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46화 (46/200)

데스웜 (4)

우리는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서, 완연한 밤이 되었을 때쯤 평탄한 대지에 다다랐다.

“따, 땅이 단단해....”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져서 피로함을 느끼게 만들던 사막과는 감촉부터가 달랐다. 나는 발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쾌감에 중독되어, 제자리에서 총총 뛰며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데?”

앞에는 도린 사막, 뒤에는 서부 사막.

우리에겐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아앗... 그렇게 물어보셔도....”

로지는 목을 한껏 움츠리며 소심하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흠. 너도 모른다 이거지?”

“네에... 저희의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겠어서... 죄송해요.”

그녀는 한층 더 움츠러들어서 목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아니야. 죄송할 것 까진 없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솔직히 어둠 속에서 사막을 지나쳐왔는데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무슨 수로 알겠는가. 어차피 사막을 벗어난 시점에서부터, 큰 위기 하나는 해결된 거나 다름없었다.

“일단은 동쪽으로... 그러니까, 서부 사막을 등지고 왼쪽으로 가는 게 좋겠네.”

도튼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부 사막’이다.

그렇다면 동쪽으로 갈수록 도튼과 가까워진다. 만약 마을을 찾지 못하더라도, 지리적 이점은 챙길 수 있다.

─화아악!

[금일 사용 가능한 ‘라이트’ - 6회]

새하얀 빛의 구슬이 생성되며 주위를 밝혔다.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자이언트 데스웜의 핵을 감싼 망토를 고쳐 메며 말했다.

“그럼 가보자.”

“네에~.”

우리는 고요한 밤길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쪽 방향에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군.’

나는 꼭 한번 그 마을에 들러보고 싶었다.

식량이나 기타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내 오랜 친구 도린 형제의 고향일 가능성도 높아서다.

그 녀석들은 걸핏하면 나에게 자신의 고향에 대한 얘기를 해줬는데, 대부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무슨 달빛을 머금은 라이칸스로프의 전설이 내려온다거나, 자신들이 마법사를 두들겨 팼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그 동안은 아무리 허풍 같아도 내가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잠자코 듣고만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녀석들의 마을에 한번 들러본다면 다음부터는 속지 않을 것이다.

‘흐흐흐... 그 동안 나를 잘도 놀려 먹었겠다? 이번에 너희 형제들의 거짓을 낱낱이 파헤쳐주도록 하지. 흐흐.’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중, 문득 옆에 있던 로지가 나를 불렀다.

“엘 님.”

“응? 왜?”

그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 무슨 음흉한 생각 하셨죠.”

“무, 뭐? 아닌데?”

“에이, 표정이 음흉하신데요? 혹시....”

“어허! 그냥 사막을 벗어나서 기분이 좋았을 뿐이다.”

나는 입가에 걸려있던 음흉한 웃음을 지우며 변명했다. 도린 형제에게 한방 먹일 생각에 신났던 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꺄하핫! 장난이에요.”

“너는 장난을 참 좋아하는... 음? 저건?”

라이트의 빛이 가까스로 닿을 정도의 거리.

그곳에 작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곧 그 건물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와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누구인가!”

체격이 좋은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 라이트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는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목에 걸려있던 호각을 집어 들고 있었다.

‘...호각? 파수꾼인가?’

언제든 호각을 불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마을 초입에서 경계를 서는 파수꾼 같아 보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는가!”

“아, 저는 모험가이고 이쪽은 청색 마탑의 제자들입니다.”

“청색 마탑...? 증명할 수 있는가?”

그가 여전히 검을 겨눈 채 경계하며 물었다. 나와 제자들은 신분패를 꺼내서 그에게 보여줬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한 그는 검을 거둬들였다.

“그렇군. 그런데 이 밤중에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지?”

“사막 횡단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사막에서 짐을 잃어버렸거든요. 아,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돈 주머니를 탁탁 치자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린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행자여!”

“...? 아, 예.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환대에 잠시 당황하며 인사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다들 자고 있으니, 일단은 우리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물품을 구하는 것이 좋겠군. 나를 따라오게!”

“오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원래 있었던 작은 건물은 내 예상대로 초소였다. 사막의 도적들이 마을을 자주 습격하기 때문에 설치해둔 것이라고 한다.

초소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마을이 나왔다. 대부분의 건물이 흙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중동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가 아담한 크기의 흙집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이 나의 집이라네! 어떤가?”

“이야, 마을에서 가장 멋진 집이군요.”

사실 다른 흙집과 똑같이 생겼다.

어쨌거나 그는 만족스런 얼굴로 우리를 집안에 들였다.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물과 빵 몇 덩이를 가져왔다.

“일단 이거라도 먹게. 내가 혼자 살아서 집에 먹을 것이 많지가 않군.”

“이 정도면 충분하죠. 고맙습니다.”

“나는 다시 초소로 가봐야 하니, 다들 편히 쉬고 있게. 날이 밝으면 내가 깨워주도록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쿨하게 나가버렸다.

“여행자에게 개방적인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그러게. 내일 물품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

청색 마탑의 이름값 때문인지, 내가 사례하겠다고 한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호의적이었다.

어쨌든 다들 몹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고 불침번 순서를 정한 뒤에 잠들었다.

***

다음날 아침.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집주인은 우리에게 손수 만든 스튜까지 제공해줬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막에서 짐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

그가 스튜를 우물거리며 내게 물었다.

“데스웜과 싸우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오오! 데스웜을 사냥하고 있었나? 우리 마을도 그놈 때문에 골치깨나 썩었지. 아주 훌륭한 일을 했군!”

“아하하....”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문득 깨닫는 바가 하나 있었다. 이 남자의 말투가 묘하게 도린 형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슬쩍 질문을 던져봤다.

“저 그런데... 혹시 도린 형제를 아십니까?”

“뭣! 도린 형제?”

식사 내내 웃고 있던 그가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도린 형제라고 했나?”

“예? 아, 예....”

내가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건가?

이 녀석들 설마 무슨 죄라도 저지르고 고향에서 도망친 건가?

“그렇게 말해서는 누군지 모르겠군!”

“......?”

“마을에 있는 모든 형제가 ‘도린 형제’이기 때문이지. 내 이름도 판도린이다!”

“아.”

맞다. 이들은 이름에 출신지인 ‘도린’이라는 글자를 집어넣는 풍습이 있었지. 내가 너무 멍청하게 질문했군.

“삼형제입니다. 맏이는 테도린이고요.”

“테도린? 크크크....”

그가 돌연 낮게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톤도린의 자식들을 말하는 거군.”

톤도린이 도린 형제의 아버지인가?

아니, 이름이 다 비슷해서 너무 헷갈리잖아.

“그놈들이 어릴 때 내가 아주 귀여워해줬었지. 크크크. 그땐 진짜로 귀여웠거든.”

변태처럼 웃길래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 싶었는데, 그냥 진짜로 귀여워해준 거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징그러워졌지만. 크크.”

“아, 걔들이 좀 징그럽긴 하죠. 흐흐.”

“이거 뭘 좀 아는 친구로군? 크크크.”

“그놈들 얼굴을 4년이나 봤거든요. 흐흐흐.”

집주인과 공감대가 형성돼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제자들이 너무 경악하며 나를 바라봐서 그만 웃기로 했다.

“흠흠. 그럼 그... 톤도린 씨? 그분은 어디에 사십니까? 그래도 친구의 고향에 왔으니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죽었다. 그 후로 녀석들이 돈을 벌기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거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지만, 나는 조금 당황했다. 도린 형제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군요... 병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타향살이를... 앞으로 만나면 잘해줘야겠네.”

“무슨 소리지? 병들긴 누가 병들었다는 것인가? 그녀는 우리 마을 최고의 전사다. 그녀의 곡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도적들을 도륙내기 위해 순찰을 나갔지.”

“.......”

“여동생은 마을 장터에서 일하고 있으니, 식량을 구하러 가는 김에 만나보면 되겠군. 지금 바로 가보는 것이 어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 알겠습니다.”

우리도 아침식사를 다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질질 끌 거 없이 바로 물품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집주인을 따라 장터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다 보니 마을 풍경이 훤하게 보였다. 돌아다니는 주민들은 과할 정도로 활기찼는데, 남녀 가릴 것 없이 대부분 허리에 검을 하나씩 차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도린 마을은 방벽이 없어서 도적떼의 습격에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격을 받으면 주민 모두가 병사로 돌변해 대응하는 것이다.

‘도린 형제는 엄청 험난한 곳에서 자랐군....’

어쨌든 마을 치고는 컸지만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머지않아 장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외지인인 것을 단번에 눈치 채고, 열렬한 호객 행위를 했다.

“이보게, 여행자! 이리 와서 전갈로 담근 술을 한잔 마셔보지 않겠나! 이걸 마시면 자네도 밤에 쓸 수 있는 독침을 갖게 된다네!”

“우리 가게의 빵은 돌을 씹는 것 같은 식감이 일품이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몇 개 구매하는 것이 어떤가! 호신용으로도 사용 가능하다네!”

“이 흙은 도린 사막에서 퍼왔다네! 기념품으로 딱이지!”

이 사람들이 누굴 등쳐먹으려고.

근데 이곳 출신은 다 이렇게 목소리가 큰가?

말투도 전부 도린 형제와 비슷했다.

어쨌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들도 좀 있었기에 천천히 구경하면서 지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다.

“준비는 다 했나? 그럼 이제 네도린을 만나러 가볼 텐가?”

“...네도린? 아 테도린의 여동생이요? 네네.”

이 사람들은 대체 이름을 어떻게 구분하나 싶다.

그는 우리를 장터에 있는 작은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 판도린 아저씨!”

“잘 지냈나! 네도린!”

도린 형제랑 똑같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풋풋하고 가냘픈 소녀였고, 말투도 정상적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야간근무를 서셨잖아요?”

“너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 네 오빠의 친구라는군.”

“오빠의 친구...?”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네도린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도린 형제와 케른헴에서 함께 일하던 엘이라고 합니다.”

아직 소녀였기에 반말로 인사할까 싶었지만, 초면이니 그냥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케른헴...? 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부릅뜨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억울한 마법사!!”

“???”

“당신이 억울한 마법사였군요! 작년에 오빠들한테 받은 편지에 적혀있었어요. 자신이 마법사라고 주장하는 웃긴 친구가 있다고.”

이 새끼들... 나를 그렇게 소개한 거냐.

“아, 그,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진짜 마법사야. 근데 편지를 자주 안하나봐? 작년에 받았다니.”

“케른헴은 너무 멀어서 오래 걸리거든요. 비용도 비싸고... 오빠들은 잘 지내나요?”

이런 곳에 전문적인 집배원은 없다.

어디 상단이나 근처로 향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겸사겸사 부탁하는 방식이다.

“잘 지내지. 편지 쓸래? 내가 나중에 전해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억울한 마법사님!”

내가 종이와 펜을 구해오자, 그녀는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며, 편지 마지막에 문장 하나를 추가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녀가 흔쾌히 수락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억울한 마법사님이 나를 실컷 귀여워해주셨어.]

나는 그녀와 한동안 담소를 나누다가, 편지와 데스웜의 핵을 챙겨들고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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