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2)
나는 체스터 백작성 성문 밖에 서서, 경비병이 보상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이건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단 말이지....”
성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의 결계.
케른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결계는,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과, 체스터 백작성을 감싸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는 셈이다.
단일 속성이 트리플 이상인 마법사가, 수많은 마나석을 컨트롤해 결계를 생성한다고 한다. 붉은색인걸 보니 불 속성의 결계인가 보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온기가 느껴졌다.
“서울역 버금가는 노숙자들의 성지가 되겠어.”
딱 봐도 겨울에 노숙자들이 들러붙는 부작용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감상을 하며 결계를 구경하고 있으니, 성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병이 돌아왔다.
“에드윈 경께서 한번 뵙기를 청하십니다.”
“......저를요? 알겠습니다.”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성으로 들어갔다. 경비병은 성내 외곽의 통로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어느 문 앞에서 멈췄다.
─똑똑
“모셔 왔습니다.”
“들여보내라.”
나는 경비병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귀족의 방? 엄청 화려하네....’
온갖 고풍스러운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고급스러운 붉은 카펫,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 손질이 잘 되어있는 가죽 소파, 앞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 10분 내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벽난로까지.
엔티크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 이쪽에 앉지.”
에드윈이 자신의 테이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 위에는 두루마리를 봉인할 때 쓰이는 붉은색 실링 왁스가 조용히 끓고 있다.
“세르시아 교인인 줄은 몰랐군.”
“...예?”
“그 브로치 말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엘미나가 준 브로치를.
“적어도 골드 이상의 기부금을 내야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꽤나 독실한 신자인가 보지?”
“아, 아닙니다. 일전에 교회에 도움을 조금 준 일이 있어서 받았습니다.”
“흠. 그래? 생각보다 발이 넓군.”
은인의 증표라더니, 돈만 내면 주는 거였냐.
에드윈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마법사를 잡아 왔던데.”
“예.”
“지금까지 자네가 몇 명을 잡은 줄 아나?”
“여덟 명입니다.”
모험가 수준의 기초 마법사 여섯 명.
그리고 하급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두 명.
“그래. 잘 알고 있군. 꽤 많은 숫자지.”
그렇긴 하다.
기초 마법사야 흔하다고 해도, 그냥 탈영병 자체의 수가 너무 많다는 느낌이었다. 북부에서 전쟁 중이라고는 들었는데, 거기서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이렇게 개판일까 싶었다.
─스으윽
그는 테이블 위에 작은 주머니를 올린 뒤, 내 쪽을 향해 밀어냈다.
이번 일의 보상이다. 에드윈은 탈영병을 잡아 올 때마다 마법사는 1골드, 보병은 10실버로 계산해서 지급해주고 있었다.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조금 더 줄 때도 있고.
“받아라.”
“감사합니다.”
주머니를 열어 확인해 보니 역시 1골드 30실버가 들어있었다. 칼 같은 계산이다.
A급 모험가로 승급한 이후부터, 내게 일주일에 1골드 30실버라는 금액은 그렇게 파격적일 정도로 크지는 않다. 하지만 부수입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쏠쏠하다고 볼 수 있다.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돈주머니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어 들고 있던 중, 문득 에드윈이 넌지시 물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탈영병을 잡아 오는 거지?”
“네? 그야 이것 때문이죠.”
─찰랑찰랑
돈주머니를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래? 매번 그 정도 금액으로 만족하나? 나는 네가 좀 더 달라고 요구할 줄 알았는데. 지난번 러스틴 때처럼.”
러스틴? 아, 그 플레임 오브를 쓰던 마법사.
“그때는 에드윈 님께서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먼저 제안하셨잖습니까? 그 이후로 제가 잡은 탈영병은 그만큼 강하지도 않고.......”
러스틴은 기사 살해범이었다. 내가 최근 들어 잡아들이고 있는 잔챙이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게다가 에드윈 님이 알아서 섭섭지 않게 챙겨주고 계신데, 거기에 대고 제가 먼저 더 달라고 요구하는 건 뭐랄까... 귀족에 대한 예의에 어긋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야 당연히 더 주시면 좋죠.”
내 말을 들은 에드윈이 자신의 적발을 쓸어 넘기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이거 보기보다 소심한 친구로군.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크게 개의치 않는데 말이야.”
그리고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띤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한테 잘 보이고 싶었나 보지?”
“네?? 아, 예.”
도끼병인가? 귀족한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당연히 잘 보이면 좋긴 하지. 그럴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 역시 그랬군. 실력을 증명하며, 나에게 호감을 사려고 했던 거였어.... 출세를 위해서 말이지.”
“예? 그게 무슨....”
“체스터 백작가의 눈에 들어, 전투 마법사로 고용되는 것 말이다.”
“.......”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좋아. 그만큼 보여줬으면 충분해. 자네가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주지. 어차피 처형된 탈영병들 때문에 공석이 많으니까. 어떤가?”
윽, 뭐야. 싫어. 내 인생에 군대는 한 번으로 족하다. 게다가 전쟁터에 끌려가긴 더더욱 싫다.
......아니 근데 일개 기사가 그런 권한까지 가지고 있나? 생각보다 높은 직책인가.
아무튼, 나는 즉시 거절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것도 예의상 거절하는 건가? 너무 부담 갖지 마라.”
“아닙니다. 정말 병사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왜지? 모험가 생활보다는 안정적일 텐데.”
그는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찡그리며 의아해했다.
“저는 자유로운 생활이 좋습니다.”
“흐음. 자유를 중요시하는 타입인가. 하긴, 모험가 출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마법사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에게는 매력이 없는 자리다. 뭐, 포로 심문관이나 헌병 비슷한 역할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고작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게 놔두기엔 좀 아까운데 말이야....”
─탁탁탁
그는 손가락으로 계속 테이블을 두드리며 뭔가를 고민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길 한번 가보는 건 어떤가?”
***
체스터 백작령의 도시 카트카.
나는 ‘오늘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술집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쯤 어디인 거 같은데....”
에드윈이 대략적인 위치가 표기된 약도를 줬지만, 그럼에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도시의 규모가 너무 크기도 하고, 무엇보다 구획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충 되는대로 건물이 들어서 있는 거야 케른헴도 마찬가지지만, 여긴 너무 넓었다.
“그래도 구경할 거리는 많아서 좋네.”
그동안 도시 중앙에 있는 백작성에만 가봤지, 이렇게 제대로 돌아다닌 적은 없었다. 아까 지나가다 모험가 길드를 봤는데, 건물의 크기가 케른헴의 다섯 배도 넘어보였다.
어쨌든 관광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나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혹시 ‘오늘의 기억’이라는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네요.”
이번에도 실패군.
도대체 이 술집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위치를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약도상 이 근처에 있는 듯했기에, 계속 찾아다녔다.
구석구석 돌아다니기를 한참.
나는 어느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조그마한 간판이 달려있다.
[오늘의 기억]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빛바랜 글자가 적혀있었다. 이러니까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르지.
나는 이 작고 낡은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삐그덕
창문 하나 없이 어둑한 실내.
오른쪽에는 벽면에 바(Bar)가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작은 원형 테이블이 깔려있다.
바에 서서 술잔을 닦고 있는 중년의 바텐더 뒤에는, 그럴싸해 보이는 술병들이 진열대에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나름 분위기 있네.’
그래서인지 해가 지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한 명 있었다. 어떤 여자 하나가 바의 구석에서 조용히 술잔을 홀짝이고 있다.
나는 바로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계속 술잔을 닦으며 말했다.
“뭐로 드릴까?”
“아, 저는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이곳에서 현상수배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뚝
잠시 바텐더의 손짓이 멈췄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술잔을 닦기 시작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장소를 헷갈리신 거 아닌가?”
'듣던 대로군.'
에드윈은 내게 이곳을 추천해줬다.
자유롭기를 원하고, 사람을 잡는 능력이 출중하니, 현상수배범을 잡아보는 게 어떻겠냐면서.
체스터 백작령은 넓다.
인구도 많다. 당연히 범죄자도 많다.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니, 범죄자를 잡아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영주의 책임이다.
직접 병사를 보내 처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외주를 맡기는 편이 싸게 먹힌다고 한다. 범죄자에게 현상금을 거는 것이다.
다만 위험한 범죄자에게 공개적으로 현상금을 걸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들어 오히려 피해가 늘어날 수도 있고, 범죄자가 경각심을 느껴 도주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에겐 비공개적으로 현상금을 걸기도 한다. 실력이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여기다.
“여기가 ‘오늘의 기억’이라는 술집 아닙니까?”
“맞소만.”
바텐더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현상수배범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술집에 와서 술을 달라고 해야지, 이상한 걸 달라고 하시는군. 술 마실 생각이 없다면 그만 나가주시게.”
역시 에드윈의 말대로 잡아떼는군.
에드윈은 이럴 때 자신의 이름을 대고, 약도를 건네주면 된다고 했다.
“저는 에드윈 님의 추천을 받고 왔습니다. 이곳에서 현상금─”
“에드윈? 에드윈 씨가 너를 보냈어?”
갑작스레 새로운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네. 저한테 딱 어울릴 거라면서 이곳으로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혹시 에드윈 씨가 뭐 준거 없어?”
“아, 있습니다. 여기요.”
나는 품에서 약도를 꺼내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정말이네? 흔한 일은 아닌데.”
ㅡ파슷!
순간, 약도를 들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왼손으로 딱밤을 때리듯 약도를 때리자,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뭐지? 마법인가?’
순간적으로 약도를 꽝꽝 얼린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의 캐스팅 속도라면, 꽤나 높은 수준의 마법사일 것이다.
“그 에드윈 씨가 보냈단 말이지....”
어쨌거나 그녀도 내가 신기하다는 듯, 뒷짐을 지고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나를 관찰했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클로이라고 해. 여기 바텐더는 테드 씨고.”
그녀가 자신과 바텐더까지 소개했다.
테드라고 불린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성은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귀족이라고 확신했다. 계속해서 에드윈 ‘경’이 아니라 에드윈 ‘씨’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민은 기사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아, 저는 엘입니다.”
“엘! 부르기 좋은 이름이네. 만나서 반가워!”
“저도 반갑습니다.”
“괜찮다면 말을 편하게 해도 될까?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헤헤.”
이미 편하게 하고 있었잖아?
아무튼 붙임성 있는 성격 같아 나쁘지 않았다. 동업자끼리 데면데면한 것보다야 편한 게 낫다. 게다가 귀족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고마워! 엘도 말 편하게 해도 돼.”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녀는 헤실헤실 웃었다.
아무튼, 나는 이곳에 친목 도모를 하러 온 게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본론을 꺼냈다.
“그럼 현상수배범에 대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안 돼. 미안하지만 아무리 에드윈 씨가 보냈다고 해도, 테스트는 거쳐야 하거든.”
“테스트요?”
“응. 엘, 너의 수준을 알아야 하니까.”
뭐, 합리적인 제안 같군.
“그러죠.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흐음. 일단은 처음이니까 가벼운 일을 맡겨보는 게 좋겠죠? 테드 씨?”
“그렇겠지.”
테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가 적혀있는 종이를 꺼내서 살폈다.
“이게 좋겠군. 카트카 빈민가에서 네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이 자를 잡아보는 게 어떠신가? 현상금은 15실버라네.”
“.......”
아니, 장난하나.
그런 일 할 거면 여기 안 왔지.
“혹시 다른 일은 없습니까? 마법사 현상수배범이라든가....”
“마법사? 당연히 있긴 하네만... 쉽지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나?”
“예. 저는 괜찮으니 그걸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