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1)
희망의 여신 세르시아 교단의 교회.
검정색 가운과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회색 스톨을 목에 두른 목사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사악한 마물을 정화한다는 뜻을 품고 떠났던 형제들이 어찌하여....”
그는 수습 성기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는, 충격에 휩싸인 듯 보였다.
“감당하기 힘든 마물이 출현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자세한 건 안에서 말씀 드릴게요.”
엘미나는 우리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목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도린 형제는 교회 벽면에 붙어있는 길쭉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크흐흐. 어떤 보상을 줄지가 기대되는군.”
“글쎄. 뭐 대단한 걸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아무리 세르시아 교단의 교회라지만, 이곳은 케른헴. 다른 도시에 비해서 교회의 규모가 작았다. 이곳의 목사나 사제들도, 몇 년간 경험을 쌓다가 더 큰 교회나 본단으로 떠난다.
던전에 파견한 것도 ‘성기사’가 아니라, ‘수습 성기사’이지 않은가? 여기는 규모도, 인력의 풀도, 가지고 있는 권한도 작다.
그냥 돈이나 몇 푼 쥐여주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냥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근데... 용병에 관해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용병? 너도 드디어 우리 형제 용병단에 가입하고 싶어진 것인가? 잘 생각했다!”
내 입에서 용병이란 말이 나오자 테도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들의 용병단에 나를 영입하는 것이 이 녀석들의 숙원 중 하나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혹시 용병도 탈영병 같은 걸 잡기도 하나?”
모험가와 용병의 차이는, 하는 일의 스펙트럼 차이다. 모험가는 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을 하지만, 용병은 그것을 포함해 사람과 싸우는 일까지 아울러서, 더 다양한 일을 한다.
만약 용병이 탈영병을 잡기도 한다면, 용병 일을 병행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 하다.
“의뢰가 들어온다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용병에게 그런 의뢰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탈영병은 현상금을 걸어두면 사람들이 알아서 잡아 오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겠네.”
딱히 용병의 영역은 아닌 듯했다.
그냥 혼자 잡으러 다녀야겠군.
어쩌면 혼자가 더 편할 수도 있다. 나는 탈영병을 붙잡아도, 마법사가 잠들 때까지 일부러 시간을 끌어야 한다. 파티를 꾸려서 나가면,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엘미나가 목사와 대화를 마친 모양인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대뜸 사과부터 했다.
“목사님께서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원래는 목사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데...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서둘러서 교단에 성기사를 요청하러 가셨거든요. 그런 던전은 꽃이 필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화해야 한다면서요.”
그래. 그 던전은 그대로 두기에는 좀 위험하긴 하지. 정식 성기사를 부르면 충분히 청소할 수 있을 듯싶다. 그들이라면 구울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서도 무사할 것이다.
“대신 목사님이 여러분께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엘미나가 하얀색의 작은 주머니를 우리에게 한 개씩 건네줬다. 열어보니 은화가 스무 닢가량 들어있었다.
수습 성기사의 원수를 갚아준 것 치고는 좀 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흐흐.”
“고맙소!”
“세르시아님께 이 영광을!”
그래도 도린 형제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기에, 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야단을 떨어댔다.
“아, 그리고 엘님. 잠시 이쪽으로.”
엘미나가 나를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크리스탈 같은 고급스러운 병.
그리고 안에 든 투명한 액체.
이건 딱 봐도 흐름상.......
“......설마, 이건 성─”
“쉿!”
그녀가 황급히 손을 들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세르시아님의 축복이 담긴 상급 성수에요. 다른 분들에게도 드릴 수는 없으니, 부디 조용히 받아주세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입이 틀어막혀 있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엘미나가 손을 내렸다.
“오오, 고맙습니다. 근데... 이건 효능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물과 다름없어 보였다. 혹시 신앙심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거나 한다면, 이거로 그냥 양치나 할 생각이다.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어요. 신체가 절단된 정도의 심각한 상처만 아니라면 회복이 가능해요. 심지어 제 치유 능력보다도 뛰어나요!”
“그, 그런....”
그런 걸로 양치를 하려고 했다니.
엘미나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면 보통 물건이 아니다.
회복 포션은 휴대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성능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싸다. 이건 못해도 골드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겠지만, 팔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위급 상황에 쓰도록 하자.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그녀는 아직도 줄 것이 더 남았는지, 세르시아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은빛 브로치를 건넸다.
“교단의 은인이라는 증표에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교단의 어느 교회에 가도 우선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어요. 물론 돈은 받지 않구요.”
“이야, 든든하네요.”
세르시아 교단의 교회가 없는 도시는 없다.
어딜 가든 치료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즉시 이 무료 치료권을 가슴에 달았다.
“잘 어울리시네요! 저희 교인처럼 보이세요!”
“아하하....”
엘미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약간의 잡담을 더 나눈 뒤, 그녀는 교회 입구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점,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저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린 형제와는 전리품을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탈영병 사냥을 시작했다.
***
케른헴 북쪽 변방의 숲.
“모험가 주제에 감히 우리를 잡겠다고? 그것도 너 혼자서? 이것 참 어이가 없군... 처리해.”
로브를 입은 사내가 눈짓하자, 세 명의 병사가 검을 뽑고 나를 향해 다가온다.
“크크크. 네놈의 검과 갑옷을 팔아서 술값으로 써주도록 하지.”
“아니, 잠깐! 잠깐만 멈춰보세요, 여러분들!”
나는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할 셈이냐?”
“오른팔을 내놓는다면 살려줄 수도 있다. 두 번 다시 검을 들지는 못하겠지만. 크크크.”
기세등등해진 병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아니, 그쪽들 말고요. 거기 뒤에 계신 마법사님?”
“......나? 뭐지?”
“혹시 어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십니까?”
로브를 입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정말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정신 나간 놈이었군. 죽여.”
그는 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내 질문을 일축했다.
‘귀찮게 됐군. 대답에 따라서 그냥 보내줄 수도 있었는데.’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게 흘렀다.
처음엔 순조롭게 마법을 훔쳤었다.
내가 가진 마법의 수가 워낙 적었기에, 탈영병 마법사를 잡는 족족 마법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다룰 수 있는 마법들이 늘어나다 보니, 기껏 탈영병을 잡아도 뺏을 마법이 없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웬만한 기초 마법은 거의 다 배운 상태. 상대가 하급 마법을 쓸 수 있거나, 특별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닌 이상은 내게 그다지 가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마법을 쓸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물론 대답해 주지는 않았지만.
‘일단 잡고 나서 물어보는 수밖에.’
“흐아아압!!”
“죽어라!”
세 명의 병사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든다.
이럴 때 쓰기 딱 좋은 마법이 있다.
─치지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체인 라이트닝’ - 3회]
내 손에서 뻗어나간 푸른 전류 한줄기가,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에게 직격했다.
“끄아악!”
그리고 그를 시작점으로, 전류가 연쇄적으로 옆 사람에게 퍼져나갔다.
“아악!!”
“흐어어!!”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법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네, 네놈! 마법사였나!”
“예.”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며, 파이어 애로우를 캐스팅했다.
─화르륵!
그리고 마법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흥, 고작 이따위 마법으로!”
─후웅!
로브를 입은 사내는 코웃음 치며, 쉴드를 전개해 어렵지 않게 파이어 애로우를 막아냈다.
하지만 내 검까지 막지는 못한다.
저건 마법방어 쉴드니까.
나는 검의 폼멜로 녀석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꺼윽!”
그는 요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기절했다.
“늘 이런 패턴이네.”
최근에서야 느낀 거지만, 나는 그야말로 마법사와의 전투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가 내 마법을 막기 위해 마법방어 쉴드를 쓰면 검으로 공격하면 됐고, 내 검을 막으려고 물리방어 쉴드를 쓰면 마법으로 공격하면 됐다.
검과 마법이 모두 가능한, 하이브리드의 숨은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뭐, 진짜배기 강자들한텐 안 통하겠지만.”
탈영병 마법사는 끽해야 하위 마법사 정도라서 이런 패턴이 잘 먹혀들지만, 수준 높은 마법사들에게도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찰칵
나는 무려 2골드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마나 속박 고리를 마법사의 목에 채웠다.
“이번에는 뽑아먹을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네.”
***
체스터 백작성 내에 있는 에드윈의 집무실.
─똑똑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엘이라는 모험가가 탈영병을 잡아 왔습니다.”
“......또? 이번에도 마법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에드윈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짐짓 당황했다.
엘에게 탈영병을 잡으면 백작성으로 데려오라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큰 기대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 모험가가 잡아봐야 얼마나 잡겠는가. 그저 일반 보병 몇 명을 잡아 오는 정도에 그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모험가는 마법사를 잡아 왔다. 심지어 한 번만 잡아 온 것도 아니었다. 두 달쯤 전부터, 정확히 일주일마다 마법사를 포함한 탈영병들을 잡아 오고 있었다.
“그가 뭔가 특별히 요구하는 게 있나?”
“없습니다. 그냥 주시는 대로 받겠답니다.”
“이번에도 그렇단 말이지....”
엘은 딱히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만나기는커녕, 성에도 들어오지 않고 탈영병만 넘겨주고 갈 뿐이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뭘까.’
상대는 줄기차게 탈영병을 잡아오고 있었다.
에드윈은 호기심이 동했다.
단순히 돈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일주일마다 잡아 오는 걸 보면, 그는 거의 항상 탈영병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실력으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탈영병을 잡는 것보다는 더 벌 수 있다.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을 쌓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단순히 정의감? 설마...... 등용을 원해서??’
등용되고 싶어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며 어필하고 있는 거라면 이해가 갔다.
에드윈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서 여기로 불러와라. 아무래도 대화를 한번 해봐야겠어.”