니. 물론 앨리스가 노예가 된 건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바로 등록해드릴게요!”
“보증금은 얼마죠?”
“보증금이라뇨? 이렇게나 신원이 확실하신 분인데. 보증금 없이 해드릴게요.”
“오, 감사합니다.”
***
오리아의 남쪽에 있는 한 드넓은 경작지 앞.
공짜로 모험가 등록을 마친 나는, 앨리스를 데리고 바로 이곳으로 의뢰를 수행하러 나왔다.
실적이나 보수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으므로, 적당히 쉽고 빨리 끝낼 수 있는 일로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자이언트 로커스트 토벌.
즉, 거대 메뚜기를 처치하는 것이다.
이건 동부 끝자락에 있는 케른헴과 카트카에서는 볼 수 없던 몬스터인데, 여기 중부 지방에는 비옥한 곡창지대가 많아서 거대 메뚜기가 서식한다고 한다.
역시 메뚜기는 농작물을 해치는 주범이다.
“근데 그 몬스터는 얼마나 크죠?”
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경작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대답했다.
“보통은 사람의 팔뚝이나 상체만 한 정도의 몸집을 가지고 있다네. 간혹 사람보다도 큰 녀석이 존재하지만 흔치는 않지.”
대답한 사람은 오리아의 B급 모험가 벡. 이번 의뢰를 함께 수행하기로 했다.
고작 메뚜기를 잡는 일이지만, 나는 이곳 베이커 후작령의 지리나 특성을 잘 모르니 토박이 한 명을 섭외했다.
“어우, 엄청 크네요. 징그럽게. 그런데 그 정도 크기라면 곡식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네. 한두 마리 정도면 사람에게 덤벼들 엄두도 못 내지만, 떼를 짓게 되면 사람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네.”
“으으....”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일반적인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가도 농작물이 아작나는데, 거대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가면 대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무엇보다 거대한 곤충이 떼를 지어 다니면 비주얼이 몹시 끔찍할 것이다.
“그래서 떼를 짓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토벌해서 개체수를 줄이는 걸세. 사전에 막지 못하면... 정말 골치 아프거든.”
“그렇겠네요. 마법으로 불태워 버릴 수도 없고.”
원래 곤충을 처치할 때는 불로 태워버리는 게 직빵이지만, 경작지 위에서 그딴 짓을 했다가는 농작물을 홀랑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아에 타스모스 학파가 들어선 걸세. 전격 마법을 사용하면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놈들을 대량으로 처치할 수 있으니.”
“호오.”
이건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거대 메뚜기 떼를 처치하기 위해 전격 마법의 수요가 많으니, 전격 마법을 다루는 학파가 들어선 것이었다. 마치 도튼에 물 마법의 수요가 많아 청색 마탑이 들어선 것처럼.
역시 도시의 발전은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재밌네요. 뭐,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요?”
“그러세.”
계속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우리는 경작지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의뢰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각자 조금씩 거리를 벌린 뒤, 앞으로 쭉 걸어 나가며 메뚜기를 찾아내서 죽이면 된다. 물론 앨리스는 전투 능력이 없다시피 하니 나와 함께 행동했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근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으적으적으적으적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확인한 앨리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으악! 이, 이게 그거니? 너, 너무 징그러워!”
자기는 얼마 전까지 고블린이었으면서 대체 얼마나 징그럽길래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확인해보니 진짜로 개징그러웠다.
“와... 진짜 극혐이네.”
사람의 다리만 한 메뚜기가 곡식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거의 탈곡기 수준으로 흡입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손도 대고 싶지 않게 생겼기에, 나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9회]
내 손에서 뻗어나간 전류가 닿자, 놈은 타닥! 하고 튀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죽어버렸다.
그대로 놈의 사체로 다가가서 더듬이를 잘라냈다.
“엘, 그건 왜 자르는 거니?”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증거로 가져가야 해.”
더듬이 한 쌍을 제출해야 한 마리를 처치한 걸로 인정해준다고 한다.
그럼 안 죽이고 더듬이만 잘라 오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더듬이를 잃은 곤충은 병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아무튼 이 더듬이를 스무 쌍 가져가야 의뢰가 완료된다.
“오, 자네. 벌써 한 마리 처치했군.”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온 모험가 벡이 메뚜기의 사체를 보며 말했다.
“네. 근데 이거 사체는 어떻게 하죠? 그냥 이대로 버려두고 가도 됩니까?”
“그렇다네. 그대로 놔두면 농민들이 알아서 처리할 걸세. 배고프면 자네가 구워먹어도 되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거대 메뚜기의 사체는 농민들이 잡아먹는 모양이었다. 과연 고단백의 영양 간식이랄까. 구워먹어도 되고, 튀겨먹어도 되고, 볶아먹어도 되지만 나는 안 먹을 것이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수색이나 마저 하죠.”
우리는 다시 메뚜기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동안 돌아다녔지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거대 메뚜기가 딱히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작물보다 몸체의 높이가 낮은 게 문제였다. 멀리서 봐서는 알 수 없었고, 직접 가까이 가봐야만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귀찮았다.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른 의뢰였는데... 이건 뭐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겠는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앨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럼 마법으로 찾으면 안 되니? 너는 뛰어난 마법사잖아. 그런 마법 없어?”
“야, 너는 마법이 만능인 줄 아나 본데. 그런 마법이 어디있......네? 있어!”
생각해보니 있었다.
아까 타스모스 학파에서 구입하고 배운 마법이.
나는 즉시 그 마법을 캐스팅해봤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릭 웹’ - 4회]
내 발밑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미세한 전류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뻗어나간 전류는 이윽고 이 일대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전기의 거미줄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꿈꾸는 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너무 많은 움직임이 느껴져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작은 것들은 배제하고 큰 것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저쪽에...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를 가진 무언가가 움찔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 그럼 빨리 가보자!”
내가 멀지 않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앨리스가 재촉했다. 그곳으로 향하니 정말로 혐오스러운 메뚜기가 조금씩 이동해가며 농작물을 훔쳐 먹고 있었다.
─으적으적으적으적
“오오, 이거 완전 좋은데?”
나는 새로 배운 마법의 성능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스태틱 쇼크로 메뚜기를 튀겨버렸다.
그 뒤부터는 의뢰 수행 속도가 대폭 증가했다.
“벡 씨!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시면 한 마리 있습니다!”
“알겠네!”
나에게 가까운 것은 내가 직접 처리하고, 벡에게 가까운 것은 위치를 알려주면 그가 처리했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가며 메뚜기를 잡다 보니, 경작지의 끝부분에 도달할 때까지 열여섯 쌍의 더듬이를 획득할 수 있었다.
“네 마리만 더 처치하면 되겠군요.”
일자로 직진하며 왔기 때문에, 경작지를 다 뒤진 게 아니라 극히 일부분만 뒤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열여섯 마리나 발견한 걸 보니, 이 경작지는 상당한 명당인 듯했다.
“역시 토박이인 벡 씨와 함께 오길 잘했네요.”
“하핫! 내가 뭘. 다 자네의 마법 덕분이지.”
“그래도 여길 추천해주신 게 벡 씨잖아요.”
나는 처음에 오리아에서 가까운 경작지로 가려고 했는데, 벡이 그런 곳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잔뜩 다녀갔기 때문에 도시에서 먼 곳으로 가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베이커 후작령의 최남단에 있는 경작지로 온 것이다.
“아무튼... 다시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잡으면 금방 끝나겠네요. 일단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
“그러세. 안 그래도 허리가 아프던 참이었다네.”
우리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요로운 경작지가 바람에 쓸리며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풍요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삭이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소리를 감상하고 있던 중, 이질적인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서 들려왔다.
“......함성소리?”
미간을 좁히고 소리에 귀 기울이니, 이건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 같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에 보이는 들판에, 각각 이백 명쯤은 되어 보이는 두 개의 무리가 각자 병장기를 치켜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라...? 저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소규모 영지전이군. 간만에 재밌는 구경을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