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60화 (60/200)

돌아온 카트카 (6)

짧지만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던 고통의 시간은 마침내 끝이 났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그렇게 아무런 행동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얼마간 시간이 흐르니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설마 내가 진짜로 죽은 건 아니겠지.’

라는 의문이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꿈에 들어가서 죽을 때마다 이따금씩 치미는 의문이다.

플레임 오브에 맞아 산채로 불타고,

블리자드에 맞아 얼어 죽고,

윈드 블레이드에 맞아 목이 잘리고,

온몸에 구멍이 뚫려 죽거나, 땅과 천장 사이에 끼어서 압사당하는 등.

남들은 평생 죽기 직전에 딱 한 번만 느껴볼 고통들을, 나는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꿈속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쩌면 이건 현실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품게끔 만든다.

특히 이번처럼 오래 걸리는 죽음이라면 더더욱.

현실과 다름없는 고통들은, 나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나를 좀먹어가며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 말고 정신 차리자!’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어쨌든 꿈이고, 그 고통의 대가로 다양한 마법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남들은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는 능력이다. 정 견디기 힘들다면 꿈속에 들어가는 것을 멈추면 될 일.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내 선택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습득한다.’

나에게 끔찍한 고통을 준 녀석이니 그냥 훔치고 죽여 버릴까도 잠시 고민해봤지만, 그런다고 내가 얻는 이득은 딱히 없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백작가는 생포해오는 걸 더 선호하기도 하고.

[마법 ‘스트렝스’를 습득했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트렝스’ - 3회]

[동일한 대상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흐. 흐흐흐.”

기분전환도 할 겸 일단 한번 웃어봤다.

원래 마법을 얻고 나서는 이렇게 한번 웃으면서 기분을 내줘야 한다. 그래야 고통스러웠던 꿈속에서의 기억과 새로 마법을 얻었다는 기쁨을 치환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번에 얻은 마법의 횟수는 3회.

전격 속성의 콜링 썬더를 제외한 다른 중급 마법들은 2회의 사용횟수를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후한 편이었다.

‘테스트나 한번 해볼까?’

그동안은 거의 도시 안에서 마법을 얻었기 때문에, 얻고 나서 즉석에서 테스트해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 밖. 기물파손이나 인명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을 더듬거리며 홰를 찾아 불을 붙였다. 해가 진 모양인지 동굴에 들어오던 한 줄기 빛마저 사라졌기에 완전한 암흑이었다.

횃불을 들고 동굴 입구로 다가가서 랜드 라이즈로 흙벽을 허물었다.

─푸스스

밖은 선선한 저녁이었다. 굳이 횃불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아서, 이건 그냥 동굴 벽면에 다시 꽂아 넣었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서 마법을 테스트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는 동굴과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커다란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 뒤 새로 얻은 마법을 캐스팅했다.

─지이잉

‘......!’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곧 전신에서 이질적인 힘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스트렝스’ - 2회]

고개를 숙여 은은하게 빛을 발산하고 있는 내 몸을 살폈다. 마치 인간 반딧불이라도 된 것 같았다.

‘신기하네.’

나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팔을 휘적거렸다.

가볍다. 확실히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힘과 함께 자신감 역시 끓어올랐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조차도, 일격에 쪼개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바위를 응시했다.

“......좋아. 반으로 쪼개주지. 하압!!”

나는 바위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쿵!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먹이 닿은 부위만 조금 부서졌을 뿐.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목격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왠지 머쓱해져서 툴툴거렸다.

“뭐야. 고작 이 정도야? 주먹만 얼얼하고... 그놈이 쓸 땐 훨씬 강했었는데.”

물론 맨손으로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수배범이 썼을 때에는 바위에 주먹이 거의 통째로 틀어박혔었다. 내가 땅 속성이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위력에 차이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수배범은 다른 부위에 비해 팔만 특히 더 밝게 빛났었다.

‘특정 부분에 힘을 몰아줄 수 있는 건가?’

아마 녀석은 팔을 제외한 신체의 다른 부위는 조금만 강화하고, 팔을 중점적으로 강화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못 할 건 없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몸에서 느껴지고 있는 이질적인 힘을 팔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했다.

마나를 움직이는 것처럼 노력하자, 곧 몸에서 발하는 빛이 흐릿해지는 대신, 팔은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거였군. 별로 어렵진 않네.’

나는 밝게 빛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재차 바위를 향해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주먹이 절반 이상 바위에 박혀 들었다.

이번에는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위력이었다.

물론 나는 이것보다 강력한 한방을 가진 마법을 다룰 수 있으니, 굳이 팔에만 집중해서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전신을 강화해서 밸런스 있게 활용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뭐,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쓰면 되겠지.

어쨌거나 무언가를 때려 부수니 스트레스가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바위가 수배범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한동안 더 두들겨 팼다.

***

다음 날 정오.

나는 수배범을 이끌고 카트카로 향하고 있다.

꼭두새벽에 은신처에서 출발했으나, 마차 없이 걸어가는 관계로 정오가 다됐지만 아직까지 도시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한두 시간은 더 걸어야 하지 싶다.

“야. 똑바로 걸어라.”

나는 손에 쥐고 있는 포승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으으....”

수배범은 산책하는 강아지처럼 목줄을 달고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허약한 체구답게 저질스러운 체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 얼마 전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사람을 때려죽이는 포악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니. 과연 세상은 요지경이다.

놈이 비틀거리며 걷다가 돌연 뒤를 돌아봤다.

“자, 잠시만 쉬었다 가면 안 되겠나.”

“쉬는 건 감옥 가면 평생 쉴 수 있을 거야.”

“지, 짐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다.”

그는 내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게 뭐가 무거워? 그냥 닥치고 걸어.”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놈의 은신처에 비축되어 있던 식수와 식량을 최대한 챙겨서 그에게 짊어지게 했다. 아마 그것들의 무게를 합치면 수배범의 몸무게에 육박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비틀거릴 만도 하네.

어쨌든 걸어서 하루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카트카로 가는데 왜 그렇게 많은 식수와 식량을 챙겼냐 하면, 그냥 저놈을 괴롭히고 싶어서다.

어제 꿈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소소한 복수랄까.

“헉... 헉....”

─꽈당!

짊어진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수배범이 결국 바닥에 넘어졌다. 놈은 팔이 꽁꽁 묶여있었기에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흠. 어쩔 수 없나.”

하는 수 없이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강행군을 거듭하다가 이 녀석이 진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업고 가야 하는데, 그건 매우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넘어진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리고 건량을 꺼내 으적으적 씹으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버둥대고 있는 수배범을 구경했다.

“흐흐흐. 꼭 뒤집어진 바퀴벌레 같네.”

왜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대로 누워서 쉬면 될 텐데.

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곧 버둥거림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겨 물었다.

“근데, 네 육체 강화 마법 말이야.”

“......?”

“네가 그걸 사용할 때 몸에 빛이 나던데... 혹시 빛을 감출 수도 있나? 그럼 훨씬 위협적일 것 같은데.”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을 적에게 숨길 수 있다는 건 무척 유용하다.

이를테면 플레임 오브는 내 머리 위에 대놓고 불덩어리가 생성되어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콜링 썬더는 아무런 전조 없이 시전 되기 때문에 적들이 반응하기 어렵다.

육체 강화 마법도 빛을 감출 수만 있다면, 적들을 속이기 좋을 것이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걸 왜 묻는 거지? 나는 이제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할 운명. 더 이상 내 마법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나는 놈의 당당한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포로가... 말대꾸...?”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9회]

“까아악!!! 아, 알았다!”

녀석은 살충제를 맞은 벌레처럼 격렬하게 버둥대며 황급히 말했다.

“으... 감출 수 있다. 다만 억지로 빛을 감추면 마법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것이다.”

“위력이 감소한다는 건가? 어떻게 감추는데?”

“원래는 신체 내부와 외부가 같이 강화되지만, 내부에 집중한다면 빛은 감춰진다. 대신 위력이 감소하고, 통증도 평소에 가깝게 느껴지지.”

외부 강화가 사라지니, 맨손으로 단단한 걸 때리면 손도 아프다는 소리였다.

“흠. 그렇군.”

어쨌든 놈이 성실하게 대답해줬기에 보상으로 조금 더 쉬게 해준 뒤, 다시 카트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걷자, 카트카의 남쪽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비병 하나가 검문을 위해 나에게 다가왔다.

“정지! 귀하의 신분패와 이자의 노예 증서를 보이십시오.”

“아, 노예가 아니라 현상수배범입니다.”

수배범을 포박하고 목줄까지 달아놨으니 노예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현상수배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이름은 저도 모르겠고... 여기요.”

나는 모험가패와 수배범의 초상화를 내밀었다. 이 녀석은 도시 밖에서 활동하던 신원미상의 수배범이었기 때문에,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려진 초상화밖에 없었다.

경비병은 내게서 초상화를 받아 간 뒤, 어떤 서류를 뒤적거리며 대조했다. 아마 수배범 목록인 듯했다.

“현상금 5골드의 수배범. 확인했습니다. 이봐, 잭!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병사 두 명만 불러와.”

“예!”

그가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또 다른 경비병 하나가 잽싸게 성문 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금세 병사 두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제부터 수배범은 저희가 호송하겠습니다. 귀하께서도 현상금을 수령하셔야 하니 저희와 함께 백작성으로 가시지요.”

“아, 네.”

나는 병사를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번거롭군....’

도시 안에서 잡았을 땐 ‘오늘의 기억’에서 잡다한 일을 도맡아서 처리해줬었다. 현상금도 선결제해주고, 수배범도 알아서 백작성에 넘겨주고.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현상금을 수령하러 다녀야 한다. 백작성으로 가서 5골드를 받고, 모험가 길드에도 들러서 3골드를 받아야 한다.

꽤나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돈을 받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즐거웠다.

최근에는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남의 꿈속에서 마법을 얻으러 다녔지만, 이젠 돈이 좀 필요하다. 검도 사야 하고, 클로이가 말한 속성 쉴드를 살 돈도 마련해야 하니까.

“마차에 타시지요.”

성문 안쪽에는 마차가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병사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체스터 백작성으로 향했다.

오성과 한음

마차를 타고 얼마간 이동하니 곧 백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린 뒤, 잠시 성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도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한창 탈영병을 잡으러 다녔을 땐 줄기차게 들렀던 곳이다. 물론 성안으로 들어간 적은 별로 없고, 대부분 성문에서 탈영병을 넘겨주고 돈만 받고 떠났었다.

탈영병? 그러고 보니 요즘 탈영병이 잘 안 보였다. 원래는 케른헴의 북부와 카트카의 남부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었는데.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어차피 그들한테서는 뽑아먹을 마법도 없으니까.

마차에서 수배범을 끌어 내린 병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저도요? 알겠습니다.”

그냥 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경비병이 알아서 마나 속박 고리와 현상금을 가져다주는 쿨거래가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병사를 따라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가까이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병사들은 수배범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났다.

“흠.”

나는 소파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담한 크기의 방. 간이 응접실 같았다.

해리스 공작성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응접실은 성 초입에 있었다. 아마 나처럼 가벼운 일로 방문하는 사람들을 매번 성 깊숙이 들이기는 좀 그러니, 일부러 입구 근처에 배치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있으니, 곧 하녀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약간의 다과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들어와 내게 제공했다.

그것들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걸어 들어왔다.

─벌컥!

“오랜만이군.”

“아, 안녕하십니까. 에드윈 님.”

적발의 기사 에드윈이었다.

내게 현상금 사냥을 추천해준 남자.

고작 수배범 하나를 잡아 온 게 기사까지 나올 일인가 싶었지만, 어쨌든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부하에게 보고를 받던 중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하녀를 향해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하녀는 그 즉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오늘의 기억’을 통해서 몇 번 보고는 받았는데, 이렇게 자네가 직접 수배범과 함께 찾아온 건 처음이군.”

“예. 도시 밖에서 잡은 거라서.”

“그래, 내가 추천해준 일은 적성에 맞나? 지금까지 몇 명을 잡았더라?”

“세 명입니다.”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조금 기울어졌다.

“세 명밖에 안 됐었나? 두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생각보다 적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좀 적은 편이기는 했다. 청색 마탑에 머물렀던 시간과 왕복에 소요된 시간을 더하면 한 달 이상은 수배범을 잡지 않았었으니까.

“네. 한 달 정도 도튼에 머무느라....”

“도튼? 그랬군. 어쩐지 탈영병을 한 무더기로 잡아 오던 사람치고 세 명은 너무 적다 싶었지.”

─똑똑

노크와 함께 하녀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에드윈에게도 차를 한 잔 올렸다. 에드윈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탈영병을 잡아 오지 않는군.”

왜인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탈영병이 별로 안 보이던가?”

“오, 맞습니다. 제가 어제부터 수배범을 잡으러 백작령 남부를 돌아다녔는데 탈영병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얼마 전에 북부 원정이 끝났다. 그래서 이제 탈영하는 자들이 거의 없어졌지.”

“그렇군요.”

나는 더 이상 탈영병 따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에드윈은 소파에 푹 기대고 앉아서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체스터 백작님께서도 지역의 안정에만 집중하실 수 있게 됐지. 아, 이건 자네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겠군.”

“아하하, 그럴 리가요.”

웃으며 부정했지만, 사실 달갑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보면 지역의 불안정을 먹고 사는 존재에 가까웠다. 불안정할수록 수배범과 몬스터가 많아지고, 그럴수록 나에겐 호재였으니까.

체스터 백작이 영지의 치안 유지에 몰두한다면,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현상금 사냥꾼과 모험가들에게 외주를 맡기는 게 싸게 먹히긴 하겠지만, 병사들을 마냥 놀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결국은 서서히 일감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간만에 돈 좀 벌어볼까 했더니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그 꼴이다.

“뭐, 자네는 사람을 잡는 능력이 출중하니 크게 개의치 않을 수도 있겠군. 잘 싸우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수요가 있는 법이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부관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부관이 에드윈에게 마나 속박 고리와 작은 돈주머니를 건넸다.

“정 일거리가 없다면 나를 찾아와라. 내가 병사로 잘 써먹어 줄 테니. 자, 받아라.”

“감사합니다.”

에드윈은 부관에게 받은 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즉시 그것을 챙겨서 품에 넣었다.

“그런데... 혹시 클로이 양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요즘 그녀 이름으로 잡혀 들어오는 수배범이 없던데.”

“클로이 씨도 한동안 도튼에 있었거든요.”

내 말을 들은 에드윈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자네도 도튼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둘이 같이 여행이라도 다녀온 건가?”

“아, 그런 건 아니고요. 클로이 씨가 연구 때문에 청색 마탑에 간다고 하시길래 제가 따라간 거죠. 저도 마탑에 용무가 좀 있어서.”

“호오. 벌써 그녀와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군.”

“클로이 씨가 워낙 성격이 좋으시잖아요. 웬만한 일은 다 웃어넘기고.”

그녀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다. 그 정반대는 바텐더 테드고.

“다 웃어넘긴다라... 자네는 아직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나 보군.”

에드윈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을 이었다.

“절대 클로이 양을 화나게 만들어선 안 돼.”

“......?”

“그녀가 진심으로 분노한다면... 정말 무섭거든.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복수할거다. 그녀는 그런 성격에, 그럴 만한 능력도 있어.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

여느 때처럼 북적이는 카트카의 모험가 길드.

접수대로 다가가자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아, 현상금을 수령하러 왔습니다. 그 모험가를 때려죽이던 수배범에 걸려있던 거요.”

나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건 내가 수배범을 잡았다는 증명이 담긴 문서다. 백작성을 떠나기 전에 에드윈에게 작성을 부탁했는데, 무려 백작가의 인장으로 봉인까지 해줬다.

“헉! 그, 그게 사실입니까?”

직원은 헛숨을 들이키며 허겁지겁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야아아아!!!!!”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

“모험가 살해범이 잡혔다아아!!!!!”

그는 내 말을 자르고, 길드 내부를 향해 큰 소리로 수배범의 체포 소식을 알렸다. 어찌나 희열에 찬 목소리였는지, 무슨 광복 소식이라도 전하는 줄 알았다.

─뭐야? 그게 진짜야?

─정말 그놈이 잡혔소?

─그럼 이제 남부로 의뢰를 나가도 되는 거예요?

모험가들이 반신반의하며 술렁이자, 길드 직원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분께서 직접 잡으셨답니다! 백작가에서 발행한 증명서까지 있으니, 이제 안심하시고 남부로 의뢰를 나가셔도 됩니다!”

─저 사람이...?

─어? 저분 엘 님 아니야?

─엘? 트롤을 혼자서 처치했다던 A급?

─맞네! 나는 맥주도 얻어먹었었어.

이런 말을 스스로 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케른헴과 카트카의 모험가 길드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 된 모양이다. 이 두 곳에서는 웬만하면 나를 알아봤다.

물론 카트카의 모험가들은 현상수배범에 대한 정보원으로 쓰기 위해 내가 일전에 호감작을 해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엊그제 정보를 얻으러 들렀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 길드 직원이 한껏 어그로를 끌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 당신이 엘 씨였군요. 그 모험가 살해범 때문에 하마터면 제 월급이 줄어들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월급 때문에 그렇게 소리 지른 거였냐.

어쨌든 직원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금화를 세 닢 내밀었다.

“여기 현상금입니다. 저희 길드 소속 모험가 중에서도 그런 흉악한 수배범을 잡을 수 있는 분이 있다니... 정말 든든합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직원을 뒤로하고, 게시판으로 향했다.

체스터 백작이 치안 유지에 힘쓰기 시작했다고 했으니, 일감이 더 줄어들기 전에 괜찮은 의뢰가 있으면 해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게시판을 살펴봤다.

‘흠... 그다지 끌리는 게 없네.’

나는 최소 트롤 토벌 이상의 의뢰를 원했으나,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잡다한 의뢰 위주였고, 특히 수배범 때문에 기피되었던 백작령 남부지방에서 허접한 몬스터를 잡는 의뢰가 많았다.

‘차라리 용병 길드를 가볼까? 아니면 케른헴?’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잠시 고민해보니, 같은 카트카에 있는 용병 길드보다는 케른헴으로 가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다가 다친 도린 형제가 잘 치료받았는지 확인도 해볼 겸 해서 말이다.

***

카트카에서 케른헴으로 가는 마차 안.

─달그락달그락

나는 카트카를 떠나기 전, 마법 공방에 들러서 구입한 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크... 광택이 장난이 아니군.”

강화 마법이 걸려있는 롱소드.

가격은 무려 15골드로, 하급 마법서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도튼에서 획득한 기사의 검까지 팔아서 돈을 마련해 큰맘 먹고 구입했다.

그냥 평범한 롱소드에 단순히 강화 마법만 걸은 것이 아니라, 애당초 재질부터가 조금 달랐다. 검신에서 은은한 검은 빛이 감도는 걸 보아하니, 일반적인 철은 아닌 듯 보였다.

“게임은 역시 아이템 맞추는 재미가 쏠쏠하지.”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검을 구경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케른헴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삯을 지불한 뒤, 모험가 길드를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뭐지?’

불과 이틀 만에 재방문한 길드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모험가들이 하나같이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접수대에 있는 여직원도 늘 선보이던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는 그녀는, 화가 난 것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엘 씨....”

여직원은 나를 바라보고는 거의 울상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어요, 정말.”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쥐어뜯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케른헴 서남부에서 던전이 발견됐거든요.”

“네? 네?”

나는 두 번 놀랐다.

케른헴에서 또 던전이 발견됐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던전이 발견됐는데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에서 한 번.

“그건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일이죠. 좋은 일인데....”

“그런데요?”

“문제가 있어요. 던전에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오늘따라 여직원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세히 좀 말씀해보세요.”

“그게... 피어슨 남작의 병사들이 던전 입구를 무단점거해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 왜요?”

피어슨 남작이라면 나도 알고는 있다.

그의 영지는 케른헴의 서남부와 맞닿아있다.

“그쪽도 던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입구는 피어슨 남작령과의 경계면 근처에서 발견됐어요. 물론 근처일 뿐이지, 확실히 저희 쪽 땅이 맞아요. 경계는 말뚝으로 정확히 구분되어 있으니까요.”

“근데 왜 피어슨 남작이 소유권을 주장합니까?”

“......던전 안으로 내려갈수록 남작령과 가까워지거든요. 그러니까... 던전의 일부는 남작령에도 걸쳐있는 거예요.”

“아.”

과연. 골치가 아플 만한 문제였다.

이것은 오성과 한음 설화에 나오는 감나무 논쟁의 던전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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