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수배범 (4)
[꿈속에서 마법 ‘랜드 라이즈’에 맞아 사망하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훔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습득해야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부랑자를 잡아다가 키메라를 만드는 위험한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냥 습득을 선택했다.
그 정체불명의 여자가 신경 쓰여서다.
그녀가 꿈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수배범의 꿈에 다시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내 능력이 들통 날수도 있다. 아직 추정 단계이긴 하지만, 나도 그녀가 욕망을 훔친다는 사실을 유추해내지 않았는가?
아군인지 적군이지 모를 상대에게 내 능력을 들키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마법 ‘랜드 라이즈’를 습득했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랜드 라이즈’ - 4회]
[동일한 대상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4회? 꽤 괜찮은데?’
내가 처음으로 얻은 땅 속성의 마법이다.
위력을 보면 아마도 하급 마법일 것이다.
땅 속성에는 유틸리티 계열이 많다고 들었다. 이를테면 육체의 힘을 강화하거나, 특정 범위의 중력을 강화시켜 상대를 무력화 시키거나 하는 식이다.
아무튼 4회나 사용이 가능하다면, 공격 외에도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밖에서 야영할 때 토벽을 세운다든지, 높은 곳에 올라갈 때 땅을 일으켜서 디딤돌로 쓴다든지.
활용방안에 대해 궁리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달성해 승격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하급 마법을 추가로 두 개 이상 배우거나, 에픽 등급의 몬스터를 한 마리 이상 처치하십시오.]
드디어 퀘스트가 발생했다.
‘......승격 퀘스트? 아니, 근데 뭐 이렇게 정보가 부실해?’
내가 무슨 조건을 달성했는지, 승격하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 에픽 등급의 몬스터가 뭔지에 관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았다.
뭐, 시스템이 불친절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흐음. 생각을 해보자....’
내가 ‘랜드 라이즈’를 얻고 나서 메시지가 떴으니, 조건을 달성했다 함은 아마도 하급 마법을 일정 개수 이상 배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승격은 마법서로 배울 수 있는 마법의 등급 제한이 완화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마법서로는 하급 마법밖에 배우지 못하지만, 승격하면 중급 마법도 배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능력치가 오른다든가.
다만, 에픽 등급의 몬스터가 뭔지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몬스터에 등급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몬스터 말고, 하급 마법을 두 개 배워서 승격 퀘스트를 진행하면 될 것 같다.
‘슬슬 마법서를 구매할 때도 되긴 했지.’
카트카에 와서 번 돈이 제법 쌓인 상태였다. 트롤의 사체나 의뢰비, 현상금 등 이번 일까지 마무리하면 수중에 10골드 가량은 모인다.
게다가 케른헴 모험가 길드에 맡겨둔 돈도 있었다. 그것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카트카를 한번 돌아봐야겠다.
“왁! 아이씨, 깜짝이야.”
침대에 묶여있던 수배범이 어느새 잠에서 깬 모양인지,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튼 간에 소름끼치는 녀석이다.
“인기척도 없이 왜 그렇게 조용히 노려보고 있어? 찝찝하게.”
“.......”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꿈속에서 이 녀석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체험해봤기에, 뭔가 또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괴인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아 괜히 찝찝했다.
어쨌든 해가 뜨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깨어난 김에 대화나 시도해봐야겠다.
“표정이 영 안 좋은데... 뭐 악몽이라도 꿨나?”
그냥 해본 소리다. 이 녀석의 표정은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무표정이었다.
“그들은 꿈에서조차 응답하지 않았다.”
“......무슨 꿈이었는데?”
“그들은 꿈에서조차 응답하지 않았다. 불변의 진리는 빛나면서도 머리가 아프다. 오래전부터 속삭였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보다 위험한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는 늘 그래왔듯이 횡설수설할 뿐, 정체불명의 여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꿈에 어떤 여자가 나오지는 않았나?”
나는 조금 직접적으로 질문해봤다.
원래는 상대에게 꿈에서 본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 좋지만, 이 녀석은 정신이상자다. 늘상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녀석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욕망을 탐했다.”
“그녀가 누군데?”
“그녀는 내 욕망을 탐했다.”
“그래서 그녀가 누구─”
“그녀는 내 욕망을 탐했다. 그녀는 내 욕망을 탐했다. 그년은!!! 내 욕망을 탐했다!!!!!”
그가 갑자기 발작하듯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신이상자가 같은 말을 반복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어쩔 수 없지.
─파지직!
“그년은 내 욕망을─”
내가 전기 충격을 가하자, 그는 다시 스르르 기절했다.
“......이 녀석한테 더 정보를 얻기는 불가능하겠군.”
***
─삐그덕
“엘! 오랜만이네?”
‘오늘의 기억’에 들어서자마자, 간만에 보는 클로이가 나를 반겼다.
“아, 예. 안녕하세요.”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수배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클로이가 망토에 감겨있는 수배범을 가리키며 물었다.
“말 편하게 하라니까. 근데... 이건 타겟? 왜 그렇게 들고 왔어? 죽인 거야?”
“기절시킨 겁니다. 발목이 잘려서 걷질 못하거든요.”
“와아. 터프하네.”
“살려서 데려오셨나? 잘했군.”
바에 있던 테드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망토를 헤집어 수배범의 얼굴을 확인했다.
“맞군. 타겟이 부랑자를 데려다가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나?”
“네. 키메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마 실패한 것 같긴 한데, 사람과 몬스터를 섞어서 만든 키메라가 있더군요.”
“...그렇겠지. 키메라는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 실험실은 어디였지?”
“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북쪽 주거구역에 있는 ‘장미의 가시’라는 여관에서 쭉 들어가다 보면.......”
나는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며, 어설픈 약도까지 그려줬다.
“......해서 이층짜리 건물의 지하입니다. 설명이 너무 부실한가? 아예 안내해드릴까요?”
“이 정도면 충분해. 자네는 이미 맡은 일을 끝냈으니까. 나머지는 백작가에서 해결할 일이지.”
하긴, 나는 그들이 잡아달라는 사람을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죄목을 밝히거나 상세한 증거를 수집하는 건 그들의 몫이다.
조사관도 고생깨나 하겠지 싶었다. 이 정신이상자와 대화하는 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난번처럼 술집 안쪽에 있던 사내 두 명이 튀어나와서 수배범을 데리고 나갔다.
“자네는 일처리가 빠르군. 이번에도 나흘 만에 잡아오다니. 다음부터는 좀 더 어려운 걸로 맡겨도 되겠어.”
“오, 그래주신다면 더욱 노력해보겠습니다.”
물론 마법사가 아니면 거절할거지만.
아니, 너무 마법사만 잡아대면 이상하게 보이려나? 가끔은 비마법사도 잡는 게 좋겠다.
나는 언젠가 국왕을 노려야하는 운명.
검사와의 전투경험을 쌓는 것도 필요하겠지.
“이번에도 며칠 쉴 생각인가?”
테드가 금화 세 닢을 건네며 물었다.
“예. 간만에 케른헴이나 다녀오려고요.”
마법서를 구매하기 위한 돈을 찾으러 갈 생각이다.
“아, 그래. 케른헴 출신이랬지. 급한 게 아니라면 한잔 하고 가는 게 어떠신가.”
“그러죠.”
안 그래도 클로이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나와 클로이가 바에 앉자, 테드가 술을 한잔씩 따라줬다.
“클로이 씨도 좀 바쁘셨나보죠?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 안계시던데.”
“아, 응. 내가 전에 말했던 타겟 기억나? 기사 출신의 노예 밀매범. 그걸 잡는데 열흘이나 걸렸지 뭐야.”
내가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 클로이가 같이 잡으러 가자고 제안했었던 수배범이다.
“열흘? 와, 집념이 대단하시네요.”
“한번 잡았다가 놓쳐서 열 받았었거든. 생포하려고 그냥 얼리기만 했는데, 깨고 도망쳐버리더라구. 그래서 다시 잡았을 땐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어.”
“이, 이야. 고생하셨네요.”
‘확실히 강하긴 하구나....’
클로이가 수준 높은 마법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기사와 싸워 이길 정도인지는 몰랐다. 말하는 투로 보면, 그다지 힘들여 죽인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잘됐다. 강할수록 배울 점이 많을 테니.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 그런데 카트카에서 마법서를 구매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케른헴에서는 마법 공방에서 팔았거든요. 여기도 그렇습니까?”
“응. 하급 마법까지는 공방에서 팔아. 중급부터는 팔지 않지만.”
“오오. 그렇군요.”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일단 승격 퀘스트를 위해 하급 마법이 두 개 필요한 상태니까.
나는 그녀와 마법에 관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에, 케른헴으로 떠났다.
***
케른헴의 북쪽 성문 앞.
“아아, 반가운 나의 고향.”
장기간을 카트카에서 지내다가 돌아오니, 이 버려진 도시가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의미 없이 성문을 지키고 있는 자경단원마저 반갑게 느껴졌기에, 나는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
뭐, 딱히 대답해주길 기대한 건 아니다.
나는 바로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보니, 곧 길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장식용인가?”
길드 건물 앞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석상이 몇 개 세워져있었다.
“와... 진짜 잘 만들었네. 이게 예술이지.”
가까이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험가를 모티브로 만든 석상 같았는데, 재질만 돌일 뿐, 완전히 사람처럼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애매한 오후라서 그런지 내부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게시판을 보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말했다.
“왜 인사를 하지 않았지?”
“우와악! 아,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도린 형제가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아아, 그래. 안녕하다.”
“어...? 이익...! 억울한 마법사 이 자식이!”
“순간 이곳이 던전인줄 알았잖나!”
“그,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나는 당황하고 있는 그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진정시켰다.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잘들 지냈냐? 근데 왜 그렇게 게시판을 보고 있었어? 이런 시간에는 어중간한 의뢰밖에 없잖아.”
“레이드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드??”
“그렇다. 크흐흐. 유례없는 대규모의 레이드지.”
나는 멍청하게 웃고 있는 테도린을 비집고 들어가 게시판을 확인했다.
[메두사 레이드 공지]
최근 케른헴 동쪽에 출현한 메두사에 의한 피해가 확산됨에 따라, 본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가 함께 대규모 레이드를 감행할 예정이오니,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께서는 누구든지.......
“......뭐? 메두사??”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이지? 길드 앞에 있는 석상을 보지 못한 것인가?”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서있으니, 오히려 테도린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석상...? 설마... 그게 진짜 모험가였어?”
“그렇다. 메두사의 눈을 바라보고 석화된 것이다.”
어쩐지 너무 완성도 높은 석상이다 싶더니만.
“그럼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 석화를 풀 방법이 있나?”
“시간이 오래 지나서 풀 수 없다고 하더군. 게다가 전신이 석화됐으니, 호흡을 하지 못해서 이미 죽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구나... 아니, 근데 너는 그런 끔찍한 소리를 왜 이렇게 담담하게 해?”
“크흐흐. 몬스터와 싸우다보면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못 보던 사이에 나약해졌군. 과거에 우리 형제에게 받았던 가르침은 그새 잊어버렸나?”
방금 전에 내가 구울 흉내를 냈을 땐 거의 기절할 뻔 했으면서 말은 잘도 하는군.
그나저나 메두사라....
메두사가 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인간형 괴물.
다만 게임 속에서는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
“메두사는 어떤 몬스터야? 강한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군!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가 함께 레이드를 간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강하다!”
“그래...?”
각성 퀘스트는 완료까지 4년이 걸렸지만,
승격 퀘스트는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