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 후작령 (1)
잔금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나는 일행들과 함께 한달음에 케른헴의 모험가 길드로 달려갔다.
길드에 리사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를 데리고 들어가기는 곤란했으므로, 적당히 떨어진 으슥한 장소에 데려다 놓고 도린 형제와 올리버에게 감시를 부탁했다.
그렇게 나 혼자서 모험가 길드에 입장했다.
─끼이익
“엘 씨? 엄청 일찍 돌아오셨네요?”
접수대로 다가가니 나를 보고 여직원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던전에 들어간 지 나흘 만에 돌아왔으니. 이건 던전 탐사치고는 상당히 빠른 축에 속한다.
“설마 피어슨 남작이 잔금을 보냈다는 얘기가 던전 내부까지 흘러 들어갔나요?”
“아하하, 그럴 리가요. 탐사를 마치고 나온 겁니다. 잔금 소식은 던전 관리인한테 들은 거고요.”
여직원의 농담에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 탐사를 끝내셨다구요? 역시 능력 있으셔. 어쨌든 잠시만요.”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를 가져왔다. 그것을 접수대 위에 올려놓자, 짤랑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여기, 엘 씨에게 미지급된 60골드예요.”
“흐흐흐. 감사합니다.”
바로 주머니를 챙겨서 품에 넣었다. 묵직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피어슨 남작이 생각보다 빨리 보내줘서 다행이네요. 이제 길드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좀 더 질질 끌 줄 알았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피어슨 남작은 생각보다 쿨한 모양이다.
아니면 에드윈 체스터가 두려웠다거나.
뭐,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난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이제 엘 씨가 케른헴에서 가장 부자가 아닐까 싶네요! 그 돈으로 뭐 하실 거예요? 호화로운 대저택이라도 구매하시려나?”
여직원이 부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뭐 사야 할 게 좀 있어서... 그런 호화로운 저택까지 장만할 여유는 없을 것 같네요.”
슬슬 속성 쉴드를 구매할 생각이다.
결투재판의 잔금을 수령함으로써 내 수중에는 100골드가 넘는 거금이 모였다. 여기에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까지 처분하면 좀 더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아마도 충분하겠지.
아무튼 밖에서 일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여직원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길드를 나섰다.
그렇게 조금 걸어가자, 으슥한 곳에 있는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니 엄청 수상해 보이네.’
도린 형제와 올리버에게 둘러싸여 있는 도플갱어는 한눈에 보아도 굉장히 수상해 보였다. 리사의 얼굴과 로브를 가리기 위해 투박한 망토를 푹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싸구려 망토를 저렇게 쓰고 있는 사람은 어딘가가 좀 구린 구석이 있는 법이다.
“억울한 마법사!”
“드디어 왔군!”
“우리 형제의 오랜 벗이여!”
“......? 뭐냐?”
불과 몇 분밖에 안 떨어져 있었는데, 도린 형제는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처럼 나를 과하게 반겼다.
내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테도린이 멍청하게 웃으며 속내를 밝혔다.
“크흐흐. 그런 거금을 받았는데 맨입으로 넘어가진 않겠지? 오늘 크게 한턱내는 것이다! 억울한 마법사!”
“아, 그런 거였냐. 그래, 뭐 전리품을 처분한 뒤에 술집에 가서 코가 삐뚤어질.......”
나는 흔쾌히 수락하려다가 뒷말을 흐렸다.
생각해보니 도플갱어를 데리고 술집은커녕, 전리품을 처분하러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그런 장소는 모험가들이 자주 드나드니까.
“뭔가?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지?”
“흠... 쏘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 너희도 저주를 풀어야 하잖아? 일단은 너희들끼리 치료소에 갔다가 전리품을 처리하고 와. 나는 얘를 데리고 이 수상한 복장부터 해결해야겠어.”
나는 도플갱어의 망토 끝자락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
던전을 나온 지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작은 건물을 하나 구매했다.
모험가 길드의 여직원이 말했던 것 같은 호화로운 대저택은 아니고, 케른헴 외곽에 있는 허름한 2층짜리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술집으로 쓰이던 건물인데, 워낙 외진 곳에 있는 탓에 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헐값에 사들였다.
무지성 충동구매는 아니다.
일단은 도플갱어를 숨겨둘 장소가 필요했다.
물론 웬만하면 내가 데리고 다니는 편이 좋겠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를 대비해 지하실을 개조해서 도플갱어가 생활할 만한 공간을 마련해줬다.
건물을 구매한 또 다른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나는 꿈에 들어가는 능력의 쿨타임이 돌아왔을 경우, 남들과 함께 잘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꿈에 들어가져 버리니까. 그때마다 매번 노숙하는 것도 고단한 일. 이 건물의 2층에서 잔다면 그런 걱정도 해결이다.
“너, 너무 맛있어...! 이건 무슨 음식이니?”
집에서 스튜를 먹던 도플갱어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무슨 음식을 먹어도 항상 이렇게 황홀해한다.
“그냥 여관에서 사 온 싸구려 스튜인데.”
“스튜? 인간들은 늘 이렇게 맛있는 걸 먹니?”
“이건 그렇게 맛있는 편은 아닌데... 넌 그동안 뭘 먹고 살았는데?”
“나는 주로 슬라임을 먹었어.”
앨리스가 스튜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앨리스는 도플갱어의 이름이다.
당연히 본명은 아니고, 그냥 자기가 선택한 가명이다. 나도 매번 ‘도플갱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기로 했다.
“슬라임...? 그거 맛있냐?”
“그럴 리가 있겠니? 아무 맛도 안 나는걸.”
“그렇군.”
앨리스와는 나름 가까워진 상태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땐 지하실에 가둬두지만, 함께 있을 때는 마나 속박 고리만 채워두고 웬만하면 자유롭게 두는 편이다. 속박 고리도 잠금 기능이 있는 신품이라서, 그녀 스스로는 풀 수 없다.
“있지, 엘. 오늘은 밖에 나가게 해주면 안 돼? 계속 집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하단 말이야.”
그녀가 슬며시 그런 요청을 해왔다.
“일단 그것부터 다 먹어라. 안 그래도 어디 갈 데가 좀 있긴 했어.”
지난 며칠간 케른헴과 카트카를 오가며 전격 속성의 쉴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었다. 뭐, 결국은 황색 마탑이나 관련 학파를 찾아가라는 소리뿐이었지만.
그래서 그곳들 중 하나를 찾아가 볼까 한다.
황색 마탑은 왕국 서부 끝자락에 있다고 해서 후순위로 미뤘다. 동부 끝자락에 있는 케른헴과는 정반대에 있어서 너무 멀기 때문이다.
대신 왕국 중부에 있는 베이커 후작령으로 갈 생각이다. 거기에 전격 마법을 다루는, 꽤 권위 있는 학파가 있다고 한다.
“정말?! 정말이니?! 나도 데려가는 거야?”
“그래. 멀리 갈 거니까 거기선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될 거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최소 열흘 이상은 걸릴 듯했기에 앨리스도 데려가기로 했다.
혼자 놔두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불안하고, 세상 구경을 시켜주며 신뢰를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미리 마법사를 보여주는 것도 도움이 될 테고.
“대신 말썽 피우지 마라. 던전에서처럼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면 절대 안 돼. 알겠어?”
어쨌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몬스터다. 단검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쑤시려 했던 몬스터.
인간 세상에 오랫동안 녹아들어 인간에게 충분히 감화된다면 모를까, 아직은 행동을 주의시킬 필요가 있다.
“알겠어! 약속할게!”
앨리스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아래위로 빠르게 흔들어댔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걱정이 하나 떠올랐다.
“잠깐. 너 신분패가 없잖아?”
케른헴이야 버려진 도시이니 아무 상관 없지만, 다른 도시들은 들어가려면 무조건 신분패가 필요하다.
“신분패...? 그게 뭐니?”
“네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물건이야. 흠... 카트카로 가서 리사인 척하고 모험가패를 재발급 받아야 하나?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한데....”
카트카의 모험가 길드는 리사가 활동하는 근거지다. 거기에서 모험가패를 재발급 받는다면, 반드시 리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케른헴의 모험가 길드에서 신규 등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도시는 케른헴에서 발급된 신분패를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청색 마탑이 있는 도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고민하고 있자, 앨리스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물었다.
“뭐야...? 나 오늘 밖으로 못 나가는 거야...?”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어디에 가려면 신분패가 필요한데... 뭔가 방법이... 아!”
“뭔데뭔데? 방법이 생각났니?”
“그래, 너 잠깐 내 노예가 되어야겠다.”
노예 문서도 하나의 신분패다.
물론 노예 혼자서는 도시로 들어갈 수 없지만, 주인이 함께 있다면 입장이 가능하다.
“어때? 노예가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어차피 난 이미 노예나 다름없잖니? 상관없어.”
***
“후, 드디어 이 번거로운 노예 등록 절차가 끝났군. 얼른 얼굴 가려라. 여긴 리사가 활동하는 도시라 누가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응. 아, 아니, 네 주인님.”
“근처에 사람이 없을 땐 그렇게 부를 필요 없어.”
나는 앨리스의 노예 문서를 두 번이나 작성했다. 하나는 케른헴에서, 또 하나는 카트카에서.
케른헴에서 작성한 것은 그냥 구색만 갖춘 개인 간의 문서였다. 이건 앨리스를 카트카에 입장시키기 위해 만든 것뿐이다. 카트카는 케른헴의 신분도 인정해주니까.
카트카에서 작성한 것이 진짜였다. 담당관이 앨리스에게 정말 노예 계약을 할 거냐고 물은 뒤에, 그녀의 외형을 문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노예로 등록했다. 이건 다른 도시에서도 먹히는 문서다.
“케른헴은 자유롭지만 제약이 참 많은 도시란 말이지... 아무튼 조심해. 이제부턴 네가 문제를 일으키면 전부 내 책임이니까.”
범죄자를 노예로 등록하고 도시로 들이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노예가 일으킨 모든 문제는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
물론 나는 평생 남을 책임져 줄 생각은 없으니, 이번에 가는 베이커 후작령에서 가능하다면 앨리스를 모험가로 등록시키든지 해야겠다.
“아휴, 알았어, 알았어!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니? 걱정 마. 얌전히 굴 테니까.”
“태도가 건방지긴 하지만 나는 관대한 주인이니 봐주도록 하지. 일단 마차를 빌리러 가보자고.”
나는 앨리스와 함께 마차 대여소로 향했다.
싸구려 마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면 허리가 작살날 것이 분명하므로, 승차감이 좋은 고급 마차가 필요하다. 그런 고급 마차는 대여소에서만 빌릴 수 있다.
대여소에 도착하니 직원이 튀어나와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장거리 여행에 타고 갈 만한 마차를 찾고 있습니다만.”
“예예, 이쪽으로 오십쇼!”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몇 개의 마차를 둘러봤다. 그중에서 좌석이 가장 푹신한 걸로 빌리고, 마부도 고용했다.
여행을 위한 물품은 이미 챙겨온 상태였기 때문에, 지체 없이 왕국 중부에 있는 베이커 후작령을 향해 출발했다.
─달그락달그락
“저기, 엘.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곳이니?”
앨리스는 푹신푹신한 좌석이 신기한 모양인지,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었다가 앉기를 반복하며 물었다.
“글쎄, 오리아라는 이름의 도시인데 어떤 곳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나는 그냥 마법사 집단을 찾아가는 거거든.”
베이커 후작령의 도시 오리아.
그곳에 전격 마법을 연구하는 타스모스 학파가 있다. 나름 권위 있는 학파라고 하니, 속성 쉴드도 있을 거라고 한다.
“마법사 집단?! 우, 우와... 그럼 네가 제공해주겠다는 마법사도 거기에 있는 거니? 나는 그 마법사를 흉내 내면 돼?”
“흠... 아니.”
나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묻는 앨리스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권위 있는 학파의 일원을 납치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런 자에게 충분히 오랫동안 앨리스를 붙이기도 쉽지 않고, 마법을 쓰게 만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전격 마법을 얻기 위해 앨리스를 써먹기는 아깝다. 나는 전격 마법은 마법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니까.
물론 아직은 중급까지밖에 안 되지만, 나중에 승격 퀘스트가 발생하면 고급 마법도 마법서로 배울 수 있도록 해금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승격 퀘스트가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지난번 승격 퀘스트는 하급 마법을 3개 배웠을 때 발생했었다. 나는 현재 중급 마법을 4개나 배운 상태. 아마 한두 개 정도만 더 배우면 발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튼... 너 어차피 한 달은 기다려야 모습을 바꿀 수 있잖아? 이번에 네가 할 일은 딱히 없을 테니, 그냥 편하게 인간 세상 구경이나 한다고 생각해.”
“응, 알았어. 너무 기대된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기대를 품은 채, 베이커 후작령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