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71화 (71/200)

던전 탐사 (7)

유령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것은 당혹스러움.

아니, 초조함이었다.

“너, 너는 어찌하여 내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가...!”

자칭 ‘세상을 저주하는 마법사’께서 만드신 저주는, 스스로를 옭아매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럼 이 유령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됐을까.

이미 죽어버린 건 어쩔 수 없으니 제쳐두고, 그래도 자신이 창조해낸 저주가 성공적이었다고 자기 위안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이상한 놈이 들어와서 저주를 씹고 돌아다니고 있다. 어? 이상하네? 내 저주는 실패작이었나? 그럼 나는 개죽음을 당한 건가? 라는 사고의 흐름이 유령을 초조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아, 제가 저주를 막아주는 아이템이 있어서요.”

나는 품속에 있는 메두사의 마안을 주물럭거렸다. 이것은 메두사가 사용하던 석화의 저주보다 낮은 등급의 저주를 막아준다. 처음엔 내가 살면서 저주를 몇 번이나 걸려보겠나 싶었지만,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저주를 막는 아이템...? 그, 그게 무엇인가? 신성력이 담긴 유물? 아니면 고위 악마의 증표? 어, 어서 말해다오! 나의 갈증을 풀어다오...!”

“맨입으로는 좀 그렇고, 여기에 있는 거 다 가져가게 해주시면 알려드릴게요.”

라고 말했지만, 이미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마법 연구 재료들을 옮기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기 때문에, 방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직접 전달해줘야 한다.

“가져가라...! 원하는 만큼, 아니 전부를 가져가도 좋으니, 대체 무엇이 내가 만든 저주를 그리 쉽게 막아냈는지 알려다오!”

유령은 자신의 시신이 놓여있는 마법진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인지, 제자리에서 고개만 휙휙 돌리며 나를 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지런히 물건을 옮겼다. 자꾸 입구를 왕복하는 게 번거로워서, 그냥 아예 일행의 배낭을 넘겨받아서 내가 직접 채워 넣었다.

괜찮은 품질의 마나석들과 다양한 실험 재료들. 마법 연구의 재료로는 몬스터의 신체 부위가 많이 쓰이곤 하는데, 그런 건 이미 다 썩어 문드러져서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보석이 조금 있네.’

다행스럽게도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보석이 소량 있었다. 이런 보석류는 실험에서 무슨 촉매제로 쓰인다고 클로이가 그랬었는데, 자세히는 나도 모른다. 그냥 갖다 팔 생각이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부지런히 쓸어 담은 뒤, 서랍을 뒤져봤다.

“이건... 연구일지?”

서랍 안에는 마법서보다 훨씬 두꺼운 책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연구일지가 있었다. 내가 그것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자, 유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내가 저주를 창조해내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정수가 총망라되어있는 아주 귀중한 일지다.”

유령이 뿌듯해하며 자랑스럽게 설명했지만, 읽어보니 그냥 일기장 비슷한 거였다. 자신이 왜 이 지하 던전에 들어왔는지부터 시작해서, 오늘은 뭘 했는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얘기들까지 적혀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핵심 내용이 담겨있는 건 이 마법서 아닙니까?”

내가 연구일지를 내팽개치고 마법서를 들어 보이자, 유령이 발끈한 기색으로 말했다.

“무지몽매하구나! 무릇 연구란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법이거늘.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할지라도, 내 연구일지 없이는 마법서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흠. 그렇습니까?”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마법서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마법의 이름과 함께, 이게 어떤 마법인지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마법서에는 필수로 적혀있는 것이 여기엔 빠져있었다.

“속성과 등급이 적혀있지 않네요?”

“저주 마법에는 별도의 속성이 없다. 악마의 힘을 다루는 자에게 가중치가 있을 뿐... 너는 내 저주를 막아내는 신묘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간단한 지식조차 없는 것이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유령이 질문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했지만, 어쨌거나 저자 직강을 받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럼 등급은요?”

“등급...?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 마법의 등급이요. 하급이라거나, 중급이라거나 하는 그런 거요.”

“허, 듣기만 해도 끔찍한 분류 방법이로군. 세상에는 귀하지 않은 마법이 단 하나도 없거늘, 어찌 마법간의 높고 낮음을 구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말하는 걸 보면 옛날 사람 같았다.

단순히 일이백 년 전 사람이 아니라, 마법의 등급이 세분화되기 이전 시대의 사람.

“당신은 어느 시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멍청한 질문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지금과 과거의 연호(年號)가 다른데, 어느 시대에 살았었는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설명한다 해도 내가 못 알아들을 것이다.

어쨌든 구시대 또는 고대의 사람인 것 같으니, 이 유령이 창조해낸 마법 역시 구시대 또는 고대의 마법이다.

라이트닝 블래스트처럼 마법서를 한 번 읽기만 해도 습득이 가능할 테니,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마법서를 읽기 시작했다.

대충 읽고 페이지를 슥슥 넘겨대자 유령이 격노했다.

“지금 그게 뭐 하는 짓인가! 연구일지까지 정독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터인데, 그렇게 성의 없이 읽다니. 지금 내 저주를 모독하는 겐가!”

“.......”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참 말이 많은 유령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마법서를 읽었고, 곧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마법 ‘체크 메이트’를 배웠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체크 메이트’ - 3회]

‘이름은 잘 지었단 말이지.’

체크 메이트. 체스 용어다.

킹이 위협받고 있으며, 어떻게 해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자신의 저주에 속박당해 꼼짝 못 하고 죽어버린 저 유령과 썩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즉시 마법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마법의 창시자가 앞에 있으니, 테스트해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어디에다가 써보지?’

무언가를 속박하는 마법인데, 허공에다 쓰기는 좀 그랬다. 그렇다고 도린 형제나 올리버에게 쓰기는 꺼림칙하고, 도플갱어도 마찬가지다. 만에 하나라도 죽으면 안 되니까.

“에라, 모르겠다.”

유령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그 밑에 있는 인골을 목표로 마법을 캐스팅했다.

─츠츠츠...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인골 주변에 짙은 황색을 띤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은 곧 목표물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어 옥죄기 시작했다.

“지, 지, 지금 무슨 짓을...!”

유령은 자신의 발밑을 보고 경악해서 소리쳤다. 그의 밑에는 황색 기운에 의해 옥죄여진 인골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마땅히 쓸 데가 없어서....”

“네가 어떻게 내 저주를 사용할 수 있냐는 말이다!”

자신의 뼈를 건드렸다고 화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서를 읽었잖아요.”

“그렇게 대충 읽고도 마법을 익혔단 말인가...?”

나는 유령의 중얼거림은 흘려들으며, 마법에만 집중했다. 저 알 수 없는 유형의 황색 기운은, 내 의지에 따라 속박하는 범위와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과연 세상은 넓구나. 불세출의 천재로다....”

조금 아쉬운 점은, 혹시 뼈가 부서질까봐 강도를 더 올릴 수가 없다는 것과 목표물의 저항이 없다는 점이다.

역시 살아있는 몬스터나 사람에게 써봐야 진정한 성능을 체감할 수 있을 듯했다.

어쨌든 내 앞엔 훌륭한 선생님이 계시니 몇 가지 궁금한 바를 물었다.

“근데 왜 제가 사용한 저주 마법은 황색이죠? 그쪽이 사용하신 건 검회색이었잖아요.”

“이, 이럴 수가! 그것도 모르다니... 불세출의 천재는 아니었나...? 하지만 한 번만 읽고도 마법을 익혔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로다.”

유령은 혼란스러운 듯 횡설수설했으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것은 너의 주력 속성이 반영되어서 그렇다. 황색인 걸 보아하니 너는 전격 속성의 마법사로군.”

“오, 그렇군요.”

내 마법에 무슨 하자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내 속성 때문에 황색을 띠었을 뿐.

이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불길하고 저주로 의심할 수 있는 검회색 보다는, 일반 마법처럼 보이는 황색이 나을 테니.

“이 마법은 단순히 상대의 움직임만 속박하는 겁니까?”

“아니다. 이것은 술자의 기운으로 상대의 기운을 억제하는 저주. 네 기운이 충분히 강하다면, 저주는 끊임없이 상대를 옥죄고 마나마저 억누를 것이다.”

“캬, 기가 막힌 마법이었네요.”

종합하자면 이건 포승줄에 마나 속박 고리의 역할까지 두루 해낼 수 있는, 하이브리드 마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저자의 직강을 받다 보니, 궁금한 것들은 얼추 해결이 되었다. 그는 설명을 참 잘해줬는데, 살아있을 때 상당히 실력 있던 마법사였지 싶었다. 하긴, 스스로 마법을 창조해내는 수준이니.

“뭐,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그 마법진이라도 지워드릴까요?”

나는 유령 밑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저것 때문에 영혼이 붙잡혀있는 듯했다.

“필요 없다. 나는 생전에 악마와 계약을 한 몸. 내 영혼은 이곳을 벗어나면 악마에게 사로잡힐 것이니. 그럴 바에야 이곳에 영원토록 갇혀있는 편이 낫다.”

흑마법사였군.

“그것보다... 어서 말해다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저주를 막아낸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 깜빡할 뻔했네. 메두사의 마안입니다.”

나는 품에서 마안을 꺼내 들어 보였다.

원래 보여줄 생각까진 없었는데, 잘 협조해줬으니 그냥 보여줬다.

“석화의 저주보다 약한 저주를 막아줍니다. 그쪽이 만드신 저주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과연... 그런 것이었나....”

그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인간과 대화를 하니 즐거웠다.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겠군.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을 테니.”

확실히. 지금 던전에 있는 다른 파티가 이곳을 발견한다 해도, 저주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쿠르르... 쾅!

그리고 랜드 라이즈로 입구를 막은 뒤 떠났다.

***

우리는 하루 만에 던전을 빠져나왔다.

도플갱어가 던전의 지리에 빠삭했던 덕분이다.

“어우, 간만에 햇빛을 받으니 좋구만. 아, 너는 엄청 오랜만에 보겠네?”

나는 던전 입구에서 기지개를 켜며 도플갱어에게 물었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완전히 리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도 포박하고 복면을 씌워둘 순 없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테니까. 그래서 마나 속박 고리만 채워두고 나머지는 풀어준 상태였다.

“.......”

도플갱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뿐.

“태양을 왜 그렇게 쳐다봐? 눈 아프게.”

“저게 태양이니? 나 저거 처음 봐.”

녀석은 태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뭐? 태양을 처음 본다고? 그래도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바깥에서 살았을 거 아니야?”

“나도 몰라. 내 기억이 시작된 곳은 캄캄한 지하 묘지였단 말이야. 입구가 막혀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구.”

던전에서 태어난 건가?

미발견 상태의 던전은 보통 입구가 막혀있다. 막혀있는 입구의 흔적을 찾고, 그 입구를 뚫어야 비로소 던전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지하 묘지도 불과 며칠 전까지는 입구가 꽁꽁 막혀있었다는 소리다.

“그래? 아무튼 얼굴 잘 가려라.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매우 곤란해지니까.”

“응, 알겠어.”

나는 작게 속삭이며 도플갱어의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씌웠다.

이 주변엔 아직 카트카 출신의 모험가들이 많다. 만약 누군가가 리사의 얼굴을 알아보고, 리사가 아닌 것을 알아챈다면 굉장히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케른헴을 떠나 있어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엘 씨? 드디어 나오셨군요.”

누군가 했더니 케른헴 길드 연합체에서 파견한 던전 입구 관리인이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네.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엘 씨가 던전에 들어가 계신 동안 피어슨 남작이 잔금을 보내왔습니다. 어서 모험가 길드로 가셔서 수령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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