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70화 (70/200)

던전 탐사 (6)

이 녀석은 일회용 마법서다.

어떤 마법이든 담을 수 있는 백지 마법서.

도플갱어를 마법사로 만들고,

꿈속에 들어가 그 마법을 얻어낸다.

도플갱어가 흉내 낸 마법이 ‘진짜 마법’으로 판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서 손해 볼 건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활용도가 아주 높을 테니까.

예를 들어 내가 수배범을 잡았을 경우, 도플갱어를 그 수배범으로 변신시키면 나는 총 두 개의 마법을 얻어낼 수 있다. 수배범에게서 하나, 도플갱어에게서 하나.

굳이 수배범이 아니어도 된다. 좋은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누구로 변신시킬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도플갱어도 다음 변신까지는 한 달이 필요하다고하니 천천히 생각해봐도 될 일이다.

“너, 너를 죽여 달라고?”

“그래.”

“호, 혹시 너 미쳤니? 대체 왜?”

도플갱어가 당혹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 제안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

“네가 그토록 소망하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이유가 중요한가?”

“그치만 이상하잖니! 나를 이렇게 꽁꽁 묶어둘 땐 언제고, 기회를 주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죽여 달라고 하니까.”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미 나를 한 번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그, 그렇긴 하지만....”

이 녀석은 몬스터다.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녀석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니, 적당히 둘러대며 압박하면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강한 마법에 맞아 죽는 게 소원이라서 그래.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 녀석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내가 도플갱어를 그런 용도로 써먹기로 마음먹은 이상, 거절한다 해도 녀석을 강제로 마법사로 변신시킬 생각이었으니까.

뭐, 어디 작은 골방에 마법사와 단 둘이만 가둬두면 변신할 수밖에 없겠지. 그 다음엔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괴롭히다가 꿈속에 들어가면 된다.

“......정말이지? 정말 마법사를 흉내 낼 수 있게 해준다는 거지?”

“아, 그렇다니까. 한 달 뒤에, 아니, 솔직히 언제가 될 진 모르겠는데 무조건 기회를 만들어줄게.”

“......알았어.”

도플갱어의 꿈속에서도 마법은 한 번 밖에 얻을 수 없을 테니, 복제할 대상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대상을 물색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으나, 그때까지는 이 녀석을 힐러로 써먹으면 된다. 생각할수록 참 유용한 존재다.

나는 도플갱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좋아! 이제부터 우린 일시적인 동반자다.”

“그럼 내 얼굴에 씌운 이것 좀 벗겨주겠니?”

“아니, 그건 안 되지.”

우리가 아무리 협력관계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아직 이 녀석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내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변신의 쿨타임이 한 달이 아니라 사실은 일주일이라든지. 당분간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 왜! 답답하단 말이야!”

“너 하는 거 봐서. 잘 협조한다면 나중에 풀어줄게. 일단 우리를 지하 3층으로 안내부터 해야겠지?”

“이씨. 거긴 진짜 기분 나쁜데.... 알았어.”

나는 도플갱어를 이끌고 다시 일행들과 합류한 뒤, 지하 3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도린 형제와 올리버에게 저주가 재발해, 도플갱어한테 회복 마법을 받을 무렵쯤 목표했던 지하 3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공기를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크흐흐. 돈 냄새 아니겠나!”

“맞아. 바로 그거야. 흐흐흐.”

우리는 삼류 악당이 작당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음흉하게 웃어댔다.

아니, 악당이 맞나?

지금 우린 무덤 도굴꾼이나 다름없으니.

아무튼 이곳은 돈 냄새가 났다.

지하 2층에 있던 야만스러운 두개골 컬렉션 따위는 없었고, 평범한 통로에 크고 작은 묘실이 붙어있었다. 마치 피라미드 내부 같다고나 할까.

물론 음습하고 끈적거리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지체 높으신 분들의 묘실에 들어있을 진귀한 부장품을 생각하면 그 불쾌함은 상쇄되고도 남았다.

“야, 짝퉁 리사. 네가 말했던 것처럼 기분 나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짜, 짝퉁?! 그렇게 부르지 마!”

도플갱어는 한 번 발끈하고 말을 이었다.

“여긴 입구 근처니까 덜 한 거야. 들어갈수록 더 기분 나빠진다니까? 무서워서 나도 깊이 들어가 본적은 없지만.”

몬스터가 겁도 많군.

하긴, 오랫동안 고블린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이 세상에서 고블린이 이길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뭐, 그건 가보면 알겠지. 일단 가까운 묘실부터 뒤져보자고.”

나는 일행들과 함께 가까이 있는 묘실부터 하나씩 수색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곳은 유골이 안치되어있는 관부터가 달랐다. 지하 2층에 있던 관은 특별할 것 없는 밋밋한 석관이었는데, 여기에 있는 관은 나름대로 재질도 고급스럽고 이런 저런 문양도 새겨져있었다.

조심스럽게 관 뚜껑을 열어봤다.

─드르륵

안에는 인골과 함께 검이 한 자루 들어있었다.

“검이로군?”

“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긴 한데....”

그냥 무난한 검이었다. 오랜 세월에 의해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평범한 검. 이런 건 팔아봤자 별로 돈도 안 된다.

그래도 부장품이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만큼은 고무적이었다. 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묘실의 주인은 생전에 무사 계급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잘 찾아보면 마법사의 묘실이 있을지도....’

그런 기대를 품고 수색을 계속해나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묘실에서 나오는 부장품도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검만 나왔으나, 곧 갑옷이나 투구 등의 방어구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몬스터도.

통로 저편에서 스켈레톤 한 마리가 삐거덕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익...! 이젠 뼈다귀만 봐도 신물이 날 지경이군! 이 던전엔 왜 이렇게 뼈다귀가 많은 것인가!”

테도린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검을 치켜들고 녀석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잠깐. 일반적인 스켈레톤은 아닌 것 같은데?”

스켈레톤의 뻥 뚫린 두 눈에 푸르스름한 안광이 일렁였다. 내 경험상 저런 놈은 마법을 사용한다. 즉, 스켈레톤 메이지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곧 짙푸른 색을 띤 불덩이를 생성해서 날려 보냈다.

─후우웅!

사뭇 불길한 기운을 지닌 불덩어리였지만,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뜨거울까? 아니면 저주에 걸릴까? 물론 맞아서 확인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

─화르륵!

[금일 사용 가능한 ‘파이어 애로우’ - 5회]

스켈레톤 따위에게는 기초 마법이면 충분하다. 나는 진짜 불로 이루어진 화살을 쏘아 보냈다.

불의 화살과 시퍼런 불덩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물론 승자는 나였다. 파이어 애로우는 놈의 마법을 소멸시키고 그대로 날아가 직격했다.

나는 스켈레톤이 불타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하 2층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스켈레톤 메이지가 여기선 제일 먼저 나오네. 아주 좋아.”

“그게 왜 좋은 것인가? 억울한 마법사, 네 녀석이야 저런 마법쯤은 우습게 막겠지만, 우리에겐 위험하단 말이다!”

이것이 검사의 비애다.

마법사인 나로서는 마법을 쉴드로 막을 수도 있고, 다른 마법으로 상쇄시킬 수도 있지만, 검사는 오직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오러를 다룬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도린 형제는 그 수준이 아니므로 이들에게 마법을 쓰는 존재는 위험하다.

“걱정 마. 마법을 쓰는 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어쨌든 보초병이 강할수록 뭔가 중요한 걸 지키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

내가 쉽게 해치우긴 했지만, 그래도 스켈레톤 메이지는 스켈레톤 시리즈 중에서 강력한 편에 속한다.

“듣고 보니 그렇군? 크흐흐.”

“그래. 너희는 저 녀석이나 잘 지키라고. 우리 파티의 유일한 힐러니까.”

나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전도된 모양인지, 테도린은 조금 전까지의 걱정은 싹 지우고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너무나도 소중한 도플갱어를 잘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다시 던전을 나아갔다.

***

던전을 수색하며 나아가던 우리는 어느덧 꽤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특이한 묘실 앞에서 멈춰 섰다.

꿀꺽. 한껏 긴장한 일행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대체 어디에 온 거니? 왜 이렇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누가 설명 좀 해줘!”

복면을 쓰고 있는 도플갱어가 으슬으슬 몸을 떨며 물었다. 이 녀석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때마다 계속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왔다.

하지만 이번엔 호들갑이 아니었다.

눈앞의 묘실에선 진짜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으니까.

“지금껏 거쳐 온 곳과는 확연히 다른 묘실이야. 묘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벽도 온통 시커멓고, 두꺼운 문이 잠겨있네.”

“그, 그럼 빨리 다른 곳으로 가자. 응? 나는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럴 수는 없지. 딱 봐도 여기가 대박일 것 같은데. 지금까지 챙긴 전리품이라고는 검 몇 자루와 부피가 적게 나가는 방어구 몇 개뿐이었다.

고작 고철 값을 벌자고 던전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묘실로 가까이 다가가서 벽과 문을 만지며 살펴봤다.

“벽이랑 문의 재질이 서로 다르네. 문은 평범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 같은데... 이 벽은 대체 뭐로 만든 거지?”

검은색을 띠고 있는 벽의 재질은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두꺼운 돌문보다는 벽이 얇아보였기에, 먼저 이것을 노려보기로 했다.

“다들 벽에서 물러나. 마법을 써볼 테니까.”

─쿠르르......

[금일 사용 가능한 ‘랜드 라이즈’ - 4회]

땅이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묘실의 벽에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랜드 라이즈를 다시 써 봐도, 벽이 아닌 문에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흠... 마법으로는 못 뚫겠는데.”

내게는 무언가를 파괴하기에 적합한 마법이 없다. 오브로 벽을 부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콜링 썬더도 마찬가지다. 그건 지하라 아예 쓰지도 못한다.

라이트닝 블래스트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묘실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벽만 부수고 탈진할 수는 없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테도린이 절박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이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니. 주먹으로 부숴야겠어.”

─지이잉

전신에서 이질적인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트렝스’ - 2회]

나는 전신에 균등하게 퍼져있는 기운을 팔과 주먹 쪽에 집중해서 몰아넣었다. 밝게 빛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잠겨있는 문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묘실의 문에 박혀 들었다. 그리고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한 번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조금씩 부서지며 금이 가던 문은, 이윽고 금을 따라 쪼개지며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

부서진 문 안쪽으로 보이는 장소는 묘실이 아니었다.

어떤 장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굳이 따지자면 마탑에서 봤던 연구실과 비슷했다. 벽면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마나석을 비롯한 마법 연구에 필요한 아이템들과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중앙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위에는 온전한 형태의 인골이 하나 누워있었고, 그 위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반투명한 무언가가 둥실 떠있었다.

‘......유령?’

그것은 생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이곳에 발을 디딘 자, 저주가 내릴지어다.”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내부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유형의 검회색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섣불리 진입하지 않고, 유령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체이턴 로필. 세상을 저주하는 마법사이자, 이곳의 주인이다.”

세상을 저주하는 마법사? 일전에 들었던 ‘섬멸의 기사’ 이상으로 감명 깊은 자기소개였다.

“......그 밑에 있는 인골이 당신입니까? 왜 그런 유령 상태가 되셨죠?”

“이 지하 묘지에는 강력한 저주의 흔적이 남아있다. 나는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고,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저주를 창조해냈다. 허나 그 저주가 폭주하여 나를 사로잡았지.”

“당신이 만든 저주에 사로잡혔다고요? 그게 무슨 저주길래...?”

“체크 메이트. 대상을 움직일 수 없게 가둬두는 속박의 저주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이자는, 자기가 만든 저주에 자기가 걸려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굶어죽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개죽음이 있다니.

“혹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저 책이 당신이 만들었다는 저주의 마법서입니까?”

“왜, 탐나는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거라.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너는 나와 같은 처지가 될지니.”

그는 바닥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검회색 기운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강한 저주입니까? 그래봤자 석화의 저주보다는 약할 거 아니에요?”

“메두사의 저주...? 어찌 감히 인간이 창조해낸 저주를 메두사의 저주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그럴 것 같긴 했다.

청색 마탑의 대스승 니콜스도 석화의 저주는 신화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위 저주라고 했었으니.

“그럼,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으니 가져가겠습니다.”

“어리석구나. 그 탐욕의 대가로 너는 영원토록 이곳에서... 무, 뭣!”

나는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체크 메이트’라는 이름의 마법서를 집었다.

왠지 이것만 가져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엔 마법 연구를 위한 재료들도 많았고, 뒤져보면 또 뭔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나는 공중에 둥둥 떠서 경악하고 있는 유령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것들도 가져가도 됩니까?”

물론 안 된다고 해도 가져갈 거였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