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 후작령 (2)
엘디니아 왕국.
내가 살고 있는 이 왕국은 크게 동서남북부와 중부, 이렇게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서남북부의 영주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 지역의 맹주, 즉 공작을 섬긴다. 물론 그 공작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결국 그들도 왕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긴 하다.
어쨌거나 동서남북부는 그 지역을 관장하는 대영주인 공작을 중심으로 잘 규합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다른 곳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유사시에 빠르게 뭉쳐 외세에 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부지방은 조금 다르다고 한다.
외세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중부는, 자기들끼리 교류도 활발하지만 다툼도 잦다고 들었다. 왕이 가까이에 있는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왕은 웬만해서는 영지전을 방관한다고 하는데, 누가 이겨서 땅을 먹어도 어차피 왕국의 영토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알아서 사병을 줄여주니, 왕국 전체의 힘은 줄어들더라도 왕권은 강화되는 효과가 있다.
‘배가 부른 놈들이란 말이지....’
안전한 지방에 살고 있다고 지들끼리 싸우는 놈들이나, 상대적인 왕권 강화를 위해 그걸 구경하기만 하는 왕이나, 골 때리는 놈들인 건 매한가지 같았다.
아무튼, 마차를 타고 닷새를 달린 끝에 드디어 베이커 후작령의 도시 오리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 엘, 저것 좀 봐! 카트카? 거기보다 더 큰 것 같아!”
앨리스가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거대한 도시가 신기한 듯, 쉴 새 없이 몸을 들썩이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음, 그래 보이네.”
창밖으로 보이는 오리아는 한눈에 보아도 카트카보다 규모가 컸으며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게다가 도시 바깥으로 펼쳐진 땅도 더 풍요로운 것이, 과연 중부지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곧 성문에 도착할 것 같았기에, 나는 앨리스에게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전달했다.
“계속 말했지만, 검문을 받을 땐 언행에 주의해야 돼. 너는 일단은 노예의 신분이니까. 알았지?”
앨리스가 경비병 앞에서도 지금처럼 나한테 반말을 찍찍 내뱉는다면 바로 입구컷이다.
“응. 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경비병한테 존댓말을 쓰면 되는 거 맞니?”
“맞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경비병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앨리스는 리사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지만, 그건 노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기에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머지않아 성문에 도착했다.
마차를 세운 경비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신분패를 제시해주십시오.”
“아, 네.”
나는 내 모험가패와, 앨리스의 노예 증서를 건넸다. 그것을 확인하던 경비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험가와... 노예?”
사실 이상한 조합이긴 했다. 평민은 노예를 잘 부리지 않을뿐더러, 그마저도 부유한 상인이 주로 노예를 가졌으니까.
게다가 앨리스는 단아한 회복 마법사의 상이지, 노예의 상이 아니었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타스모스 학파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거기에 적혀있다시피 제가 마법사거든요.”
나는 경비병에 손에 들려있는 모험가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흠...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통과!”
경비병은 앨리스와 노예 증서를 몇 번이나 번갈아 가며 쳐다봤지만, 당연히 서류상에 문제는 없었으므로 통과를 외쳤다.
─달그락달그락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래도 다른 신분을 하나 만들어 주든지 해야겠어.”
평민인 내가 데리고 다니기에 앨리스는 너무 기품 있게 생긴 노예다. 확실한 문서가 있다고는 해도, 남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
오리아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히 식사만 하고, 바로 타스모스 학파를 찾아갔다.
“와아아...! 인간들은 어떻게 이렇게 높은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거니? 와아아....”
학파의 건물을 바라보는 앨리스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와... 진짜 이건 뭐 빌딩이네. 빌딩.”
파격적인 높이인 12층짜리 건물이었다.
게임 속에 떨어진 이래로 이렇게 높은 건물은 처음 봤다. 8층이었던 청색 마탑보다도 높았다.
물론 청색 마탑보다 크다는 소리는 아니다. 층수가 높은 대신 넓이는 작았다. 실제 건물 면적을 따져보면 마탑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칠 듯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높이에 압도되어 한동안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와아아....”
“와....”
지나가던 행인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에, 내가 지금 매우 촌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흠. 이만 들어가자고.”
나는 여전히 벌어져 있는 앨리스의 입을 닫아주고 건물로 다가갔다.
─드르륵
“......?! 미, 미친.”
놀랍게도 타스모스 학파 건물의 입구는 자동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적외선을 쏠리는 없고... 뭔가 마법적인 장치를 해놨나?’
마법의 성지는 다들 이런 식으로 신기한 걸 하나쯤은 마련해두는 모양이다. 청색 마탑은 24시간 냉방이 가능한 에어컨, 타스모스 학파는 자동문.
그럼 바람 마법을 다루는 백색 마탑은 공기 청정기능이라도 있나? 이건 또 사뭇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스마트폰 같은 첨단과학 문명의 혜택을 누려본 사람이기 때문에, 고작 자동문 따위에는 놀라지 않은 척하며 쿨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학파 건물 1층은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로브나 고깔모자를 비롯한 간단한 마법사용 옷부터, 지팡이나 마법이 걸린 아이템까지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이상한 짓 그만하고 얼른 들어와라.”
“엘엘, 이거 너무 신기하지 않니? 문이 자동으로... 으아앗!”
자동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앨리스는 끊임없이 문밖을 넘나들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서 강제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인사하며 맞이했다.
앨리스의 장난에 약간 빡친 모양인지,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를 악물고 말하는 듯한 느낌도 좀 들었다.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셨나요?”
“아, 마법서를 구매하러 왔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안 쪽으로 들어가니, 금은방처럼 생긴 공간이 나왔다. 고급스러운 진열대 위에 마법서가 나열되어 있었고, 손댈 수 없도록 유리로 덮여있었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원하시는 마법서가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나는 그것들을 쭈욱 훑어봤다.
대부분 전격 계열의 마법서였지만, 다른 속성의 마법서도 소수 있었다. 그렇게 대충 훑어보니,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엔 중급 마법서가 없네요?”
내가 직원을 바라보며 묻자, 직원도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중급 마법서요?”
“네. 속성 쉴드를 찾고 있거든요.”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주, 중급부터는 매장에 진열해 두질 않아서... 금방 학파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직원은 모험가, 그것도 검사처럼 보이는 내가 중급 마법서를 구매하러 왔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긴, 모험가에게는 부담되는 금액이니까. 실제로 나는 아직까지 나를 제외하고는 중급 마법을 사용하는 모험가를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진열되어 있는 마법서나 계속 구경하고 있으니, 직원이 서류 뭉치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 한 명을 데려왔다. 그는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중급 마법서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속성 쉴드를 구매하러 왔습니다.”
“속성 쉴드라면... 라이트닝 아머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말한 그는 서류 뭉치를 뒤적거리더니 두 장의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하나는 라이트닝 아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는 종이였고, 나머지 하나는 계약서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있자, 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저희는 중급 마법서를 미리 제작해두지 않습니다. 주문이 들어오고 나서 제작을 시작합니다.”
“흠... 제작에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됩니까?”
“필사를 하고 보안을 위한 몇 가지 마법만 걸면 되기 때문에, 길어도 사흘 내에는 제작이 완료됩니다.”
혹시 오래 걸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삼 일이면 뭐 금방이니까.
“오, 좋네요.”
“그렇다면 계약하시겠습니까? 라이트닝 아머의 가격은 70골드입니다. 계약금으로 7골드를 지불하셔야 하고, 마법서를 수령하실 때 63골드를 내시면 됩니다.”
가격은 얼추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예. 하겠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럼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시고.......”
계약서 작성은 간단했다. 이미 짜여있는 양식에 맞게 내용을 기입하고, 신분패를 확인시켜주면 됐다.
“케른헴...? 케른헴에서 활동하는 모험가 중에 이렇게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분이 계신 줄은 몰랐군요.”
“아, 예. 뭐... 이거 받으시죠.”
단순히 마법서를 구매하는 것일 뿐인데, 무슨 마법적 재능씩이나? 나는 그의 립서비스를 흘려들으며 계약금을 건넸다.
“마법서의 제작이 완료되면 어디로 연락드리면 되겠습니까?”
“음... 그냥 제가 사흘 뒤에 다시 방문할게요.”
아직 오리아에서 숙소를 정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마땅히 연락을 받을 곳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더 문의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 아, 이런 걸 물어도 되려나 모르겠네. 그... 건물 입구에 있던 자동문은 마법으로 만드신 건가요?”
내가 자동문에 대해 묻자, 학파원은 자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희 타스모스 학파에서 최근에 창조해낸 마법을 적용해서 만들었지요. 여기에 있는 이 마법입니다.”
그는 진열대에 놓여있는 마법서 하나를 가리켰다.
“일렉트릭 웹...?”
일렉트릭 웹이라는 이름의 하급 마법서였다. 가격은 하급치고는 비싼 20골드.
“주위에 미세한 전류를 거미줄처럼 흩뿌려서 움직임을 감지해내는 마법입니다. 공격 마법은 아니지만, 위기 대응에는 아주 훌륭합니다. 오직 저희 타스모스 학파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마법이지요. 가격도 매우 합리적으로 책정됐습니다.”
무슨 홈쇼핑 쇼호스트인줄 알았다.
대단히 좋은 상품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이건 마법의 유효범위에 따라 활용도가 달라질 듯했다. 사거리가 짧다면 아무소용 없다. 마법사의 지척거리에 적이 접근했다면, 이미 늦은 거니까.
“흠... 범위는 얼마나 됩니까?”
“그건 술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히 속성에 큰 영향을 받지요. 전격 속성 더블의 하위 마법사가 사용하는 경우, 평범한 여관방 크기 정도의 범위를 가집니다.”
‘오... 나쁘지 않은데?’
여관방 크기라면 별로 쓸모없지만, 그건 속성이 더블인 경우의 얘기. 나는 전격 속성만 다섯 개인 펜투플이니 그보다는 훨씬 넓을 것이다.
그렇다면 꽤 쏠쏠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 싶었다. 적을 탐지하기에도 좋고, 메두사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도 좋고. 물론 그런 몬스터가 어디 흔하겠냐마는.
아무튼 마음에 들었다.
공격 마법은 꿈속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유틸리티 계열의 마법은 오직 마법서로만 배울 수 있다.
“이것도 사겠습니다.”
***
오리아의 모험가 길드 앞.
주문한 마법서를 받아보려면 사흘을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앨리스를 모험가로 등록해볼 생각이다.
“도시의 규모에 비해 작네.”
이곳은 특이하게도 용병 길드는 규모가 크지만, 모험가 길드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오리아 주변에는 몬스터가 그리 많지 않아 모험가의 수요가 적고, 중부 지방에는 귀족 간의 다툼이 많아서 용병의 수요는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뭐, 그래도 케른헴에 비하면 대기업이지.”
나는 앨리스와 함께 길드로 들어가 직원에게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모험가 신규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신규 등록이요...? 이미 모험가로 보이시는데요?”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신규 등록은 모험가가 아닌 자가 모험가로 등록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가 도튼에서 용병으로 신규 등록한 것처럼.
나는 앨리스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제가 아니고 이 친구가 등록할 겁니다.”
“그러셨구나. 신분패를 보여주시겠어요?”
“여기 있습니다.”
앨리스의 노예 증서를 건네자, 직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 노예? 이 여성분이 당신의 노예인가요?”
“예. 혹시 노예는 등록이 안 됩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여성분의 특기가 어떻게 되나요?”
“회복 마법입니다.”
“네에?? 회복 마법사가 어쩌다가 노예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네요.”
경악하던 직원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사과했다. 그리고 바로 등록 절차에 대해 안내했다.
“회복 마법사는 등록이 간단해요. 회복 마법을 직접 시연해 보이고, 의뢰를 한 번만 수행하면 끝입니다.”
“지금 바로 보여드리면 됩니까?”
“네.”
과연. 힐러는 귀족이었다. 용병이 되기 위해 맞짱까지 떠야 했던 나와는 달리, 절차가 매우 간소했다.
나는 앨리스의 마나 속박 고리를 풀어주고, 단검으로 내 손바닥에 작은 상처를 냈다.
“이거 치료해줘.”
“네, 주인님.”
─화아아
상처가 아무는 것을 확인한 길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등급은 B급으로 산정이 됐어요. 혹시 더 높은 등급을 원하신다면 더 큰 상처를 치료하고, 다른 마법들도 보여주셔야 해요.”
“아뇨. 그거면 충분합니다.”
등급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앨리스는 A급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C급을 준다 해도 상관없었다. 신분만 만들면 되니까.
“그럼 이제 의뢰를 하나 수행하시면 모험가 등록이 완료됩니다. 아, 그리고 회복 마법사이시면 세르시아 교단의 치료소에 한 번 가보세요.”
“......? 왜요?”
“거기에 영원한 악몽에 잠식되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마법사가 있다고 해요. 누구든 그걸 치료해주기만 한다면 보상을 주겠다고 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