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 쌓기 (3)
“못 참으면 어쩔 건데? 겁쟁아.”
“이익...!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거구의 용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스태틱 쇼크를 캐스팅했다.
파지직!
“─없지만, 어, 어깨의 상처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쩔 수 없겠군? 이, 이번에는 참도록 하지.”
그는 내 손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자, 황급히 시선을 회피하며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완전히 엄살을 피우는 건 아닌 듯했다. 왼쪽 견갑이 꽤나 볼썽사납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래? 뭐, 알겠어. 어쨌든...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내가 왜 네놈한테... 아, 아니 다, 당신한테 인사를 해야 하지?”
스태틱 쇼크가 캐스팅 된 손을 가까이 들이밀자, 그가 급격히 호칭을 변경했다.
“내가 트롤을 처치해줬잖아. 네 목숨을 구해준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아, 그,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 뭐, 고, 고맙다.”
“모험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모험가를 무시한 것도 사과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톰을 비롯한 일행들을 불러왔다. 거구의 용병은 똥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기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내, 내가 모험가를 조금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미, 미안하게 됐군.”
녀석은 더 이상 코를 킁킁거리지 않았다.
마침내 오랜 지병이 완치된 것이다.
“사과도 했으니, 나는 이,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
“그래. 가기 전에 악수나 한번 하자고.”
나는 씨익 웃으며, 그의 다친 손을 붙잡고 격렬하게 흔들었다.
“목숨도 구해주고 코도 치료해줬으니까, 앞으로 나를 보면 꼭 인사하고. 알았지?”
“으아아악!! 아, 알았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예절 주입이 완료됐다.
내가 손을 놓아주자, 그는 어깨를 부여잡고 터덜터덜 걸으며 자리를 떠났다.
“저 덩치 녀석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군!”
“그런데... 저 용병이 해코지하진 않을까요?”
톰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여성 마법사는 조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괜한 걱정이라네, 레아 양. 엘이 저 용병에게 나쁜 짓이라도 하던가? 오히려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나. 해코지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동료들에게나 하겠지.”
“그건 그렇네요!”
레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나는 트롤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몸에 붙었던 불은 꺼졌지만,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도 돈이 되려나...?”
트롤의 강력함에 대해서나 들어봤지, 부산물에 관한 정보는 잘 알지 못했다. 보통 몬스터의 부산물이라 하면 가죽이 대표적인데, 이건 이미 가죽이 손상돼서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트롤의 사체 앞에 서서 고민하고 있으니, 톰이 다가와 나의 의문을 해결해줬다.
“당연히 돈이 된다네. 트롤의 피는 대단히 가치가 높거든.”
“오, 그렇습니까? 마시면 회복 효과라도 있나보죠?”
내가 그렇게 물으니, 톰이 껄껄 웃었다.
“껄껄, 그렇지는 않다네. 치료 사제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상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잖나? 트롤의 피도 마찬가지라네.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포션이 되지.”
톰의 말을 들어보니, 트롤의 피는 회복 포션의 원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연금술사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그렇군요.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피를 뽑아볼...... 수가 없네??”
그랬다. 피를 담을만한 도구가 없었다.
우리는 트롤 사냥을 상정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과 도끼를 담을 자루만 챙겨왔지,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저장용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젠장.”
나는 일단 근처에 있는 불에 칼을 달궈서, 트롤의 절단된 목 부분을 지져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막았다.
“흠. 아예 사체를 카트카로 끌고 가는 게 어떻겠나? 우리가 도와주겠네.”
톰이 그렇게 제안했다.
확실히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긴 했다.
카트카로 돌아가서 피를 담을 도구를 챙겨 오고, 피를 뽑은 뒤 또다시 카트카로 가려면 한 세월이다. 마차를 탄다고 해도 동선 낭비가 너무 심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짐이 많은 상태라서 굉장히 고된 작업이 될 텐데요.”
트롤은 우리가 맡은 의뢰의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나 혼자 처치하기까지 했으니, 트롤로 인한 수입은 온전히 내 몫이다.
물론 운반을 도와준다면 사례비를 넉넉히 지급할 생각이지만, 이들이 나를 반드시 도와야하는 의무는 없다.
“자네 덕을 본 게 얼마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어떻게 생각하시나들?”
“물론 도와야죠!”
“도착하면 술이나 한잔 사주십쇼!”
다른 모험가들이 흔쾌히 수락했다.
“고맙습니다. 돌아가서 꼭 사례하겠습니다.”
트롤의 사체는 직접 들고 가기에는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나무줄기를 엮어서 질질 끌고 가기로 했다.
우리는 약간의 준비를 거친 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카트카를 향해 출발했다.
***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비추는 밤.
밤공기를 가르고 거친 숨소리가 울려퍼진다.
“헉... 허억....”
“헥, 헥.”
“거의... 거의 다 왔네. 조금만 더 힘들 내시게!”
톰의 말대로, 저 멀리에 카트카를 감싸고 있는 붉은 결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니 다들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그렇게 힘을 내서 가다보니, 곧 성문에 도착했다.
“정지! 신분패를 보이십시... 헉! 뒤, 뒤에 끌고 오는 그건 뭡니까?”
검문을 위해 다가오던 경비병이 트롤의 사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허억. 헉. 우리는 카트카의 모험가들이라오. 뒤에 있는 저건 트롤이지. 자, 여기. 모험가패요.”
톰을 필두로 해서 우리는 각자의 모험가패를 내밀었다. 다섯 명 모두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트, 트롤?! 트롤을 잡아오다니 대단하시군요. 신분 확인은 끝났습니다. 통과!!”
경비병이 모험가패와 트롤의 사체를 확인한 뒤 큰 소리로 통과를 외치자, 다른 경비병이 성문을 열어줬다.
우리는 성문을 지나쳐 곧바로 모험가 길드를 향해 이동했다. 돌아다니는 마차라도 있으면 좀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없었다.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 모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드디어....”
─털썩
─풀썩
우리는 길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전부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진짜로 트롤과 싸우는 것보다,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게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그렇게 누워서 잠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엥...? 다들 여기 누워서 뭐하는.......”
길드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인지, 어떤 모험가 하나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이, 이건? 트롤? 트롤을 잡아왔어? 여기 트롤을 잡아왔다!!!”
고요한 밤하늘에 그의 외침이 퍼져나갔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길드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트롤을 잡아왔어?”
“그것도 고작 다섯 명이서?”
“오오, 나 트롤 실물로는 처음 봐. 되게 못생겼네.”
“너처럼?”
그들은 저마다 마시고 있던 술잔을 들고 나와서 우리를 빙 둘러싸고는, 트롤의 사체를 구경했다.
원래 이런 늦은 시간에 길드에 있는 모험가들은, 의뢰를 마치고 한잔 하느라 남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잠시, 잠시만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인파를 헤치고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우리 파티에서 가장 연장자인 톰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금술사 고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페버툰 산으로 떠났다는 트롤 토벌대 맞으시죠? 온종일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헤헤. 혹시 트롤의 피를 저에게 판매하실 의향이─”
트롤 토벌대? 아.
[페버툰 산에 출몰한 트롤 토벌대 모집합니다! 불 속성 마법사 우대!]
아침에 이렇게 외치던 사람이 있었지.
아무튼, 트롤을 잡으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연금술사가 미리 길드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트롤의 피가 귀하긴 귀한가보군.
“우린 그 트롤 토벌대가 아니라오. 미노타우로스 토벌대지.”
“예...?”
톰이 그렇게 밝히자 연금술사가 잠시 당황했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어쨌든 여러분께서 트롤을 잡아오셨잖습니까? 트롤의 피를 저에게 판매하시는 게 어떠신지....”
“우리가 잡은 것도 아니라오. 이 친구, 엘이 혼자서 잡았지. 트롤의 사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엘에게 문의하시오.”
톰이 누워있는 나를 가리켰다.
“......뭐?”
“트롤을 저 사람 혼자서 잡았다고?”
“엘? 처음 듣는 이름인데...?”
구경꾼의 웅성거림이 한층 심해졌다.
나를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기에,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야, 이거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그럼, 엘님. 트롤의 피를 저에게 팔아주시겠습니까? 2골드를─”
연금술사가 나에게 거래를 제안할 때였다.
“2.5골드! 나는 50실버를 더 드리리다!”
“이거 연금술사가 아니라 사기술사군? 저는 3골드에 구매하겠습니다. 피를 뽑는 작업까지 저희가 다 해드리지요.”
“뭣? 그렇다면 나는─”
갑자기 다른 연금술사 몇 명이 더 튀어나와서 치열한 입찰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
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어쨌든, 자기들끼리 한동안 경쟁한 끝에 최종 입찰자가 나왔다.
“트롤의 사체를 통째로 4골드에 사겠소.”
“예. 그러시죠.”
여러 명의 입찰경쟁을 통해 나온 금액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옆에서 톰도 이정도면 굉장히 잘 받는 거라고 넌지시 조언해줬다.
입찰자는 즉시 금화 네 닢을 내게 건넸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돈을 받은 뒤, 누워있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다들 이제 들어가시죠. 의뢰 완료 보고를 마치고, 제가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좋지!”
“잔뜩 마실 거예요!”
“저는 술고래입니다. 긴장하십쇼. 엘님. 하하.”
일행들이 벌떡 일어나서 환호했다.
***
“슬슬 ‘오늘의 기억’으로 가볼까.”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능력의 쿨타임이 끝났다. 이제 모험가 일은 잠시 접어두고, 마법사를 잡으러 갈 시간이다.
나는 일층으로 내려가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여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 얼마간 걷다보니 모험가 길드가 보였다. 그동안 원활한 의뢰수행을 위해, 일부러 길드와 가까운 여관에서 묵었기 때문이다.
길드 앞을 지나가니, 어떤 모험가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 엘 씨!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십니까.”
저 사람이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인사 하길래 받아준 것뿐이다.
불과 일주일새에 나를 알아보는 모험가들이 좀 생겼다. 다양한 사람들과 의뢰를 수행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혼자서 트롤을 잡았다는 소문이 도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때 맥주 잘 마셨습니다. 다음번에는 제가 엘 씨께 한잔 사드릴게요!”
“아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 그때 길드에 있었던 사람인가보군.
트롤을 잡은 날 큰돈을 벌은 김에, 내 이름도 알릴 겸해서 길드에 있던 사람들 전부에게 술을 한잔씩 돌렸었다.
술이라고 해봐야 한잔에 4쿠퍼밖에 안하는 싸구려 맥주였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오늘의 기억’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마차를 탈걸 그랬나? 라는 후회가 들 때쯤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삐그덕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술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 테드가 이쪽을 바라봤다. 오늘은 클로이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만인가? 꽤나 오래 쉬셨군.”
“예, 뭘 좀 하다 보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없이 술잔을 닦는데 집중했다.
“.......”
원래 바텐더는 다 이렇게 술잔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나? 클로이가 없으니 뭔가 더 말이 없어진 느낌이다.
도무지 테드가 먼저 입을 열 것 같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묻기로 했다.
“혹시 마법사 현상수배범에 관한 정보 좀 있습니까?”
“있지.”
─스르륵
그가 초상화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노숙자나 고아를 잡아다가 불법적인 인체 실험을 행하는 마법사라네. 비공개 현상수배범이지. 어때, 관심 있으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