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분쟁 (3)
체스터 백작.
케른헴의 북쪽에 있는 도시 카트카와 그 일대를 통치하는 영주다. 케른헴 근방에 있는 영주 중에서는 세력이 가장 강대하다고 한다.
에드윈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스스로를 체스터 백작을 모시는 기사라고 소개했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만나다보니, 그가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높은 직책일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오면 한 자리 마련해 주겠다고 늘 호언했었으니까.
그런데 체스터 백작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아... 그, 그렇군. 백작님께서는 안녕하신가?”
“그렇소.”
피어슨 남작의 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아하니, 원래 무슨 계략을 꾸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틀어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잘됐군.’
솔직히 체스터 백작 휘하의 기사 신분 정도만 돼도 공증인으로서는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예 백작가의 아들이 와버렸으니 이건 차고 넘쳤다.
남작이 알아보지 못한 걸 보면, 아마 에드윈은 후계자인 장남은 아닐 것이다. 차남이나 삼남, 또는 그 이하겠지만 상관없다. 뭐가됐든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존재인 건 마찬가지니.
“먼저 사실관계를 확인하겠소.”
그렇게 말한 에드윈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케른헴 측 대표자 엘. 이번 결투재판에서 패배할시, 피어슨 남작이 던전 일체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 것이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에드윈은 피어슨 남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빈 피어슨 남작. 남작께서는 이번 결투재판에서 패배할시, 케른헴 길드 연합체가 던전 일체를 소유하고 추가로 그들에게 일백 골드를 배상하기로 한 것에 대해 동의한 것이 사실이오?”
“.......”
남작은 입을 꽉 다문 채로 버티고 있다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아직 시간도 남아있는데 뭘 이렇게 서두르시나. 잠시 저쪽으로 가서 따로 대화 좀 하지.”
“본인은 공증을 위해 왔으니, 사적인 이야기라면 거절하겠소. 공적인 이야기라면 이 자리에서 하시길 바라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결투와 관련된 공적인 이야기라면 나도 있는 자리에서 해야지,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려고?
에드윈은 남작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고는, 그를 향해 재차 물었다.
“패배할시 던전에서 손을 떼고 일백 골드를 넘기기로 동의한 것이 사실이오?”
“......그렇다네.”
피어슨 남작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는 뭔가 불만스러운 듯 이를 꽉 깨물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에드윈은 우리가 말했던 내용들을 서면으로 작성했고, 작성이 완료되자 좌중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결투재판은 피어슨 남작 휘하의 기사 루터 경, 그리고 케른헴의 모험가 엘이 대전사로 나선다. 피어슨 남작 측이 승리할 경우 던전에 대한 소유권.......”
결투재판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서로가 무엇을 걸었는지 등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본 내용은 당사자 간에 합의를 통해 정한 틀림없는 사실임을, 체스터 백작님의 기사, 나 에드윈 체스터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보증한다!”
에드윈의 선언이 끝나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백작가의 보증이라니!
─든든하구만!
물론 케른헴 측 진영에서만 환호했다.
내가 데려온 공증인이었으니 모험가와 용병들은 좋아라했고, 반대편에 있는 피어슨 남작 측 사람들은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기세가 뒤집히는 듯하자, 피어슨 남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표정이 왜 그런가!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 루터 경이 한낱 모험가에게 패배할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오늘 승리할 것이고, 전리품으로 던전을 차지할 것이다!”
그래도 영주는 영주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똥을 씹은 듯한 표정을 싹 지우고, 위풍당당하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러자 곧 그들도 함성을 내질렀다.
─우오오오!!
─그렇지! 루터 경께서 지실 리가 없지!
─던전에 깃발을 꽂으러 가보세!
이에 질세라 케른헴 측에서도 다시 소리쳤고, 그렇게 양 진영 간에 팽팽한 기세 싸움이 벌어졌다.
─엘은 메두사도 이긴 남자다! 이번에도 이길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인사괴물도 처치했다고!
사실 그들이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원래 기세라는 게 그렇다. 기세에서 밀리면 선수도 따라서 위축된다. 스포츠도 홈그라운드에서는 승률이 올라가지 않는가? 이것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나만 잘 하면 되겠군.’
일단 피어슨 남작이 에드윈을 보고 당황한 시점에서부터, 판 자체는 유리하게 짜여졌다. 그 유리한 판 위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결투를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피어슨 남작 측 진영에 마련된 참관인석.
“아버님....”
남작의 장남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대가 너무 거물을 불러왔습니다. 이래서는... 놈을 죽일 수가 없잖습니까...?”
“닥쳐라! 이 멍청한 녀석! 네 입으로 저놈에겐 귀족과의 연줄이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죄, 죄송합니다.”
피어슨 남작은 형편없는 정보력을 가진 자신의 아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야단쳤다.
원래는 모험가가 데려온 공증인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었다. 매수한 뒤, 결투재판 결과에 상관없이 적당한 건수를 잡아 모험가를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증인은 체스터 백작가의 일원.
돈 몇 푼으로 매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닐뿐더러, 그가 명예와 이름을 걸고 보증에 나선 이상 어설픈 트집을 잡아 모험가를 죽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래도 결투에서 죽일 수는 있지. 가서 루터에게 놈을 무조건 죽이라고 전해라.”
사실 결투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굳이 놈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던전을 얻고, 백 골드도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겼는데 굳이 살려줄 필요도 없었다. 놈을 죽여서 감히 귀족에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되는지, 케른헴의 하층민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만약 루터 경이 패배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골드도 아직 준비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럴 리는 없다. 애당초 질 리도 없겠지만, 내 오늘 루터에게 특별한 약까지 선물했지.”
피어슨 남작은 아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약물.
예전에 다른 도시의 연금술사 길드에서 우연히 구한 약물이다. 그들은 실패작이라며 팔지 않으려 했지만, 남작은 흥미를 느껴 기어코 구입했었다.
물론 그 약이 복용자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지도,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주지도 않지만, 적어도 고통을 잊고 전투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번 결투에서 루터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가 될 것이다. 크크.”
그의 기사는 약의 부작용으로 며칠을 앓아눕겠지만, 던전과 백 골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피어슨 남작은 생각했다.
***
결투를 위해 비워둔 평야.
반대편에 피어슨 남작의 기사가 서있다.
‘이 정도면 거리는 충분하군.’
나는 마법사이기 때문에, 공평한 결투를 위해 서로간의 거리를 두고 시작하기로 했다.
당연히 엄청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양측이 합의해서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만큼만 떨어졌다.
“두 대전사 모두 준비 됐나!”
에드윈이 나와 기사를 향해 물었다.
나는 검을 뽑아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투 시작!”
외침과 함께 결투가 시작됐다.
시작과 동시에 전력으로 달려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대는 아직 제자리에 서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쥔 검을 자신의 가슴 앞쪽에 세로로 세워들며, 한껏 멋들어져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피어슨 남작님의 적을 베는 검이자, 그분을 지키는 방패이며, 치열했던 요렌 전투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승리를 이끌어낸, 섬멸의 기사 루터다!”
“.......”
그는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가며 자신을 소개했는데, 듣는 내가 온몸이 간지러워질 정도로 오그라드는 소개였다. 스스로를 ‘섬멸의 기사’라고 칭하다니? 보통 낯짝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소개를 할 거면 진작 했어야지, 왜 결투가 시작하고 나서 한단 말인가. 원래 이게 기사들의 룰인가?
“과연 미천한 모험가답게 무례하구나!”
“......?”
루터라는 기사는 내게 버럭 화를 냈다.
“기회를 줄 때 어서 너를 소개해라! 그게 네 삶에 있어서 마지막 소개가 될 터이니!”
그는 나에게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검을 겨누는 자세조차 상당히 공들이는 것이, 남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는 듯했다.
어쨌든 나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도저히 저놈처럼 부끄러운 수식어를 붙여가며 나를 소개할 자신도 없었고, 왜 결투 중에 이래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간단하게 가자.
“나는... 케른헴의 억울한 마법사다!”
“뭐? 푸하하! 무슨 그런 촌스러─컥!”
─번쩍!
─꽈릉!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2회]
돌연 청명한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혔다.
당연히 한 번만 내리친 것은 아니다.
나는 상대가 오러를 쓰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낼 것이다.
─번쩍! 번쩍!
─꽈릉! 꽈릉!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0회]
갑작스럽게 세 번의 벼락을 연달아 맞은 기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가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땅에 꽂은 검을 붙들고 버티고 있어서였다.
“.......”
“.......”
결투장과 관람석에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곧 무언가가 불타오르는 소리에 의해 깨졌다.
─화르르륵!
내 머리 위에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 구체는 맹렬히 회전하면서, 주변에 작은 불덩어리들을 내뿜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플레임 오브’ - 1회]
나는 검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기사를 향해, 즉시 화염의 구체를 쏘아 보냈다.
관람석에 앉아있던 피어슨 남작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 돼! 당장 일어나라 루터! 피해!”
남작의 명령에도 루터는 온전히 일어서지 못했다. 그저 기어가듯 몸을 움직였을 뿐.
거리 덕분에 플레임 오브에 직격당하는 것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지척을 스쳐가며 내뿜은 불덩이들에 의해 그의 전신은 불길에 휩싸였다.
─드르륵 드르륵
루터는 즉시 바닥에서 좌우로 뒹굴었다.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단순히 목적 없이 뒹구는 건 아닌 듯 보였다.
‘불도 끄고 추가 마법도 피하겠다는 건가.’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사사삭. 사삭. 사사삭.
내 주위에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무수히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얼음 조각들은 마치 유리가루가 쏟아지듯 기사를 향해 쏟아져나갔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프로즌 더스트’ - 2회]
이것은 상대를 얼리는 것이 아니라 가시처럼 틀어박히는 마법. 불에 의해 금방 녹겠지만, 그 전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캉캉캉캉캉캉!
얼음 조각들이 갑옷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다고 해도 빈틈은 있는 법. 말을 타기 위해 안장이 닿는 부분은 비어있고, 상대는 바닥을 뒹구느라 그곳이 노출되어 있다.
그가 굴러간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먹혀들은 건가?’
놈은 이상하게도 비명이나 신음을 흘리질 않았다. 심지어 몸이 불타고 있는데도.
어쨌든 피를 흘리고 있으니 유효한 피해를 입힌 건 분명했다. 바닥을 구르는 속도도 둔화되고 있었기에, 나는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그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휘오오
몰려든 바람이 얽히며 칼날을 만들어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윈드 블레이드’ - 2회]
바닥을 구르던 그간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불은 거의 꺼진 상태였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그에게 칼날을 날려 보냈다.
─서걱!
검을 쥔 그의 오른팔이 갑옷과 함께 잘려나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
그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왼팔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 상태로 움직일 수 있다고...?’
뭔가 이상했다. 루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비명이나 신음을 전혀 흘리지 않고 있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루터가 나에게 힘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는 이미 전투불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하겠다면, 죽이는 수밖에.
나는 몸을 뒤로 내빼서 그의 검을 피하고, 다시 마법을 캐스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