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분쟁
지상의 던전 출입구는 케른헴에 있으나,
지하에 있는 던전 내부는 피어슨 남작령에도 걸쳐있다는 것.
“던전 내부가 많이 넘어가있습니까?”
“일부분이에요. 깊이 들어갈수록 남작령의 비율이 조금씩 높아지기는 하는데, 그래도 얼마 안 돼요. 아마 일할이나 이할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요.”
“추정...?”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여직원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얼마 탐사해보지도 못했고, 지하에 있는 곳이라 정확히 측량하기도 어려워요. 던전 안에서 지상까지 구멍을 뚫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어림짐작이라도 해보려고 해도, 피어슨 남작이 아예 던전의 출입을 막고 있으니 이젠 그것조차 불가능해요. 본인도 아는 거죠. 자신의 비율이 낮다는 걸.”
“흠... 그렇군요.”
어떤 상황인지 대충 윤곽이 그려졌다.
정확한 측정은 불가능하지만, 던전이 피어슨 남작령에 걸친 부분은 많이 쳐줘도 20%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피어슨 남작도 그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으니, 본격적인 탐사로 인해 비율이 들통 나는 것을 막으려고 출입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즉, 무작정 소유권을 주장하며 버티기 모드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거 완전히 양아치네요. 혹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또 있었습니까?”
전례가 있다면 문제 해결에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물음에, 여직원이 앞에 놓여있던 문서들을 양손으로 가득 집어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지금 그걸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일단은 던전 입구를 가진 쪽에서 던전 전체를 소유하는 게 관례예요.”
“관례라면... 강제성은 없다는 거군요.”
“맞아요. 그래서 피어슨 남작이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거겠죠.”
그녀는 다시 서류뭉치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어쨌든 내일 아침에 케른헴 길드 연합체에서 피어슨 남작과 협상을 시도해볼 거예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협상이라.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미 던전 입구를 점거하고 있으니, 주도권은 그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켜주지 않겠다고 부득부득 버틴다면, 싸워서 뺏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평민이 먼저 귀족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심지어 상대는 몰락귀족도 아닌 영주다.
비록 피어슨 남작령의 규모가 작고, 그의 도시는 케른헴보다도 작은 소도시라고는 하나, 평민이 쉬이 넘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엘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내일 협상단의 일원으로 참여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요?”
나는 여직원의 뜬금없는 부탁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굵직한 길드의 수장과 직원 몇 명만 대동해서 갈 줄 알았는데.
“네. 엘 씨도 이곳에서 충분히 오랫동안 활동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케른헴에서 엘 씨보다 강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접수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 두 손을 맞잡았다.
“꼭 좀 부탁드려요! 피어슨 남작 쪽에서는 병사들을 대동해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데, 저희만 맨몸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이쪽에서도 케른헴 최강자 정도는 같이 가야 안심할 수 있죠! 네? 네?”
나는 아주 잠깐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케른헴은 내 고향과도 같은 곳.
도울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한다.
“알겠습니다.”
뭐, 당장 싸우러가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하러가는 건데 내뺄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요, 엘 씨! 원래 다른 분께 부탁드리려고 했었는데, 마침 엘 씨가 오셔서 더 잘 됐네요.”
“그럼 내일 아침에 길드로 오면 됩니까?”
“네. 여기서 저희와 함께 출발하시면 돼요.”
그제서야 여직원은 내 손을 놓아주었다.
다시 접수대에 앉은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작은 종이쪼가리 하나를 내밀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거 받으세요. 그 시끄러운 형제분들이 혹시 엘 씨가 오시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시끄러운...? 아, 도린 형제요?”
종이에는 이곳으로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여관과 술집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었다.
“음.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수고하세요.”
“내일 봬요!”
나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인사하는 여직원을 뒤로하고 모험가 길드를 나섰다.
***
땅거미가 내려앉은 케른헴의 저녁.
나는 도린 형제가 머물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내일 있을 일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귀족과의 협상이라... 설마 싸움이 벌어지진 않겠지?”
혹시 피어슨 남작이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 같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는 엄청난 지탄을 받는다. 명분을 잃어버리게 된다고나할까.
서로 의견 조율이 잘 안 돼도 언성이 높아질지언정, 그 자리에서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비매너는 아니겠지.”
어쨌거나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니, 곧 도린 형제가 머물고 있다는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관은 케른헴 광장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즉, 나름대로 고급진 곳이라는 뜻이다. 녀석들도 이제 B급이니, 씀씀이가 커진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삼형제가 눈에 들어왔다.
“야, 너희는 무슨 벌써부터 술을 마시냐.”
라고 말하며 다가갔지만, 잘 생각해보니 나도 ‘오늘의 기억’에서 툭하면 대낮에도 독주를 마시곤 했다.
“억울한 마법사!”
“왔나!”
“너도 한 잔 해라! 여기 맥주 한 잔 주시오!”
도린 형제가 환대하며 술을 추가로 주문했다. 나는 그들의 테이블에 합석하고, 둘째를 향해 물었다.
“어제 얻어맞은 건 좀 어때? 괜찮아?”
“이 정도쯤은 문제없다!”
그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멀쩡해 보였으나, 꿈속에서 죽을 때까지 직접 맞아본 나로서는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다.
“세르시아 교회의 치료소는 갔다 왔어?”
“그렇다. 엘미나 사제님이 우리를 알아보고 직접 치료해주시더군.”
“오, 그래? 치료하는데 든 비용 다 말해봐. 약속대로 내가 다 보상해줄 테니.”
그렇게 치료비를 정산해주고 있으니, 주문한 맥주가 도착했다. 나는 크게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너희도 그 소식 들었어? 던전이 발견됐고, 강제로 점거당하고 있다는 거 말이야.”
“우리도 들었다. 개자식들!”
테도린이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케른헴의 모든 용병들과 모험가들은 화가 잔뜩 나있는 상태다! 간만에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웬 귀족 놈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다니!”
“더럽고 탐욕스러운 귀족 놈들!”
“귀족은 전부 죽여 버려야한다!”
“미, 미친. 그런 거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히 큰 소리로 봉건제 타도를 외치다니?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런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당하기 마련이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크흐흐. 들으면 뭐 어떤가? 어차피 귀족이 없는 도시인데.”
테도린이 웃으며 묘하게 일리 있는 말을 했다.
그렇다. 케른헴은 버려진 도시.
귀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조차도 드물다. 내가 최근에 다른 도시에 자주 드나들어서 그렇지, 이곳만큼 마음 놓고 귀족을 욕하기에 적합한 도시도 없었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라. 어쨌거나 내일 길드 연합체에서 피어슨 남작을 찾아가서 협상을 한다고 하더라.”
“허! 협상? 결렬됐으면 좋겠군.”
그가 코웃음 치며 그런 악담을 퍼부었다.
“뭐야. 잘 되길 빌어야지 왜 저주를 해?”
“억지는 그 귀족 놈이 부리고 있는데 뭐 하러 협상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싸우는 것이 낫다!”
“귀족과 싸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정당한 명분부터 있어야 할 텐데.”
“자기방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나! 놈이 던전을 갖겠다고 우리에게 칼을 휘두른다면, 나 테도린이 앞장서서 상대해줄 것이다!”
테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말하는 품새는 무슨 진격을 앞둔 불세출의 명장 같았지만, 현실은 기사한테 3초 컷이다.
***
다음 날 아침. 케른헴의 모험가 길드.
협상을 하러 출발하기에 앞서, 길드에서 준비한 정보를 공유 받았다. 나도 협상단의 일원이니까.
협상단은 총 여섯 명으로 꾸려졌다.
케른헴에 있는 각 길드의 수장이 전부 가는 게 아니라, 대표로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만 나선다. 이 두 길드가 가장 크기도 하고, 던전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다.
모험가 길드장, 여직원, 그리고 A급인 나.
용병 길드도 마찬가지로 구성됐다.
“슬슬 출발하지.”
모험가 길드장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가만 보면 이 양반은 던전이 발견됐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길드 밖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협상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달그락달그락
목적지는 던전 입구 근처다.
그곳에서 피어슨 남작과 대면하기로 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면 좋겠어요.”
옆자리에 앉은 길드 여직원이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내게 희망사항을 말했다.
“엘 씨도 피어슨 남작을 설득할만한 논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주세요. 눈뜨고 던전을 뺏길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긴장감이 흐르는 마차를 타고 한동안 달리니,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던전 입구는 열 명 가량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길쭉한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말뚝이 박혀있는 걸 보니 케른헴과 남작령의 경계면에 회담장을 마련한 것 같았다.
‘입구랑 경계면이 가깝긴 하네.’
왜 피어슨 남작이 억지를 쓰며 버티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입구에 있던 병사 하나가 건들거리며 다가와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쇼.”
“.......”
태도가 아주 불량했기에, 우리는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고 회담장으로 향했다.
회담장은 좀 유치하게 만들어져있었다.
우리 쪽은 등받이 없이 엉덩이만 간신히 걸칠 수 있는 자그마한 의자였고, 상대 쪽은 평범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앉는 게 더 불편해보여서 그냥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피어슨 남작님께서 오십니다!”
─다그닥다그닥
병사 하나의 외침과 함께, 중년의 남성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그리고 두 명의 기사가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남작이 회담장에 도착하자, 병사 하나가 말 옆에 웅크리고 엎드려서 인간 디딤돌을 만들었다. 남작은 그걸 밟고 말에서 내려왔다.
작위가 있는 귀족은 원래 저러는 건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앉아라.”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고는 우리에게도 착석을 권했다. 우리가 전부 착석하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렇소.”
모험가 길드장이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물려주시길 요청 드리는 바요.”
“하, 내가 왜?”
남작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던전은 관례상 입구가 위치한 지역에서 소유하고 있소. 사 년 전 그레이 자작령과 포웰 백작령 사이에 던전이 발견됐을 때도 그랬고, 십 년 전 포터 백작─”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길드장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설마 귀족들 간의 분쟁사례를 근거로 들이미는 건가? 너도 귀족인가?”
“그건....”
“그리고 관례는 관례일 뿐이다. 내가 그걸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피어슨 남작은 너도 귀족이냐는 꼽까지 주면서 모험가 길드장을 침묵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길드 여직원이 나섰다.
“그렇다면 내부를 측량하게 해주세요. 양측에서 공동으로 팀을 꾸려서 측량한 뒤에, 그 결과에 따라서 던전의 소유권 비율을 나누─”
“지하에 파묻혀있는 던전을 무슨 수로 측량하지? 지하에서 거기가 내 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는 말이야.”
“그래도 어림짐작이라도─”
“거절한다.”
이놈은 툭하면 남의 말을 끊어댔다.
용병 길드에서 온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메두사 레이드 때도 그렇고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과 가까이에 있는 말뚝으로 걸어갔다.
케른헴과 남작령의 경계를 구분 짓는 말뚝.
그 앞에 서서 피어슨 남작을 불렀다.
“피어슨 남작님.”
나는 팔을 뻗어 주먹이 남작령으로 넘어가게 했다.
“이 주먹이 누구의 것입니까?”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주마.
“내꺼지.”
단박에 부정당했다.
“내 땅에 넘어왔으니 나는 그 주먹을 당장이라도 잘라서 가질 수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지.”
과연. 이 세계는 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계속 따졌다.
“그렇게 따지면 던전 입구에 있는 남작님의 병사들도 케른헴 땅에 침범한 거 아닙니까?”
“그건 다르다. 케른헴은 주인이 없지 않은가?”
“주인은 없어도 주민은 있습니다.”
“주민은 있어도 주인은 없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말꼬리만 잡는, 의미 없는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시간낭비 같았기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관례도 따르기 싫다고 하시고, 측량결과대로 비율을 나누기도 싫다고 하시고. 그럼 대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나는 던전 전부를 원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뻔뻔함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협상단 전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지어 협상 내내 한 마디도 없던 용병 길드까지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너무 억지 아니신가요?”
“절반도 아니고 전부를 갖겠다니!”
피어슨 남작은 저마다 소리쳐대는 협상단을 보며 히죽거렸다.
“좀처럼 서로 간에 의견 조율이 안 되는군. 이럴 때 좋은 해결방법이 하나 있지.”
“......그게 뭡니까?”
그는 여전히 히죽거리면서 대답했다.
“결투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