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 마탑 (4)
[꿈속에서 마법 ‘프로스트 오브’에 맞아 사망하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훔치시겠습니까?]
‘휴우... 하마터면 실패할 뻔했네.’
니콜스가 나를 보호하려 드는 바람에, 여차하면 죽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도 그런 성격인가? 파이톤이 창조해낸 가상의 인물이었지만,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으니 비슷한 성격일 것이다. 어쨌든 도우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내게는 방해다.
‘습득한다.’
당연히 파이톤은 적이 아니므로 습득을 선택했다.
[마법 ‘프로스트 오브’를 습득했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프로스트 오브’ - 2회]
[동일한 대상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2회라... 횟수에는 차이가 없는 건가?’
플레임 오브는 훔쳤고, 프로스트 오브는 습득했다. 둘 다 사용가능 횟수는 2회. 원래 플레임 오브는 1회였었는데, 승격하면서 하나 늘어났다.
위력에 차이가 좀 있으려나?
내 생각에 훔치기의 가장 큰 강점은, 상대방이 마법을 잃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적대적이지만 신분이 높거나 모종의 이유에 의해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력 마법을 삭제해서 약화시킬 수 있다.
아직까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습득’을 선택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훔치기’를 전략적으로 사용해야할 때가 찾아올 것이다.
“엘 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까 자러 간다던 하급 제자 중 하나였다.
“왜 복도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아, 방보다 여기가 더 시원해서 잠깐 앉아 있다가 깜빡 졸았네. 내가 더위에 좀 약하거든.”
“아아~ 동북부 출신이시랬지 참. 그래도 여기서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같이 숙소로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내가 이래봬도 모험가잖냐. 길바닥에서 자는 일도 빈번해서 이 정도는 끄떡없어.”
“알죠~. 아까 해주신 트롤 토벌 이야기 너무 재미있게 들었거든요. 내일도 다른 재밌는 이야기 해주실 거죠?”
“음... 그래. 내일은 고대의 던전을 탐사했던 일에 대해 말해줄게.”
“고대의 던전이요? 와아, 너무 기대된다!”
하급 제자들은 거의 마탑에 상주하며 마법을 배우기 때문에, 이런 모험가 경험담을 들려주면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역시 좋은 곳이란 말이지.’
좋은 마법도 얻었고, 사람들도 좋고.
클로이를 따라오길 참 잘했다.
일주일 뒤에는 어떤 마법을, 어떻게 얻을까?
머리아프지만 즐거운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
─똑똑
“들어오너라.”
허락이 떨어지자, 하늘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스승의 테이블로 다가가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끼익 빼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계세요? 스승님.”
클로이는 의자에 앉으며, 어떤 문서를 열심히 살피고 있는 니콜스에게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해리스 공작가에서 보낸 협조 요청서란다.”
“협조 요청서요?”
그녀는 몸을 반쯤 일으켜서 니콜스가 보고 있던 문서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데스웜?”
“교역로까지 습격하는 일이 늘어났다는구나. 마탑에서도 한 손 거들어달라는 게지.”
“그래서 도와주실 거예요?”
청색 마탑은 해리스 공작령에 속해있지만, 명령을 받는 입장은 아니다.
공작령은 위치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청색 마탑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도시라도 청색 마탑이 들어온다고 하면,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기꺼이 지불해가며 환영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작가는 마탑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하면 ‘명령’이 아닌 ‘요청’을 할뿐. 마탑은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할 수 있다.
“음... 아무래도 돕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럼 제가 가서 처리할게요.”
당돌하게 말하는 클로이를 보고 니콜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껄껄. 마음은 고맙지만 너는 네 연구에나 집중하도록 해라. 제자들을 보낼 생각이란다.”
“네에? 제자를요?”
엘과 제자들의 대련. 그것을 보고 니콜스는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느꼈다.
바로 실전 경험이다.
과거와 달리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기다 보니, 지금 마탑의 제자들은 이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벌이는 대련에서도 체스를 두는 것처럼 한 수씩 주고받을 뿐이니, 실제 전투와는 괴리가 컸다.
때로는 교활하게 기습할 줄도 알아야 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할 줄도 알아야 하며, 상대를 죽일 각오로 싸워봐야 진정한 실력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틀 전의 대련 말이다... 너도 사실은 파이톤이 졌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네. 모든 면에서 밀렸죠. 실력도, 경험도.”
“그것을 보니, 내가 제자들을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구나.”
전쟁을 통해 성장해온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그렇다고 제자들을 사람과 싸우라고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몬스터와의 전투 경험이라도 쌓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실습을 보내겠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단다. 중급 제자 한 명과, 하급 제자 서너 명씩 묶어서 내보내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 정도면 일반 데스웜은 상대할 수 있겠네요. 찾아다니다가 만나는 다른 몬스터를 처치하기에도 충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던 클로이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엘에게도 부탁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엘한테?”
“네! 엘은 모험가잖아요? 그에게 팀 하나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전투경험 말고도 배우는 게 많을 거예요.”
“호오. 일리가 있군.”
A급 모험가이며, 메두사를 처치한 경력도 있다. 몬스터와 관련해서는 외부 강사로써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하급 제자 셋을 데리고 데스웜을 처치해달라는 제안. 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단다.
‘뭐, 나야 좋지.’
안 그래도 능력의 쿨타임 동안 데스웜을 잡아볼까 했던 참이었으니까. 하급 제자 정도면 마법 실력만큼은 어지간한 B급 모험가 마법사보다 나은 수준이다.
게다가 내 팀이 데스웜을 처치하고 나온 핵은, 보상으로 내가 가지라고 한다. 마탑의 너그러움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데스웜의 핵 10개를 모아오면 해리스 공작가에서 중급 마법서를 보상으로 준다고 했지.’
전격 계열의 중급 마법서 [콜링 썬더]
나는 놀랍게도, 전격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전격계열의 중급 마법은 아직 쓸 줄 모른다. 이번 기회에 이 기형적인 체질을 개선해보도록 하자.
일단 마탑 1층에 있는 강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모여 있는 제자들로 시끌시끌했다.
“얘들아, 그거 들었어? 이번 실습이 평가에도 반영된대!”
“정말? 나 몬스터는 자신 없는데....”
“파이톤 선배님과 같은 팀이 되면 좋겠다아.”
“나도! 나도!”
나는 떠들고 있는 하급 제자들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지시를 받기위해 중급 제자 몇 명이 모여서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 아는 얼굴이 하나 있었기에, 나는 반갑게 부르며 인사했다.
“파이톤 씨! 안녕하십니까!”
“에, 엘 씨?! 아, 안녕하세요....”
“......?”
대련할 때 보여줬던 냉철하고 당당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뭐지? 꿈을 기억하는 건가?’
불과 몇 시간 전에 꿈을 꿨으니 기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련에서 패배한 건 나였다. 수배범이나 탈영병처럼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당당하단 말이다.
“저도 이번 실습에서 팀을 하나 맡기로 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 그러시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며 악수를 청하자, 은근슬쩍 한 발짝 물러나며 악수를 받았다.
‘...내 주먹이 그렇게 매서웠나?’
그때, 뒤에서 니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모였느냐.”
“예, 스승님.”
중급 제자들이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번 실습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이번 실습은 마탑에서 책만 읽는 너희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실시하는 것이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물론이고, 척박한 환경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 같았다.
좋은 얘기지만 졸리다는 뜻이다.
“......평가에 비중 있게 반영할 것이며, 데스웜의 핵을 최소 한 개 이상 가져올 때까지는 복귀를 금지한다.”
─웅성웅성
장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데스웜을 잡을 때까지는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제한을 걸어두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뺑끼’를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성적이 걸렸으니 많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나와 함께 가는 제자들이 더 열심히 임할 테니까.
“엘, 잠깐 나 좀 보겠나.”
“아, 예.”
니콜스가 조용히 나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가 중급 제자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네. 심지어 모험가이기도 하니 자네가 있는 팀은 비교적 수월하게 데스웜을 처치하겠지.”
“.......”
역시 니콜스도 내가 파이톤에게 져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자네의 팀원들은 데스웜과의 전투 경험을 적게 얻게 될 터이니, 대신 다른 경험들을 많이 시켜주게나.”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게다가 나는 데스웜을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를 잡을 생각이다. 나 혼자서는 어려운 일. 분명 하급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곧, 팀 편성이 시작됐다.
“하급 제자 에반스, 베인, 에린! 이 팀은 중급 제자 파이톤이 인솔한다!”
“좋았어! 파이톤 선배님과 팀이다!”
“부, 부럽다....”
다들 풋풋하구만.
그렇게 몇 개의 팀이 더 편성되고, 내 팀도 정해졌다.
“하급 제자 로사, 로지, 핀! 이 팀은 모험가 엘이 인솔한다!”
그러자 두 명의 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와아, 엘 님! 저희 같은 팀이네요?”
“다행이다!”
“아, 너희들이었냐.”
어젯밤 휴게실에서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던 제자들이다. 내 모험가 경험담을 듣기 좋아하는.
그리고 핀이라는 남자도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다들 실력은 괜찮아 보였다.
팀 편성이 완전히 끝나고, 다들 강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일행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탑을 벗어나니 뜨거운 햇볕이 우릴 맞이했다.
“잘 부탁드려요, 엘 님! 노련한 모험가와 팀이 됐다고 다들 부러워하는 거 있죠?”
“맞아~. 배울 점이 많을 거라고 그러더라.”
“이끌어주시는 대로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세 명의 팀원들이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라서 말했다. 그들의 부담어린 시선을 받으며,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했다.
‘흐음... 사막과 교역로에 출몰한다고 했지.’
데스웜은 지렁이처럼 생긴 환형동물인데,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몸집이 매우 거대하다고 한다. 내가 활동하던 지방에는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데스웜에 대해 아는 거 있는 사람?”
“으음. 사막에 산다는 거? 아, 그리고 땅속으로 기어 다닌다고 책에 적혀있었어요.”
이 도시에 오래 살았으니 뭐라도 좀 알까 싶어서 물어봤는데, 이들도 특별히 아는 건 없어보였다.
“그럼 어디로 갈까요? 역시 서부 사막부터 가보실 건가요? 아니면 교역로?”
“보채지마라, 로지.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맞아~. 엘 님은 이런 쪽에 전문가시라구.”
팀원들이 그렇게 로지를 타박했지만, 사실 나도 모른다. 그래도 이럴 땐 방법이 있지.
“일단 모험가 길드로 가자.”
가서 현지의 모험가들과 맥주를 마셔야겠다.
그게 정보를 얻기엔 최고의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